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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패러독스의 역설 @정재훈

2017년 12월 12일 — 0

ㅣ‘프랑스인들은 레드 와인을 즐겨 마셔 심장병 발생률이 낮다’ 혹은 ‘프랑스 여자는 살찌지 않는다’ 등 프랑스인의 식습관과 건강에 얽힌 속설들은 과연 진실일까.

text 정재훈 — edit 양혜연 — photograph 이향아

정재훈

지난 10월 파리에 다녀왔다. 열흘의 여행 기간 동안 햄버거 한 번, 일본 라멘 두 번, 베트남식 소고기 요리 한 번(Bœuf lôc lac), 터키 사람이 만든 케밥을 한 번 먹었다. 나머지 스물네 끼는 모두 프랑스식으로 먹었다. 그중에서도 프렌치 패러독스에 가장 가까운 식사는 파리 14구의 한 비스트로에서 맛본 저녁이었다. 돼지고기와 간을 갈아 만든 지방 송송한 테린으로 시작해서 소시지와 돼지 뱃살 요리를 거쳐 라이스 푸딩과 수플레로 식사를 마치는 사이 레드 와인 반 병을 비웠다. <60 minutes>의 진행자 몰리 세이퍼의 말에 딱 들어맞는 완벽한 프랑스식이었다. 돼지머리 파테, 블랙푸딩(선지 소시지), 감자튀김과 같은 고지방식을 즐겨 하면서도 미국인에 비해 프랑스인들의 심장병 발생률이 낮은 이유는 뭘까? 세이퍼가 내놓은 답은 레드 와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렌치 패러독스를 전 세계에 알린 1991년 <60 minutes>의 진행자 몰리 세이퍼의 짧은 꼭지를 다시 보고 있으면 뭔가 석연치 않다. 디테일부터 틀렸다. 방송에서 소개된 메뉴 중 하나인 더블-팻 양 요리는 고지방식처럼 들리지만, 더블-팻으로 번역된 프랑스 원어 표현(Gras-double)은 지방과는 관계없다. 소의 위에서 두꺼운 부위라는 의미다. 서두에 잘못된 이야기가 나오면 이어지는 내용도 의심해보는 게 합리적이다. 레드 와인이 심장병 위험을 줄이는 비결이라는 세이퍼의 주장은 사실일까?

와인과 건강의 문제
이후20여 년 동안 과학자들의 연구가 이어지며,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초기 연구에서 레드 와인의 비밀을 풀어줄 것으로 촉망받던 레스베라트롤이란 물질은 이후 와인 속 실제 함량이 너무 낮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루 500mg을 섭취하려면 와인 40L를 마셔야 하는 수준이니, 유럽인들이 1년에 마실 와인을 단 하루에 마셔야 하는 셈이다. 이 정도면 어떤 건강상의 유익을 얻기도 전에 와인으로 배가 터져 사망할 확률이 크다. 덴마크와 프랑스에서 진행된 대규모 연구에서는 와인을 조금씩 즐기는 사람들의 심장 질환 위험이 30% 정도 낮게 나타났지만, 다른 연구에서는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비슷한 위험 감소가 나타났다.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이 운동을 더 열심히 하고, 양질의 식사를 하며, 흡연을 덜하고, 고등 교육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 또한 연구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패턴도 그들의 심장 건강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술을 한번에 몰아 마시는 폭음 성향이 있는 나라에서는 심장병 발병률이 주말 직후에 증가한다. 매일 조금씩 술을 마시는 프랑스인들의 혈압은 주중 내내 일정한 편인 데 반해, 주말에 전체 음주량의 66%가 몰리는 북아일랜드 사람들의 혈압은 주말 직후인 월요일에 제일 높아졌다가 다시 주말이 가까워지면서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하루 1~3잔 정도의 와인이 심혈관계 건강에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여 마시면 마실수록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연구자들은 과거 프랑스 사람들의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을 때는 질병이 만연했으며, 알코올 소비가 줄어들면서 사망률도 감소했음을 지적한다. 술의 종류에 관계없이 과음은 건강에 해롭다. 하루 몇 잔까지가 적정한 수준인지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알코올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복합적이다. 적당한 음주는 심혈관계에 유익할 수 있으나 그 반대편에는 발암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 존재한다. 술을 마시면 얼굴이 빨개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다. 아세트알데히드가 제대로 분해되지 못하고 쌓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프렌치 패러독스를 믿고 연말 파티에서 레드 와인을 무한정 마실 수는 없는 일이다.

프랑스 여자는 정말 살찌지 않을까
여행 일주일째 되던 날에는 에피큐어Epicure에서 점심을 먹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과 그의 약혼녀가 묵었던 럭셔리 호텔 안에 위치한 레스토랑답게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하얀 접시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장미와 테이블 위 꽃병 속 붉은 생화, 유리창 너머 정원의 녹색 잔디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미적 감각을 자극했다. 음식들도 예뻤다. 하지만 양은 정말 적었다. 프랑스 여자는 살찌지 않는다더니, 괜히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적게 먹으니 살이 찔래야 찔 수가 없겠지. 카톡으로 음식 사진을 본 고국의 친구들이 한탄했다. 90년대 미국을 뒤흔든 프렌치 패러독스가 와인과 심장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2000년대 그 초점은 프랑스 식문화와 체중 쪽으로 옮겨졌다. 200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제공되는 음식 양은 미국에 비해 평균적으로 25% 정도가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는 대로 먹어도 미국인보다 ¼을 적게 먹는 셈이다. 게다가 프랑스인들은 대체로 더 천천히 오랫동안 식사한다. 연구를 주도한 폴 로진 교수는 음식 제공량의 차이가 프렌치 패러독스를 설명하는 답이 될 수는 없겠지만, 프랑스인이 더 날씬하고, 그로 인해 건강한 이유 중 하나는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막상 파리를 가보니 로진의 연구가 프랑스 식문화의 한 단면만을 비췄던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프랑스식으로 먹은 스물네 끼 중 여덟 번을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맛봤다. 식기는 커다랗고 플레이팅된 음식 양은 일관성 있게 작았다. 하지만 코스 메뉴를 전부 합친 양은 만만치 않았다. 여행 말미에 이르러 체중이 무려 2kg 늘고, 얼굴은 동그래졌다. 우리는 패스트푸드 음식의 양이 얼마나 과도한가에 관심을 기울이곤 하지만,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제공하는 음식도 매일 먹기에 적당한 양은 아니다. 연구 결과를 다시 찾아보면 프랑스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건강한 것은 사실이다. 남성의 경우 비교적 낮은 심장병 사망률을 다른 사망 요인들이 상쇄하여, 결과적으로 다른 유럽 남성 사망률과 비슷하다. 반면, 여성의 경우는 심장병 사망률이 낮을 뿐만 아니라 전체 사망률에 있어서도 낮은 수준을 유지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프랑스 여성이 남성보다 과체중 비율이 낮긴 하지만, 비만이 될 가능성은 비슷하다. 과체중으로 인한 건강상의 위협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여자는 살찌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프랑스 음식을 많이 먹으면 프랑스 여자라도 살찐다. 날씬한 프랑스 여자가 살이 찌지 않는 이유는 프랑스 음식을 적게 먹기 때문이다.

프렌치 패러독스 – 진실 or 거짓?
일부 전문가들은 애초에 프랑스인들의 심장병 사망률이 낮다는 보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국가 통계상 심장병 사망 보고가 실제 수치보다 낮아서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실제로 더 엄격하게 진행된 최근의 연구 결과를 통해 보면 프랑스인들의 심장병 사망률은 다른 나라들보다 낮긴 낮지만 두드러지게 낮지 않고, 동물성 지방의 섭취 역시 높긴 높지만 엄청난 수준으로 높지는 않다. 일각에서는 프랑스의 낮은 심장병 사망률은 식단 변화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라는 시간 지연 이론을 펼치기도 한다. 프랑스인들의 식단이 다른 서구 국가처럼 변화하면 심혈관계 사망률 역시 비슷하게 증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거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프랑스의 심장병 사망률은 도리어 감소했다. 프렌치 패러독스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은 프랑스 내에서도 지역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부에 사는 사람들이 북부에 사는 사람들보다 심혈관계 사망률이 낮다는 이론이다. 프렌치 패러독스는 남프랑스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실제로, 위도상 유럽 남부에 위치한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프랑스 툴루즈의 사망률이 비슷하다. 같은 연구자들에 의하면 이들의 사망률을 비슷하게 만드는 것은 물리적 위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전체 식생활 패턴이다. 소박한 지중해식에 가까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일수록 심혈관계가 더 튼튼하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놀라워 보였던 프렌치 패러독스는 역설적으로 평범한 진실을 다시 우리 앞에 드러낸다. 채소와 과일이 풍부한 식단으로 식사를 즐기라. 어떻게 하면 와인을 더 많이 마실지 고민하지 말고, 적당량의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따라 운동하고 금연하라. 진실은 늘 가까운 데 있는 법이다.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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