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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장준우

2017년 12월 17일 — 0

미식이란 인간이 음식을 통해 보다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노력이다.

text 장준우

비앤비 와눌라 (B&B Wanulla)

한 단어의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지만 ‘미식美食’처럼 그 뜻이 복합적인 것이 또 있을까. 오늘날 미식이란 맛있고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여유 있는 취향 내지 라이프스타일쯤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사실 본래는 훨씬 복잡하고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다. 미식이라는 개념이 태동한 19세기 초 프랑스만 하더라도 부유한 계층의 자택에서 전용 요리사가 만드는 음식을 대접받고 그에 상응하는 교양을 보이는 것이 식도락이요 미식의 의미였다. 미식가라고 하면 음식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자신만의 관점을 뽐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식사 자리의 분위기에 맞춰 사적이거나 공적인 대화를 능숙하게 끌고 나가는 사람을 의미했다. 잘 정리한 책 한 권 덕분에 전 세계를 통틀어 미식과 관련해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인 브리야사바랭의 저작물에서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미식이란 사교의 주요한 수단이며 동시에 한 나라의 경제적 힘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 자신과 같은 미식가들이 있음으로 해서 여기에서 파생되는 미식 산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게 됐다며 그들의 미식 행위는 사회적인 의무인 것처럼 묘사한다. 브리야사바랭의 미식 성찰의 배경에는 귀족 내지는 상당한 수준의 재력을 갖춘 부르주아 계층의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는 것이다. 현대에 들어 미식은 경제 성장을 통해 향유 계층이 두터워짐에 따라 그 의미도 확장됐다. 먼저 과거에 비해 고민해야 할 거리들이 늘었다. 극소수의 미식가들이 즐기던 희귀한 음식을 이제는 다수가 원하게 되면서 각종 문제가 생겨났다. 샥스핀이며 푸아그라며 트러플이며 하는 것들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환경은 재앙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음식과 관련된 문제가 대두되자 미식이란 단지 값지고 좋은 음식, 뛰어난 맛만을 추구하는 속물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 문화, 경제 등 먹는 것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지속 가능성을 고민해보자는 하나의 사상운동으로 재정의됐다. 동시에 미식가의 의미도 먹거리를 둘러싼 환경과 정치 등을 아우르는 식견을 가진 ‘깨어 있는 음식 애호가’를 뜻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식계의 트렌드에 맞춰 새롭게 정의되는 오늘날의 미식가란 마트에서 친환경 유기농 제품을 선택하고 공정무역 커피로 하루를 시작한 후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을 내세운 식당에서 내추럴 와인과 함께 정찬을 즐기고 음식과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담화를 나누는 전문직 종사자로 묘사된다. 음식을 사랑하고 즐기지만 정치적 고민 없이 단지 즐거움, 궁극의 맛을 찾는 식도락가는 미식이 아닌 탐식을 하는 것으로 격하됐다. 미식 안에서도 정치적 분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실 미식계의 화두인 지속 가능성, 다양성, 로컬 푸드니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단어일 뿐이다. 진학과 취업을 고민하고, 새벽부터 일어나 날짜가 바뀌는 시간까지 야근하고, 하루 종일 육아와 가사에 매몰돼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미식이란 현재 누리지 못하는 무엇, 미디어가 만들어낸 일종의 판타지에 가까운 의미다. 그들은 미식에 관한 콘텐츠를 소비하거나 유명 인사들이 추천하는 소위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고단한 일상에 대한 위안을 잠시나마 받을 뿐이다. 미식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로운 사람들의 선택지라는 점에서 보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지위를 내포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건 큰 변함이 없는 셈이다. 미식이 이 땅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겐 주된 관심사이면서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는 데 있어 나름의 역할은 하고 있다. 미식에 대한 관심이 늘어남으로 인해 우리는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점차 늘어가고 담론이 활성화됨에 따라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음식이 무엇인지를 점차 깨닫고 있다. 속도는 느리지만 확실히 진일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미식이 전제하고 있는 특성,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즐거움과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인용되는 브리야사바랭의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누군지 알려주겠다”라는 정치적인 명제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에 그랬듯 지금도 어디선가는 특별한 부류가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한 음식을 먹으며 특별한 이야기를 즐기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만이 미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특권을 의미하던 미식은 이제 개개인의 생활 영역으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 얼마나 비싸고 값진 음식을 먹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든 충만한 행복감을 얼마나 느끼느냐가 새롭게 미식의 척도가 된 시대다. 미식의 한자말을 살펴보면 맛(味)에 대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美)에 관한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아름다움은 곧 좋음과 즐거움, 쾌락과도 상통한다. 시대에 따라 환경에 따라 미식의 의미는 계속 변하겠지만 인간이 음식을 통해 보다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아름다운 본질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장준우는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 홀연히 이탈리아로 요리 유학을 떠났다. ICIF를 졸업한 후 시칠리아로 날아가 펜 대신 팬을 잡고 주방에서 분투했다. 유럽 10개국 60여 개 도시를 발로 뛰고 혀로 취재한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기>를 펴냈다. 요리와 사진, 그리고 글을 삼위일체로 삼아 남은 생을 지루하지 않게 살고 싶다는 소박하고도 큰 꿈을 갖고 있다. 현재 서울신문에 <장준우의 푸드 오디세이>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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