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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의 작은 숲

2018년 2월 28일 — 0

임순례 감독은 소시민의 삶과 연대, 희망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주제들에 천착해왔다. 그가 이번에는 음식으로 사람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한다.

2018년 한국, 이제 사람들은 스페인이나 크로아티아 같은 이국적이고 화려한 여행지 대신 강원도 정선이나 외딴섬에서의 생활을 보기 위해 채널을 사수한다. 시골에서의 삶이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와는 반대쪽인 도시의 피로를 반영한다. 예능 속에 등장하는 시골은 일종의 판타지적 공간으로 소비되지만 2월 28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조금 다르다. 영화는 주인공의 자급자족 집밥과 야무진 시골 생활을 통해, 무리해서 더 많은 열매를 맺으려는 과시적인 삶 대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 근본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김태리, 류준열, 진기주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일본의 만화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동명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임순례 감독은 전작 <제보자>를 함께한 영화 제작사 수박 대표의 제안으로 이 영화를 기획하게 됐다. “원작 만화가 일본에서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대표님이 영화를 보고 큰 위안을 얻었다며 연출해보는 것이 어떻겠냐 하셨죠.” 그가 이 영화를 맡은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영화계는 혈흔이 낭자하는 선정과 폭력의 수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형국. “장르적이고 자극적인 영화들 사이에서 소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의 말대로 담담하고 작은 작품이긴 하지만 이번 영화가 대중적인 매력까지 갖춘 데는 주연 배우의 덕이 크다. 충무로의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고 있는 김태리, 류준열을 비롯해 영화를 통해서는 처음 얼굴을 알리는 진기주는 식물로 치면 유기농 작물 같은 청정한 에너지를 주는 배우들이다. 임 감독은 “작품 성격상 배우가 가진 자연스러운 분위기와 배우들끼리의 케미스트리가 가장 중요했어요. 또 1년이라는 다소 긴 촬영 기간 동안 현장에서도 밝은 에너지로 어울릴 수 있었으면 했는데, 세 배우 모두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진실하게 임해주어 아주 화목한 분위기에서 촬영을 마칠 수 있었어요”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도시의 삶에 피로를 느낀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휴식을 취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조금씩 뿌리를 내려가는 과정을 그렸다. 혜원의 고향 친구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은 혜원의 전원 생활을 지지하고 따뜻하게 채워주는 존재다. 영화는 주인공이 청소년일 때 엄마가 홀연히 사라지고, 성인이 된 주인공이 도시 생활에서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과 같은 원작의 큰 설정은 그대로 둔 채 부분적으로 한국 정서에 맞게 각색됐다. 엄마가 떠난 이유와 주인공이 엄마를 이해하는 과정은 보다 섬세하게 묘사되고, 극중 새로운 이야기를 열거나 인물을 유대시키는 역할을 하는 음식들도 다르게 그려졌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영화 속 음식

무더운 여름날 샤워를 마치고 머릿수건을 풀지 않은 채 훌훌 삼키는 오이 냉콩국수나 스트레스를 풀려 홍고추를 가득 푼 고추기름으로 만든 매운 떡볶이 등, 영화에 등장하는 음식들에는 배경이 되는 계절이나 인물들의 우정, 어릴 적 주인공과 엄마의 추억이 녹아나 있다. 또한 음식들은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 혜원과 같은 ‘도시인’들이 겪는 내적 허기와도 관계가 있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혜원은 갑자기 왜 내려오게 된 거냐 묻는 은숙에게 장난스럽게 웃으며 “배고파서 왔어”라고 대답한다. 아르바이트와 취직 준비를 병행할 수밖에 없었던 서울 생활, 냉장고에 있는 음식물은 썩어가고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운 끼니는 마음의 허기를 달래기엔 역부족이다. 배고파서 왔다는 혜원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닌 것이다. 혜원이 시골에 도착해 첫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취직 시험에서 떨어지고 도피하듯 고향집에 내려온 혜원은 극심한 배고픔을 느끼지만 오래 비워둔 집엔 먹을 것이 없다. 밖으로 나가 하얗게 눈 내린 배추밭에서 쓸 만한 배추 한 포기를 캐서 돌아온 혜원은 뜨끈한 배춧국을 뚝딱 끓여 먹는다. 호호 불어가며 먹는 내내 느껴지는 만족감, 단전에서 올라오는 ‘아~’ 하는 탄성. 이 같은 장면은 보는 사람마저 흐뭇하게 만든다. 단순히 끼니를 때우려 조악한 것들을 여럿 삼켰을 때 드는 거짓 배부름이 아닌, 마음까지 달래주는 진짜 배부름이 느껴져서다. <리틀 포레스트>의 음식을 맡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진희원은 촬영 기간 동안 직접 심고 기른 우리 농작물들로 한 끼 한 끼를 정성껏 만들어 먹는 극 중 혜원에게 매료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공들여 밥상을 차리며 과거의 기억을 꺼내고, 타인을 이해하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과정들이 건네는 ‘무심한 위로’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며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직접 심은 작물이 익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때가 되면 수확해 요리해 먹는 모습, 더위는 시원한 음식으로 달래고 추울 땐 찬 바람에 막걸리를 기울이며 계절의 온도를 충만하게 느끼는 시골 생활은 보는 것만으로 관객에게 위안을 안기기에 충분하다. 도시와 시골을 교차하며 정체성을 깨달아가는 혜원의 여정을 양파의 ‘아주심기’에 비유하는 표현 또한 영화의 결을 한층 선명하게 한다. 아주심기는 땅에 씨를 바로 심어 작물을 기르는 것과 달리 땅을 옮겨가며 모종을 키우다 수확할 땅에 마지막으로 심는 것을 말한다. “아주심기를 한 양파는 더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 겨울을 보낼 수 있어요. 이렇게 겨울을 보낸 양파는 그렇지 않은 것보다 야무지고 달죠.” 혜원을 비롯한 도시인과 청춘들, 이 모든 방황이 결국 흔들림 없이 정착하기 위한 아주심기인 걸까. 마치 ‘약속의 땅’처럼 희망차게 들려온 아주심기란 표현은 임 감독과 영화의 감수성이 동시대적인 상황에 감응하고 이를 어루만지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임순례가 말하는 공존

자신의 영화를 통해 주로 인간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를 그려냈듯 인간 임순례가 살아온 여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난한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못 살고 못 배운 사람들이 가족이고 친구고 이웃이었다는 임 감독은 자연스레 연민을 품을 수 있는 존재에 유독 마음을 기울이게 됐다. “모든 존재의 무게가 똑같다고 생각해요. 사회 구성원 중에서 누군가가 구별되고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부당해요. 동물도 마찬가지예요.”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에서 오늘까지 9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한 임순례 감독은 이번 영화에 혜원의 시골 생활을 함께하는 반려견 ‘오구’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자신도 이곳의 볕과 토양에서 자라난 작물’이란 혜원의 표현, 그리고 엔딩 크레디트 중 ‘영화를 완성할 수 있게 한 모든 분들과 동식물에게 감사합니다’란 인사말에서도 이 같은 감독의 메시지는 온전히 읽힌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직접 기른 제철 작물로 요리를 하고 섭취하는 1차원적인 행위를 통해, 우리 모두 자연의 일부가 되어 공존해야 한다고. 그것이 내적 허기를 해결하고 행복에 가까워지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귀농을 장려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자급자족하는 삶과는 현실적인 괴리가 큰 사람들은 이 영화를 어떻게 소화하면 좋겠냐고 묻자 임 감독은 “관객들이 너무 쫓기면서 살지 말고 잠깐 멈춰서, 잘 살고 있는지 잘 먹고 있는지 영화를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제 지인이 그러더군요. 영화를 보고 아주 오랜만에 자기 자신을 위해 정성껏 끼니를 준비하고 맛있게 먹었다고. 제가 관객에게 기대하는 건 그런 종류가 될 것 같아요”.
정성스럽게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식재료를 씹으며 계절을 느끼고, 음식과 관련된 추억을 회상해내기도 하고, 누군가와 함께 나누며 유대해가는 과정. 그것이야말로 내 안의 허기를 채우는 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태껏 많은 이들이 간과해왔다. 임 감독의 이번 작품은 그러한 단순하면서도 소중한 가치를 사계절이 담긴 아름다운 영상으로 다시금 되뇌게 만든다. 해사한 봄 햇살과 함께 찾아온 임순례표 <리틀 포레스트>. 치열한 도시 생활에 지쳐간다면, 영화가 선물하는 조그만 씨앗 하나 마음속에 옮겨 심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가꾼 작물은 텃밭이 되고 어느덧 작은 숲을 이룰지도 모른다. 영화는 되도록이면 공복 상태에서 관람하는 것이 좋다. 영화가 끝나면 텅 빈 속을 진정한 배부름으로 채워나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질 테니 말이다.

edit 장은지 — photograph 유라규(인물), 메가박스(주)플러스엠(영화 스틸 및 촬영 현장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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