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main

Special

Taste Sweet solitude

2018년 1월 26일 — 0

타성에 젖는 편이 수월한 세상에서 저 혼자 고립되어 취하는 일은 그 얼마나 고결한 취미인가. 애주가들에게 혼술에 마시는 술과 각자 어떤 방법으로 혼술을 충만하게 즐기는지 물었다.

왼쪽부터 1-7

1. 정동현 작가 – 발렌타인 12년
아버지에게 처음 받은 술이 ‘발렌타인 12년’이었다. 나는 나이 들어 유명 바를 다녔고 화려한 위스키들을 접했다. 바다 향이 감도는 아일레이 위스키, 스코틀랜드의 몰트위스키, 미국 남부의 달면서도 거친 버번의 맛을 논하며 밤을 보냈다. 무정한 시간은 가고 아버지는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게 됐다. 나는 집에 덩그러니 남겨진 발렌타인 12년을 아주 오랜만에 한 모금 들이켰다. 강건한 피트 향이 중심을 잡고 그 주위로 화사한 꽃과 과일 향이 만개했다. 제 주장이 강한 몇몇의 몰트위스키와 달리 맛은 오와 열을 맞춰 가지런히 균형을 맞췄고 그 속에 엄정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바람 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칼라 블레이의 ‘론즈Lawns’를 틀고 발렌타인 12년을 꺼낸다.

2. 탁재형 PD – 노니노 우에 우바비안카
혼술은 과거를 탐미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에는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와 에스프레소 이후 ‘암마차카페Ammazzacaffe’를 즐기는 로컬 문화가 있다. 암마차카페는 ‘마신 커피를 죽인다’란 의미로 독한 술 한 잔으로 입 안을 개운하게 정리하는 시간이다. 나는 식사가 끝난 뒤나 글을 쓸 때 가끔 그때 마신 그라파 한 잔을 꺼내 마신다. 이탈리아의 강렬한 정취가 녹아난 그라파는 와인을 만들고 난 포도 찌꺼기들을 증류해 만든 술이다. 지역 술엔 그 지역인들만의 정신이 희석된다는 깨달음을 준 술이라 나에겐 더욱 각별하다. 내 경우 여행지에서 사오거나 지인을 통해 공수하는데, 그라파에 입문하고 싶다면 국내에 시판되는 것 중 포도 알맹이를 함께 증류해 맛을 끌어올린 ‘우에 우바비안카’를 마셔보는 것도 좋겠다.

3. 헬카페 스피리터스 서용원 대표 – 불라 칼바도스 그랑 솔라지
혼술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적당히 즐기는 것’이다. 혼자 마실 때 지나치게 센 도수의 술은 쓰게 느껴질 수 있고 낮은 도수의 술은 과하게 마시면 자칫 더부룩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혼술하기엔 사과 브랜디가 적당하다. 발효주를 끓여 증류한 브랜디 특성상 도수는 높고 향은 응축되어 있지만 달콤한 과실의 향이 있어 맛을 음미할 때 부담스럽지 않다. 특히 사과 브랜디는 신맛과 단맛, 쓴맛의 균형이 좋고 모든 맛이 뾰족하기보다 둥그렇게 입 안에 감돈다. 지금같이 추운 날이면 모과나 감귤 같은 시트러스 계열의 따뜻한 차에 약간씩 타 마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 말린 과일 칩이나 튀각과 함께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4. 이숙명 작가 – 조니워커 블랙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을 보면 주인공이 가정사로 충격에 빠졌을 때 장인이 조니워커를 한 병 들려준다. 어릴 때 그 책을 읽고 궁금했던 터라 처음 접한 위스키가 조니워커였고, 그 후 별다른 선택지가 없을 때마다 마셨다. 맛, 가격, 접근성 모두 무난해서 집에 구비해두기도 좋다. 요즘 인도네시아의 누사페니다라는 섬에 사는데, 심지어 이 시골에서도 구할 수 있는 위스키가 ‘조니워커 블랙’이다. 혼술을 즐기게 된 데는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의 고상한 체하는 ‘스노비즘’도 한몫한다. 나에게 혼술이란 여러 가지를 따져 마시기보다 일할 때, 갈증 날 때, 식사할 때 편하게 곁들이는 용도다. 냉장고에 항상 얼음이 떨어지지 않게 준비하는 것 말고 특별한 룰 같은 건 없다.

5. 책바 정인성 대표 – 시바스 리갈 12년으로 만든 진저 하이볼
혼술할 때 가장 많이 즐기는 술은 진저 하이볼이다. 진저 하이볼은 위스키와 진저에일, 가능하다면 라임 한 조각까지를 섞은 칵테일이다. 저가 위스키를 사용해도 근사하게 즐길 수 있으며 어디서든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다. 개인적으로 꼽는 혼술에 가장 최적화된 장소는 장거리 비행기 안이다. 어둑하니 알맞은 조도와 포근한 온도, 거기다 적당히 누적된 피로까지. 승무원에게 위스키와 진저에일을 부탁한 뒤 1:3의 비율로 타서 마시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위스키의 묵직한 맛과 진저에일의 스파이시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최근에 이용한 D항공사 비행기 안에서 마셨던 진저 하이볼은 ‘시바스 리갈 12년’과 캐나다 드라이사 진저에일의 조합이었다.

6. 안씨막걸리 안상현 대표 – 문배술
직업 특성상 다른 술도 알아야겠기에 수입 수제 맥주나 내추럴 와인 등 다양한 주종을 시음해보는 편이다. 그러나 유행처럼 뜨는 제품들이 만족스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 정도의 술을 사먹으려고 내가 몇 병의 막걸리를 팔았던가’ 하는 억울함이 드는 때도 있다. 바로 그때 당장 꺼내 마실 수 있도록 구비해놓는 술이 ‘문배술’이다. 흡사 배 향이 나는 증류 소주 문배술은 냉동실에 보관해두면 얼지 않고 마치 겔처럼 질감이 독특해진다. 혼술이야말로 술의 관능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문배술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온전히 술에만 집중하기 위해 혼술 전 배는 충분히 채우고 샤워를 한다. 그런 다음, 잔뜩 이완된 몸으로 스르르 퍼지는 알코올의 기운을 만끽한다.

7. 도마 김봉수 셰프 – 노아스밀 프리미엄 버번
일을 끝내고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간 바에서 마신 ‘노아스밀’은 정말이지 황홀했다. 첫입에 강렬한 단맛이 돌았고 도수가 높은 술이라 입 안에 오래 남는 묵직한 향과 따뜻한 느낌이 추운 겨울 언 몸을 녹여주기에 충분했다. 입구가 좁은 튤립 모양의 잔에 담겨 나왔는데 잔이 풍부한 향을 머금고 있다 마시는 순간 쏟아내주는 느낌이 들었다. 버번은 도수가 높고 바디감이 강해 화려한 안주를 곁들이기보다 캐러멜라이징한 견과류나 초콜릿이 잘 어울린다. 가끔은 취기를 높여주는 시가도 좋다. 버번 제품의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집에서 먹을 땐 목욕재계한 다음 경건한 마음으로 술을 마신다.

edit 장은지 — photograph 차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