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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초코의 탐미주의

2018년 2월 9일 — 0

베네수엘라에서 한국으로 이민 온 존과 댄 형제는 베네수엘라에서 나는 카카오빈으로 만든 프리미엄 초콜릿을 소개하며 초콜릿을 미식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성수동에 자리 잡은 탐미주의 초콜릿 공방 피초코를 찾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 해의 시작엔 유독 추운 날들이 이어졌다. 시련은 교훈을 주고 마음을 단련시키기 마련이다. 해가 바뀌는 길목마다 수문장처럼 나타나는 강추위는 행인으로 하여금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덧없는 욕심은 졸졸 따라 버리게 하고 깨끗이 씻어 잘 말린 커피잔처럼 마음을 겸손히 비워내게 한다. 그래서일까, 새해에 만난 사람들과 나눈 얘기는 무언가 진한 향기를 남긴다. 성수동 한적한 거리에 위치한 피초코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존과 댄 형제가 첫마디를 건넸다. “많이 춥죠? 핫초코 한잔하실래요?” 올해 낯선 이에게 들은 말 중 가장 달콤한 것이었다. 그들이 건넨 묵직한 점도의 핫초코를 한 모금 머금고는 방금의 인사말만큼 이 계절에 절묘한 인사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흐뭇해졌다. 피초코에서는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 낮 12시에서 오후 3시까지 직접 만든 초콜릿을 판매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초콜릿을 연구하고 개발한다. 피초코의 문 앞에 쓰여 있듯 이곳은 ‘베네수엘라 싱글 오리진 빈투바 커버춰를 연구하는 공간’이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초콜릿에 관한 기본적인 설명을 보태자면 본래 초콜릿은 카카오빈에서 추출한 카카오 버터, 그 버터를 짜내고 남은 것을 간 코코아 파우더, 구운 카카오빈을 분쇄한 카카오 매스, 설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시중에서 판매되는 초콜릿은 비싼 카카오 버터 대신 팜유 등의 값싼 오일을 사용하고 초콜릿 향미를 내기 위한 화학 첨가물에 코코아 파우더를 가미한 것이 대부분이다. 존과 댄은 슈퍼푸드에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카카오로 만들어 하나의 훌륭한 식품임에도 불구하고 초콜릿이 몸에 해로운 정크푸드로 인식되어온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라 말한다. “그동안 사람들은 와인이나 커피의 원산지, 재료, 제조, 유통 과정에는 관심을 기울이면서 초콜릿은 대표적인 몇 개의 브랜드로 인식하는 것에 그칠 뿐,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왔어요.” 피초코는 초콜릿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확장시키고 초콜릿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개선시키기 위해 존과 댄 형제가 시작한 행보다.

베네수엘라에서 온 형제와 카카오

피초코를 운영하는 존과 댄 형제는 베네수엘라 출신 1.5세대 교포다. 자기의 한국말이 어눌하고 표현이 부족하다며 머쓱해하기도 했지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단어들로 이어간 한마디 한마디엔 진심과 강단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 온 지 2년 정도 되었어요. 조금 슬픈 이야기지만 지금 베네수엘라는 정치인들로 인해 사람들이 살기가 매우 어려운 환경이에요.”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으로 한때 중남미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던 베네수엘라는 두 차례의 사회주의 정부를 거치며 유가 폭락에 성장 기반이 무너졌다. 경제난에 물가까지 치솟으면서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로 인해 치안이 상당히 열악해진 상황. 강도, 살인, 납치 등 일상을 위협하는 범죄들은 베네수엘라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살기 위해 이민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존과 댄 형제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한국인 부모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한국으로 국적을 옮길 수 있었던 그들은 자신들처럼 베네수엘라와 한국을 연결 지을 수 있는 사업을 구상했다. “베네수엘라 하면 미인이나 석유를 쉽게 떠올리지만 럼과 초콜릿도 아주 유명해요. 베네수엘라에서 나는 최고의 카카오로 만든 프리미엄 초콜릿을 소개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초콜릿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즐길 수 있잖아요.” 흔히 초콜릿이라고 하면 고급 브랜드들로 유명한 유럽이나 카카오빈 최대 수출 지역인 아프리카를 먼저 떠올릴 테다. 그러나 오랫동안 베네수엘라는 최고급 카카오빈 수출국이었다.
초콜릿의 원재료 카카오빈 이전에 카카오 열매가 있고 그보다 먼저 카카오나무가 있다. 카카오나무의 종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포라스테로Forastero로 생명력이 질긴 품종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에서 많이 기르고 있으며 이 품종에서 수확된 카카오빈은 전 세계 카카오빈 생산량의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을 정도로 가장 대중적이라 할 수 있다. 반면 크리오요Criollo는 식민 시대 이전부터 재배되었던 오리지널 품종으로 맛과 풍미는 우수하지만 기르기가 까다롭고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 전체 카카오빈 생산량 중 겨우 5%를 차지하는 고급 종이다. 마지막으로 트리니타리오Trinitario는 크리오요와 포라스테로를 접목해 개량한 품종이다. 베네수엘라에서는 트리니타리오와 크리오요가 가장 많이 식재되어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형제는 이렇게 설명했다. “베네수엘라의 지역들은 아마존과 카리브해, 사막과 눈 쌓인 산맥 같은 다양한 환경을 가지고 있어 토질이 다른 곳보다 좋습니다.” 실제 베네수엘라는 남서쪽에서 북서쪽까지는 안데스산맥의 지맥인 메리다산맥이 펼쳐져 세계 최대의 유전 지대를 포용한다. 평원이 있는 중심부에는 남미에서 세 번째로 긴 오리노코강이 흐르고 아마존 분지의 북쪽 언저리를 끼고 있는 베네수엘라 남쪽은 정글 지대로 철광석을 비롯한 다량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한 나라 안에서의 지형적 차이가 매우 크고 자원이 풍부한 베네수엘라 땅이 ‘돌을 심어도 돌나무가 자랄 것이다’란 말이 있을 정도로 비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프리미엄 초콜릿의 자격, 빈투바

빈투바Bean to Bar는 카카오빈이 판매대에 오르기까지 발효, 건조, 로스팅, 콘칭, 템퍼링 등의 공정을 전문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명백히 밝히는 시스템이자 그렇게 제조된 제품을 의미한다. 그 시작은 훌륭한 카카오빈을 찾는 것일 테다. 존과 댄 형제는 스스로를 ‘카카오 헌터’라 표현한다. 그들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영상 중에는 베네수엘라 북쪽 해안의 추아오Chuao 마을을 향해 최고의 카카오를 찾아가는 여정이 담겨 있다. 최고의 카카오빈을 생산하는 추아오는 차로 가는 길이 없어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 이곳은 식민 시대 때부터 유럽에 최고급 카카오를 조달해왔지만 베네수엘라 내륙에서는 접근성이 낮다 보니 마치 전설처럼 내려오는 묘령의 마을로 여겨지고 있다. “마을에 신비로움을 더하는 또 다른 사실 하나는 카카오빈을 수확하고 발효, 건조하는 일을 마을 여성들이 도맡아 한다는 거예요.” 이곳의 여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엄마에서 딸로, 다시 그 딸의 딸에게로 일을 대물림해왔다. 이곳의 카카오가 맛이 좋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라고 형제는 말한다. “맛있는 초콜릿이 되기 위해서는 발효와 건조 과정이 매우 중요해요. 경험으로 체득한 기술과 대를 이어 전수한 노하우가 있었기에 이 마을이 위대한 카카오빈 산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죠.” 존과 댄 형제는 한동안 추아오 마을에 머물며 카카오빈이 초콜릿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아쉽게도 추아오에서 수확한 카카오빈은 가격이 너무 높아 피초코 공방에 들여오진 않고 있다. 형제는 추아오 마을 외에도 크리오요 피가 수혈된 품종이 자라는 수르 델 라고Sur Del Lago 지역에 머무르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내에서도 프리미엄 카카오빈만 생산하는 농장들에서 직접 쌓은 경험을 통해 존과 댄은 훌륭한 카카오빈을 보다 충실히 이해하고 선별할 수 있게 되었다.
피초코에서는 수르 델 라고 등 베네수엘라 프리미엄 농장에서 발효,∙건조 단계를 거친 카카오빈을 선별해 수입한 뒤, 이를 분쇄하여 가벼운 껍질은 날리고 중요한 카카오 닙스를 분리하는 작업을 한다. 이후 닙스를 콘칭 기계에 투입하여 분쇄하는데 분쇄된 카카오 닙스는 처음에는 가루 상태였다가 닙스에 함유된 카카오 버터 때문에 곧 찐득한 형태로 바뀌며 초콜릿이 된다. 긴 시간 콘칭할수록 더욱 부드러운 초콜릿이 완성된다. 현재 피초코 스튜디오에서는 제품의 성격에 따라 직접 콘칭한 초콜릿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 엘 레이El Rey의 커버춰를 사용한 초콜릿을 연구하며 적극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수제 초콜릿의 재료가 되는 커버춰는 순수한 카카오 버터 함유량이 30% 이상인 얇은 동전 모양의 초콜릿을 말한다. 엘 레이는 1929년에 설립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명망 높은 초콜릿 브랜드 중 하나다. 까다롭게 관리된 100% 베네수엘라산 카카오빈으로 만든 싱글 오리진 초콜릿을 선보이며 국제 초콜릿 어워드에서 4년 연속 수상한 바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피초코가 빈투바와 함께 싱글 오리진 초콜릿(커버춰)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싱글 오리진 초콜릿은 부족한 맛을 카카오빈의 블렌딩을 통해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원재료 자체에 자신감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다. 마치 단일 원두의 맛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는 싱글 오리진 스페셜티 커피와 같은 맥락이다. 몇 년 전부터 확산된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매일같이 소비하는 커피를 ‘마시는 것에서 즐기는 미식 문화’로까지 격상시키기도 했다. 피초코는 원재료와 제조 과정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초콜릿의 미식화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한 입의 호사, 초콜릿의 미식화

피초코의 대표 제품은 엘 레이의 싱글 오리진 커버춰를 피초코의 레시피로 재해석한 초콜릿 바 ‘바라Barra’다. 이는 설립 당시 피초코 쇼콜라티에였던 에이미를 필두로 존과 댄 형제가 협력해 피초코 연구실에서 탄생시킨 작품이다. 바라는 커버춰를 녹이고 식히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는 템퍼링을 거친 뒤 틀에 부어 굳히는 몰딩 작업 후 완성된다. 쇠가 뜨거운 온도와 차가운 온도를 오가며 견고해지듯 템퍼링이 잘된 초콜릿은 쫀쫀하게 응집되어 입 안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으며 입 안 골고루 동일한 맛을 전한다. 바라의 표면을 보면 피초코가 직접 고안한 몰드 또한 평범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초콜릿을 쪼개 먹기 쉽도록 나 있는 기하학적인 분할 디자인은 바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기원하는 황금 비율에 착안한 것이다. 삼각형과 사각형 총 네 개로 쪼갤 수 있는 가장 큰 정사각형은 ‘그룹 포션’, 그 아래 삼각형 두 개가 합쳐져 이루는 두 번째로 큰 정사각형은 ‘커플 포션’, 균등하지 않은 비율의 사각형 두 개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은 ‘개인 포션’이다. 존은 “모두가 똑같이 나눠 먹는 것이 아니라 입맛에 따라 더 많이 먹을 수도 있고 적게 먹을 수도 있는 차별화된 초콜릿 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바라는 카카오 성분이 31% 함유된 화이트부터 73.5%까지 함유된 블랙까지 네 가지의 오리지널 라인과 다양한 재료가 첨가된 여섯 가지의 플레이버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볶은 커피 원두가 화이트 초콜릿과 만나 크리미하고도 깊은 풍미를 끌어내는 ‘화이트+커피’ 바라는 2017년 국제 초콜릿 어워드(ICA)의 플레이버드 바Flavoured Bars 부문에서 브론즈 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화이트+커피 바라는 엘 레이 화이트 커버춰에 커피 원두를 갈아 접목한 뒤 온장고의 숙성을 거쳐 만들어진다. 이외에도 플레이버 라인은 견과류의 고소함과 카카오의 스모키함을 즐길 수 있는 ‘블랙+카카오 닙스’와 풍부한 얼그레이 향이 가미된 ‘밀크+얼그레이’, 시원한 소금 맛과 열대 과일의 상큼함을 느낄 수 있는 ‘블랙+솔트앤페퍼’ 등으로 구성된다. 존은 “단맛과 짠맛이 적절히 오가는 오묘한 맛의 블랙+솔트앤페퍼는 도수가 센 사케나 스모키함이 느껴지는 싱글 몰트위스키와 곁들여도 아주 잘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피초코에서는 직접 만든 초콜릿과 술의 페어링도 제안하고 있다. 단순히 간식으로 곁들이던 초콜릿을 넘어 이제 국내에서도 미식을 위한 초콜릿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피초코의 초콜릿은 섬유질과 칼슘, 철 등의 미네랄이 풍부하고 항산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는 건강식품 카카오를 다량 함유하고 있어 몸에 이롭다. 또 자칫 무던해 보이지만 검고 매끈한 초콜릿 바에 흩뿌려진 하얀 소금 결정이나 적용된 황금 비율, 맛의 조합과 같은 요소들은 탐미적이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존에게서 피초코의 철학과 초콜릿의 맛과 제조 공정을 표기하고 있는 피초코 리플릿을 건네받았다. 거기엔 존과 댄 형제가 긴 시간 열정적인 설명을 통해 가장 전달하고 싶었을, ‘이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대체 왜 하고 있는지’가 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리플릿 커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정말이지, 당신은 더 나은 초콜릿을 누려야만 합니다(Seriously, You Deserve Better Choco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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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 장은지 — photograph 이병주, 피초코(베네수엘라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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