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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나의 치유의 스페인 요리

2018년 2월 6일 — 0

간판 아나운서 자리를 내려놓고 아무 예고도 없이 여행길에 올랐던 손미나. 그녀가 차린 스페인 밥상도 홀연히 위안을 주고 갔다.

손미나가 스페인의 냉수프 가스파초와 과일 타파스, 상그리아로 직접 차린 테이블에 앉았다.
미식의 나라 스페인 요리

인터뷰가 있는 날은 다른 때보다 몸은 기민하게, 무엇보다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세운다. 평소라면 무심히 넘겨버릴 법한 평범함에서도 인상적인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처음 인터뷰이를 마주한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 그의 표정과 기분, 말투, 몸짓은 어떠했는지를 두루 살핀다. 되도록이면 내색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면서. 한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힘들여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만의 기운이 전해지는 사람을 만났다. 이제는 아나운서보다 자유로운 여행가가 더 어울리는, 손미나앤컴퍼니의 대표이자 허핑턴포스트코리아의 편집인, 알랭 드 보통이 운영하는 인생학교의 교장, 그리고 글 쓰는 작가인 손미나가 주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방금 전에 막 성화 봉송을 마치고 왔어요.” 마침 그녀는 곧 개막을 앞둔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의 성화 봉송을 달리고 온 참이었다. 그런데 커다란 횃불을 들었던 손에는 어느새 칼이 쥐어져 있다. 손미나를 여행 작가로 단번에 각인시킨 각별한 나라, 스페인의 요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시에스타로 인해 하루에 다섯 번이나 식사를 하는 스페인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미식의 나라. 지중해 연안에서 나는 싱싱한 해산물이며 시장 한 바퀴만 돌아도 소, 돼지, 닭은 물론 메추리, 비둘기, 새끼 돼지 등 갖가지 고기와 햄 종류에 저렴하면서 풍성한 농산물로 넘쳐나는 진정한 식재료의 천국이다. 이로부터 벌어지는 현란한 맛의 향연을 그녀가 놓칠 리 없었다. 오징어나 양파와 피망을 튀긴 칼라마레스와 칼라마레스 델 캄포, 소금에 절인 대구 요리 바칼라 등 다양한 종류의 타파스는 늘 즐기던 것이다. 백미는 돼지고기다. “스페인 속담에 ‘돼지는 이빨과 발톱 빼고 다 먹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돼지고기 요리가 발달했어요.”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하몽의 명성이야 굳이 덧붙이지 않겠다. 그녀가 푹 빠졌던 것은 3개월이 채 안 된 새끼 돼지를 통째로 구운 ‘코치니요 아사도’라는 전통 음식이다. 속살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접시로 고기를 잘라 서빙하고, 사용한 접시를 바닥에 던져 깨뜨리는 퍼포먼스를 한단다. 그렇다면 먹는 것 말고, 직접 해먹는 음식은 어떨까. 예상대로 수준 이상이었다. 납작한 원형의 파에야 전용 팬이 있을 정도로 스페인 요리를 즐기는 그녀는 오늘 감바스 알 아히요와 가스파초, 상그리아를 선보이기로 했다. 간편한 조리법 덕에 국내에서도 크게 인기몰이를 한 감바스엔 손미나만의 작은 팁이 있다. 달군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천천히 볶다가 향이 살아나면 새우와 버섯, 페페론치노를 넣고 함께 볶는다. 여기까지는 평범하다. 마지막으로 다진 파슬리를 듬뿍 얹기 직전에 바로 레몬 반 개를 짜 넣는 것이 포인트. 레몬즙을 넣으면 상큼한 향과 감칠맛이 훨씬 살아난다. 혹시 또 다른 요리 팁이 없는지 물었다. “맛이 조금 밋밋하다 싶을 때 캐슈너트를 갈아 넣으면 맛있어져요. 의외로 찌개 끓일 때나 파스타 마지막 단계에 넣으면 고소한 단맛이 강해지죠.” 외국인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을 때는 색다른 김치를 내놓는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그들을 배려해 김치에 고춧가루 대신 비트 물을 넣어 붉은색을 낸 김치다. 한동안 이야기하더니 결국 큰 비결이랄 게 없다며 멋쩍게 웃었다. “요리의 즐거움은 단지 좋은 재료에서 비롯될 뿐이에요.” 약 10년 전 맛 좋은 소고기로 정평이 난 아르헨티나를 여행할 때였다. 고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맛있어서 주방장에게 대체 어떤 비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소금만 쳤는걸요?” 돌아온 답은 허무하지만 명료했다. 별다른 조리와 테크닉이 들어가지 않아도 좋은 재료만이 발휘할 수 있는 본연의 힘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녀 역시 가능한 한 가공되지 않은 그대로의 상태를 선호한다. 보기 좋게 손질된 깐 마늘 대신 조금 번거롭더라도 통마늘 껍질을 하나씩 벗긴다. ‘음식은 모름지기 정성’이란 모토를 지닌 고전파에 가까운 셈이다.

감바스 알 아히요를 만들기 위해 팬에 마늘과 새송이버섯, 페페론치노를 넣고 올리브유를 둘러 볶고 있다.
감바스 알 아히요를 만들기 위해 팬에 마늘과 새송이버섯, 페페론치노를 넣고 올리브유를 둘러 볶고 있다.
토마토와 셀러리, 파프리카, 오이, 올리브유를 함께 갈아 만든 가스파초 위에 바질과 깍둑썰기한 채소로 토핑하는 모습
토마토와 셀러리, 파프리카, 오이, 올리브유를 함께 갈아 만든 가스파초 위에 바질과 깍둑썰기한 채소로 토핑하는 모습
음식 너머의 이야기

“오늘 요리하신 소감이 어떠셨나요?” 매번 인터뷰 때마다 묻는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대답은 물음이 민망해질 만큼 아름다웠다. 소설가이기도 한 손미나는 소설로 답했다. 멕시코의 여성 작가가 쓴 라우라 에스키벨Raura Esquivel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줄거리를 짧게 들려주었다. 이야기는 여주인공 티타의 어머니가 주방을 가득 메울 정도로 엄청난 양의 양파를 썰다 티타를 낳으면서 시작된다. 사회의 관습 에 의해 사랑이 좌절된 그녀는 오직 요리할 때만 자유로울 수 있었는데 한가지 아무도 모르는 비범한 능력을 지녔다. 그녀가 음식을 만드는 순간의 감정이 먹는 사람에게도 그대로 전이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진 티타가 만든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오르가슴을, 반대로 슬플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애통함을 느꼈다. “주방에 들어서면 이 소설의 묘사들이 떠올라요. 주방에는 불과 물이 있고, 칼과 각종 도구와 양념이 있으니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잖아요. 마법사가 된 기분이죠.” 같은 재료와 레시피로 요리를 해도 매번 똑같은 맛이 날 수는 없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처럼 주방 역시 일시적이고 창의적인 행위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이토록 재미난 현장이니 그녀가 다른 나라에서도 식문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술만 해도 나라마다 빚는 방식과 재료가 모두 달라요. 술을 보면 역으로 그 나라의 기후와 환경을 알고, 어떤 역사와 정서가 담겨 있는지를 배울 수 있는 거죠.” 페루에서는 신에 대한 경외감을 목격했다. 잉카인은 고산지대라는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파른 산에 벼랑처럼 아슬아슬한 계단식 논을 만들어 경작했다. 잉카 시대에는 아무도 굶지 않고 태평천하를 이뤘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에 경외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먼저 대지의 신인 파차마마Pachamama에게 바친 뒤 음식을 먹는 관습이 뿌리내렸고, 그 전통이 이어져 현재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항상 식사 전에 물 한 방울을 땅에 뿌린다. 모든 음식은 땅에서 난다는 믿음으로 어머니 대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한편 술을 마실 때 외치는 건배사만 살펴보아도 대략의 음주 문화를 가늠해볼 수 있다. “스페인에서는 건배할 때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A su salud!)’라고 외쳐요. 꽤나 다정스럽죠. 우리나라의 건배乾杯는 ‘잔을 말려라’는 뜻이니 그에 비해 너무 전투적이지 않나요.” 음식 너머의 문화를 바라볼 줄 아는 통찰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낯선 세상과 사람을 관찰하는 눈을 갈고닦아온 자만의 특권일 테다.

라임, 레몬, 사과 등 과일을 얇게 잘라 넣은 레드 와인에 탄산수를 붓는 모습.
라임, 레몬, 사과 등 과일을 얇게 잘라 넣은 레드 와인에 탄산수를 붓는 모습.
자유로운 여행가

KBS <9시 뉴스>의 앵커라는 선망의 자리를 떠나 훌쩍 스페인행 비행기에 올랐던 손미나. 이제 그녀의 여행 에세이를 기다리는 독자가 한둘이 아닐 만큼 어느새 ‘여행의 아이콘’이 되었다. 한동안 새로운 사업과 일들로 여행 다니는 것이 뜸했지만 올해는 이미 정해진 일정만 해도 4개나 된다. 3월 말 스페인부터 네팔, 하와이, 호주까지 연이어 잡혀 있다. “네팔에서는 엄홍길 대장님과 트레킹하면서 봉사 활동을 할 계획이고요, 7월에는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걸을 거예요. 아무래도 많이 걷는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그녀의 외연은 크게 확장되었지만 무엇보다 글 쓰는 일을 오래 하고 싶어 한다. 방송처럼 순간의 짜릿한 맛은 없지만 글쓰기는 그녀에게 일종의 정신 수양과도 같다.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틈을 내서 글을 쓰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저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도구와도 같죠.” 그녀는 자기 내면으로 아득히 걸어 들어가 안에 있는 깊숙한 것을 조금씩 꺼내 글로 옮겨 적는다. “‘30을 100으로 말하는 건 쉽지만, 글로는 100을 가져야 고작 30 정도를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그녀는 지금도 책을 쓰고 있다. 마음속에 굽이치는 감정과 생각이 단어와 문장으로 솎아지고 하나의 결을 가진 글로 승화된다. “왠지 모르게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을까 싶어 망설였지만 평생에 한 번쯤은 자기계발서를 쓰고 싶었어요.” 거기에는 인생의 여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말보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 다독이고 싶단다. “조급할수록 놓치는 것이 생기니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좋겠어요. 뒤로 일을 미루라는 뜻이 아니라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하나씩 챙기면서 나아가자는 것이죠.” 그녀와의 대화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음미했다. 아마도 ‘손미나’라는 소설의 첫 장을 열었던 것 같다.

감바스 알 아히요와 차가운 수프 가스파초, 과일을 올린 미니 타파스, 상그리아로 차린 스패니시 테이블.

edit 이승민 — photograph 김잔듸 — place 에너지키친 쿠킹스튜디오(070-8838-8879)
item 르크루제(070-4432-4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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