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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스타 @정동현

2018년 2월 5일 — 0

한 잔의 술이 밝게 빛나는 순간이 있다. 크고 넓은 바는 입이 무거운 친구처럼 듬직하고 그 바 앞에 선 바텐더는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술을 따른다. 곁들여 나오는 음식의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할 일을 잊지 않고 성실한 맛을 낸다. 청담의 폴스타의 바에 앉아 잠시 몸을 기대어 쉬어간다. 밝게 빛나지만 난하지 않은 그 바의 이름은 오랜 잔상을 남긴다. 북극성, 외로우나 지지 않는 별의 이름이다.

text 정동현 — illustration 왕조현

바텐더는 양손에 셰이커를 들었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고 바의 간판은 없었다. 대신 키가 큰 노인이 중절모를 쓰고 밖을 지켰으며 큰 문 바로 뒤에는 점성술사가 앉아 카드로 점을 봤다.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치마를 입고 어두운 밤에도 확연히 빛나는 화장을 한 여자들은 산발을 한 점성술사 앞에 앉아 카드 한 장에 운의 향방을 걸었다. 그리고 바에 빈자리가 나면 그 여자들은 치던 점을 미루고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는 바의 끄트머리 자락에 앉아 바텐더의 눈길을 기다렸다. 뉴욕의 ‘임플로이즈 온리Employees Only’는 ‘월드 베스트 바’의 10위 안에 드는 곳으로 입구가 숨겨진 스피크이지 바Speakeasy Bar다. 우리의 주문을 받은 바텐더는 “예스”라고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앞으로 주문서가 밀려왔다. 그가 우리의 주문을 제대로 받았는지 미심쩍었다. 하지만 그는 새끼손가락으로 주판을 치듯 가벼운 손놀림으로 두 개의 셰이커에 술을 섞어 담았다. 그러고는 양손에 셰이커를 들고 거칠게 흔들었다. 그날 마셨던 칵테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바만의 오리지널 칵테일이었고 실상 이름을 기억한다 한들 다른 바에 가서 시킬 수도 없는 종류였다. 하지만 불에 그을린 듯한 피트 향과 혀를 강하게 때리는 단맛과 신맛이 끈적하게 뱀처럼 목구멍으로 내려가던 질감은 생생히 기억난다. 우리는 그에게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 말인 양,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른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 안에는 코와 머리를 울려 발성하는 영어 소리가 붕붕거렸고 흐릿한 조명은 옆 사람의 그림자마저 가려버렸다. 도쿄의 긴자에 있는 ‘텐더 바’는 밝고 조용했다. 하얀 재킷을 입은 바텐더는 손님의 주문에 연신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감사하다고 말했고 손님은 바텐더가 만든 칵테일 한 잔을 마치 선물처럼 고개를 조아리며 받아 마셨다. 메뉴가 따로 있었지만 굳이 볼 필요는 없었다. 손님들이 시키는 것은 칵테일의 소년소녀 명작이 있다면 그 리스트의 10개 안에 들어갈 만한 것들뿐이었다. 바텐더는 마치 기하학적인 무늬를 지웠다 다시 그리듯 같은 칵테일을 만들고 따르기를 반복했다. 혀끝에서 작게 새어나오는 일본어의 간지러운 촉음이 공기 중에 나풀거렸다. 서양에서 시작한 칵테일은 일본에서 다른 종류의 음료가 되었다. 재즈처럼 서양은 칵테일을 즉흥적인 감상과 개성의 표출로 심화시킨 반면 일본은 특유의 집요함으로 칵테일에도 세밀함을 더했다. 그 지향점이 다른 만큼 바의 분위기도 극으로 달라졌다. 월드 베스트 바에 들어가는 서양의 바들은 어디에도 없는 시그너처 칵테일을 개발하는 반면 일본은 클래식 칵테일의 미묘한 지점을 파고 또 파고 들었다. 일본이 셰이킹의 방법에 따라 칵테일에 들어가는 공기의 양, 술의 질감 같은 것을 따지며 법과 도를 만들었다면 서양은 그런 알아차리기 힘든 작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더 크고 확연한 것들의 양상을 밝혀나가는 데 집중했다. 더불어 안주라는 개념이 희박한 서양과 달리 일본은 바에서 내놓는 음식의 종류와 질에도 초점을 맞췄다. 바의 개성보다는 손님 개개인의 취향과 기분을 알아맞히고 대접하는 서비스는 더욱 정교해졌다. 일종의 자리값 개념의 ‘커버 차지’가 생긴 곳도 일본이다. 이는 그만큼 바에 앉는 손님에게 최대한 집중할 것이라는 선언적 의미도 있는 것이다.

한국의 바 문화는 가까운 일본을 닮았다. 대부분의 바에서 커버 차지를 받고 내놓는 칵테일도 클래식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손님의 주문에 따라 변주를 하고 색다른 칵테일을 만들기도 하지만 손님들이 원하는 것은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와 같은 클래식이다. 청담동과 한남동 부근에서 시작한 칵테일 바는 근래의 스시야와 마찬가지로 그 수가 폭증했다. 바텐더의 몸값은 올라갔고 바에는 중년 남자들뿐만 아니라 젊은 여자들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커버 차지를 받는 만큼 제대로 된 음식과 하룻밤을 보상할 만큼 완벽한 칵테일을 내놓는 곳은 드물다. 커버 차지는 ‘관습’이란 명목으로 바의 수지를 맞추기 위함이고 바텐더의 진지한 얼굴과 잘 빗은 머리는 그가 만든 칵테일에 비하면 과하다는 뒷맛을 남길 뿐이다. 그러나 북극성이란 뜻을 가진 청담의 ‘폴스타’에 갔을 때 허례 의식이 아니라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한잔을 만났다. 청담 CGV 뒤편 건물의 반지하는 초록의 식물과 노란 조명으로 길을 밝혔다. 그 빛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니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바 좌석에 빼곡히 앉은 사람들이 보였다. 바 카운터는 넓어 팔을 올리고도 한참 자리가 남았고 미끄럽게 움직이는 가죽 소파의 질감은 새로 산 구두처럼 매끄러웠다. 그 위에 앉았을 때 나는 식민지 시대의 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느긋해졌다. 몸에 잘 맞는 슈트를 입은 바텐더가 앞에 와서 뜨거운 물수건을 건넸다. 그 물수건으로 손을 닦는 것은 일종의 정화 의식 같았다. 바 밖의 세상에서 바 안으로 들어왔음을 알리며 반기는 인사인 것이다. 고개를 들어 바를 바라보니 바텐더의 키보다도 높은 찬장에 가득 찬 술들이 보였다. 세계 각지에서 모은 위스키와 코냑, 그리고 각종 리큐어들은 묵은 세월의 때를 뚫고 형형한 빛을 발했다.

—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그 빛에 시선을 뺏겨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안경을 쓴 남자 바텐더가 인사를 하며 물었다.

— “우선 카츠샌드부터 주세요.”

나는 망설임 없이 주문을 넣었다. 일본의 돈가스와 한국의 것은 돼지고기로 만들었다 뿐이지 같은 종류의 음식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격차가 크다. 그 역사가 짧기도 하거니와 기름을 남기고 성형하는 일본에 비해 등심의 기름을 모두 제거하는 한국의 돈가스는 기름기에서 비롯된 고소한 맛이 적고 더불어 퍽퍽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돈가스가 외식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또 그만큼 하향평준화된 곳이 바로 한국이다. 돈가스와 빵, 그 두 가지의 맛을 조합해 만든 카츠샌드는 그 단순함이 스시를 닮았다. 그만큼 잘 만든 것과 아닌 것의 차이도 크다. 식빵이 얼마나 조밀한지, 돈가스의 두께가 적당하고 익힘이 지나치지는 않은지 등이 카츠샌드 맛의 핵심이다. 폴스타의 카츠샌드는 그 기본을 정확히 지켰고 손님은 늘 예상한 만족감을 얻어낸다. 카츠샌드를 입에 넣으면 조밀한 탄성을 가진 식빵이 먼저 혀에 부딪히고 신맛이 두드러지는 우스터소스와 겨자의 매운맛이 입 안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거친 튀김의 표면이 느껴지고 곧이어 기름지고 부드러운 돼지 등심이 이에 박힌다. 그다음 턱관절을 움직이면 지방의 단맛과 소스의 짠맛, 부드러움과 거칢이 하나가 되어 또 다른 종류의 큰 맛으로 변한다. 돈가스 대신 새우튀김을 넣은 에비카츠를 시키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에비카츠는 카츠샌드에 비해 부드럽고 단맛이 더해서 산뜻한 느낌이 난다. 감자와 고기를 섞어 튀긴 고로케는 부드러움과 바삭함의 극단적인 대비로 쾌감을 이끌어낸다. 식사를 하자면 일본에서 창조된 나폴리탄 파스타를 고르면 된다. 나폴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본식 파스타 나폴리탄은 케첩으로 소스를 만들어 새콤한 맛과 침을 고이게 하는 감칠맛이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베이컨과 양파가 섞인 진한 소스에 파스타를 버무려 달팽이처럼 똬리를 꼬아 올린 이 요리를 앞에 놓으면 익숙한 편안함에 몸은 자연스러운 자세를 찾아 움직인다. 그날 여지없이 정확한 모양과 맛으로 나온 카츠샌드 앞에 나는 항복한 포로처럼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입을 오물거렸다. 콘트라베이스를 닮은 묵직한 맛에 나는 소파 깊숙이 몸을 뉘었다. 그쯤 다시 바텐더가 찾아와 물었다.

— “칵테일은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나는 ‘김렛Gimlet’을 답으로 말했다. 그러자 저쪽에서 하얀 옷을 차려입은 상고머리에 키가 작은 바텐더가 셰이커에 라임즙과 시럽, 진, 얼음을 담았다. 일본에서 온 여자 바텐더였다. 이윽고 셰이킹이 시작됐다. 은빛 셰이커는 위로 찌르듯 한 번, 아래로 한 번 방향을 번갈아가며 수평 운동을 했다. 과하지 않은 동작, 차분함마저 느껴지는 진중한 셰이킹이 끝나고 김렛 한 잔이 완성됐다. 얼음 플레이크가 조금 뜬 그 김렛에 입술을 올렸다. 찌릿한 냉기와 산미가 기름기를 지우고 라임의 푸릇한 향기와 희미한 단맛이 맛에 양감을 더했다. 조금씩 그 칵테일을 흘려보냈다. 별빛이 내 몸속으로 한 방울씩 떨어져내렸다. 차갑게 빛나는 북극성처럼 맑은 힘이 방울방울에 맺혀 있었다. 그 빛은 밤새 꺼지지 않았고 나는 취하지 않았다. 바는 높은 산처럼 크고 넓었으며 나는 그 바에 오래 기대어 있었다.

정동현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유통 회사를 다니다가 훌쩍 영국의 요리 학교 탕트 마리Tante Marie로 유학을 떠났다. 호주의 레스토랑에서 늦깎이 셰프로 요리 열정을 불사르며 일했다.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으며, 지금은 신세계그룹 F&B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 일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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