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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선물세트와 건강 @정재훈

2018년 1월 17일 — 0

우리는 건강한 식생활이 늘 화두에 오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명절에 주고받는 선물은 건강과 거리가 먼 통조림 식품들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감춰진 명절 선물세트와 건강의 상관관계를 들춰보았다.

text 정재훈 — edit 양혜연 — photograph 이향아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2015년 10월 국제암연구소는 가공육을 1군 발암 물질, 적색육을 2군 발암 물질에 포함시켰다고 발표했다. 대형 마트에서 햄, 소시지, 베이컨의 매출이 일제히 10% 이상 감소했다. 나는 걱정에 빠졌다. 더 이상 햄을 먹기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기우였다. 2년 뒤인 지금, 명절 선물의 베스트셀러는 스팸이다. 지난 추석 스팸 선물세트 매출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기거하는 집 찬장에서도 크고 작은 스팸과 런천미트 캔이 23개나 발견됐다. 적색육과 가공육을 지나치게 많이 먹는 건 환경에도 건강에도 좋지 않겠지만, 조금씩 적당량을 섭취하면서 걱정할 이유는 없다. 다행히도 그런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 같다. 뉴스에 화들짝 놀랐다가도 다시 생각의 균형을 잡으며 살아간다. 명절 선물세트로 스팸을 주고받는 걸 보면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세상은 더 나아지고 있기도 하다. 집에 캔 햄을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겉면에 영양 정보가 적혀 있는지 확인해보라. 영양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는 건,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제품이란 뜻이다. 이전에는 캔 햄과 같은 식육통조림에 영양 성분 표시가 의무 사항이 아니어서 캔 햄 100g에 밥 한 공기만큼의 열량이 들어 있다는 걸 알 길이 없었다. 2017년부터 법이 바뀌었다. 이제는 열량, 탄수화물(당류), 단백질, 지방(포화지방, 트랜스 지방), 콜레스테롤, 나트륨이 1일 영양 성분 기준치와 함께 반드시 표기되어야 한다. 영양 정보는 소비자의 알 권리이기도 하지만, 먹을 때 반드시 필요한 정보이기도 하다. 캔 햄 100g의 열량이 305kcal이며, 지방 27g이 들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찌개에 넣어 그 기름을 다 먹으려던 생각을 바꿔, 물에 데치거나 팬에 굽는 방식으로 조금이라도 지방 섭취량을 줄여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다.

명절 선물세트의 아이러니
시대에 따라 선물세트도 변한다. 60년대에는 설탕과 조미료, 맥주 선물세트가 인기를 끌었다. 70년대에는 라면과 칼국수가 들어간 선물세트도 있었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심지어 콜라도 선물세트에 들어갔다고 한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어린이를 위한 종합과자 선물세트가 인기를 끌었다. 이후 정육, 과일, 고가의 주류 선물세트가 인기를 끌면서 선물세트에도 양극화 논쟁이 일어났다. 2000년대 이후, 건강과 체중 문제에 민감한 트렌드에 맞춰 통곡물, 견과류, 올리브유를 선물하는 일도 늘어났지만, 채소가 주류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세 유럽 귀족들만 과일은 먹고 채소는 천시한 게 아니다. 선물세트를 놓고 보면, 우리도 채소를 뒷자리에 둔다. 과거 오랫동안 인류가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고열량 식품을 갈망했다는 사실이 우리가 주고받는 명절 선물세트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실은 명절 자체가 살을 찌우기 위한 장치다. 미국 터프츠 대학교 연구팀의 조사에 따르면 연말연시 휴일 시즌에 사람들의 체중은 평균 0.4kg이 증가하며, 이미 과체중인 사람들의 체중은 2.3kg이 증가한다. 불행히도, 이렇게 연말 휴일 기간 동안 증가하는 체중은 1년 체중 증가분의 절반을 차지하며, 매년 축적되어 중년 이후 과체중과 비만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춘궁기를 걱정해야 하던 시절에야 연말 살을 최대한 찌우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되었으련만 2018년을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는 한숨거리만 더해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시대를 동시에 살아간다. 고지방 저탄수화물 다이어트와 저지방 고탄수화물 다이어트가 공존하듯, 한편에서는 불어나는 뱃살을 걱정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체중 감량보다는 증량에 도움이 되는 선물을 주고받는다. 라면부터 채소까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음식이 선물세트로 존재하지만 선물세트의 선두를 이끄는 건 스팸이다. 우리는 어제까지는 더 많이 먹을까 고민했던 사람에게 오늘부터는 더 적게 먹을 방법을 고민하라고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고칼로리 음식을 먹되 체중은 날씬하게 유지하라는 모순적 메시지 속에서 자신만의 균형을 잡는 일은 쉽지 않으며 자기억제력을 필요로 한다(나라고 특별한 해결책은 없다. 선물로 받은 각종 통조림을 찬장 깊숙이 넣어두고 잠시 잊어버렸다가 조금씩 꺼내 먹을 뿐이다).

선물세트에 비친 식탁
취향을 생각하면, 스팸이 명절 선물세트의 주류라는 사실이 기분 좋지만은 않다. 영국의 전설적 코미디 그룹 몬티 파이튼Monty Python의 스팸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달걀과 스팸, 달걀과 베이컨과 스팸, 달걀과 베이컨과 소시지와 스팸… 거의 모든 메뉴에 스팸이 들어 있는 카페에서 스팸을 싫어하는 여자 주인공은 시킬 게 하나도 없다. 스팸을 뺀 메뉴를 주문하자 웨이트리스는 혐오스럽다는 듯 반응한다(유튜브에 한글자막본이 있으니 한 번 시청을 권한다. https://youtu.be/z9Pbu4Sfa74). 지난번 스팸이 아직 남아 있는데 또 스팸 선물세트를 받으면, 정말 모든 메뉴에 스팸을 넣은 레스토랑이라도 하나 차려야 될 거 같다. 불행히도 나는 몬티 파이튼의 여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스팸이 싫다. 지난봄,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화제가 되었다. 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보면, 이들 중 상당수는 유전적으로 오이 특유의 향이나 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오이 선물세트가 없는 이유다). 나는 오이는 그럭저럭 먹는 편이지만, 스팸을 구울 때 올라오는 돼지 냄새가 거북스럽다. 미국 듀크 대학교의 연구들에 의하면 돼지 냄새에 대한 선호도 차이는 우리의 유전자와 관련된다. 수퇘지의 냄새 성분인 안드로스테논에 민감한 유전자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돼지 냄새를 역겹게 느낄 가능성이 높고, 다른 유전자형을 지닌 사람들은 돼지 냄새를 괘념치 않거나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직 냄새, 맛과 유전자에 대한 연구는 초기 단계이며, 내가 돼지 냄새에 민감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스팸을 싫어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스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내 입맛을 쉽게 바꾸기 어려울 거라는 사실이다. 이 글을 쓰기 직전에도 스팸을 구워서 먹긴 했지만, 아직도 머리에 밴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선물세트에는 유난히 식품, 그중에서도 통조림이 많다. 각종 선물세트에서 통조림을 꺼내어 정리하다 보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든 선물인데, 마치 전쟁이라도 대비해야 할 듯하여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국가별 스팸 소비량에서 한국은 미국에 뒤이어 세계 2위다. 그리고 그중 ⅔는 명절에 팔린다. 한국에서 스팸 선물세트가 인기를 끄는 신기한 현상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 영국 BBC, 미국 <뉴욕 타임스> 같은 외국 매체에서 이를 뉴스로 다루기도 했다. 선물세트는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기록이다. 선물로 통조림을 주고받는 일에 대부분의 사람이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 한국인의 역사에서 커다란 상처를 남긴 전쟁을 논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취향을 논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왜 아직도 서로 다른 취향을 인정하지 못할까, 우리는 왜 음식을 맛으로 즐기지 못할까 한탄하지 말자. 먹고사는 게 우선인 사회에서 맛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게 맞다. 맛을 즐기고,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려면 먼저 각 개인들이 자신의 생존을 고민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살 만한 여건이 마련되어야 마땅하다.
아직 우리의 미식 문화가 덜 성숙했다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접대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된다. 업무상 접대가 아니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할 일이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개인의 취향에 따른 선택이 가능하겠냐는 논리다. 선물세트로 바라본 음식 문화도 다르지 않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선물하는 사람이 만족감을 느낄 때는 받는 사람의 선호만 고려했을 때가 아니라 자신의 성향을 부분적으로 드러내주는 선물을 전달할 때라고 한다. 윗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을 하고, 부정 청탁을 금지하는 법률만으로 선물세트 매출이 영향을 받는 사회에서 개인의 취향을 논하기란 어렵다. 미식의 즐거움은 선물세트의 진정한 갑이 청탁용 선물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꽃필 가능성이 더 높다.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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