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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바로보기 @정재훈

2017년 10월 31일 — 0

바야흐로 김장철이다. 아낙들이 삼삼오오 모여 김장을 담그던 풍경은 드라마나 문학 작품 속에 갇힌 지 오래다. 한식이 세계 시장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요즘 우리 스스로 우리나라 음식을 바로 보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그 시작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김치다.

text 정재훈 — edit 이미주 — photograph 박상국 — tile 윤현상재(02-540-0145)


김치에 대한 환상
캐나다 이민 생활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 듣고 믿었던 우리 음식에 대한 환상이 연이어 부서졌다.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수업 진도보다는 딴 얘기에 종종 열을 올리던 국어 선생님은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셨다. 한국 사람이라면 외국에 이민 가서도 김치를 먹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건만, 이 땅을 벗어난 배추가 어디 제대로 된 배추인가, 어렵사리 배추를 구하여 김치를 담가도 배추가 쉽게 물러져서 맛이 없다는 것이다. 막상 직접 외국에 나가 살아보니, 뻥도 그런 뻥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그렇듯 사먹는 김치 맛이야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었고, 실망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캐나다 온타리오의 고랭지 배추로 담근 김치의 질감이 단단하면 단단했지 흐물거리는 법은 없었다. 날배추를 그대로 맛봐도 한국에서 맛본 배추와 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매운맛 하면 한국인이라는 모종의 자부심도 무너져 내렸다. 한번은 스리랑카 이민자의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는데, 준비한 음식이 하나같이 강렬한 매운맛이라 먹는 시늉만 해야 할 정도였다. 인도, 태국, 멕시코, 남아공 이민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매운맛이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깨닫게 되자 나중에는 조금 창피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학교에서 뭘 배운 건가. 고추가 남아메리카로부터 다른 여러 나라를 거쳐 전해진 음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한국인만 고추의 매운맛을 제대로 즐긴다고 생각했던 걸까. 음식에 대해 전해 들은 이야기들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음식에 대한 대중의 믿음
의심의 싹이 더 커진 것은 2003년이었다. 그해 토론토는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환자 발생으로 인해 떠들썩했다. 하지만 중국 광둥성에서 처음 발생하여 홍콩, 대만, 캐나다까지 확산 일로에 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대한민국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한국인은 김치 덕분에 끄떡없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이민 사회에서도 자주 회자됐다. 서울에 살고 있었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를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나는 캐나다 토론토의 이탤리언 커뮤니티 약국에서 일하고 있었고, 약국 환자들 중에도 사스 감염으로 입원한 사람이 여럿이었으며, 그중 몇이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기까지 한 상태였다. 아픈 사람을 문병하고, 서로 악수와 포옹하는 데 익숙한 이탈리아 이민자 특유의 문화가 사스 확산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김치를 먹어서 사스를 피할 수 있었다니 이게 과연 맞는 말일까 싶었다. 김치 때문에 한국에는 사스 환자가 안 생긴다는 말에 아무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더 신뢰가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치의 효능에 대한 대중적 믿음은 더 공고해지는 듯했다. 언론도 여기에 힘을 실어줬다. 2003년 7월 <중앙일보>는 ‘김치 사스예방 효과 과학적으로 입증’이란 헤드라인의 기사를 내기도 했다. 기사 말미에는 “사스(SARS)균을 확보하기 어려워 김치 유산균의 항균 작용을 직접 실험하지 못했지만 다른 균을 죽이는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보아 사스균에도 살균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는 연구팀의 인터뷰가 소개되었다. 하지만 2015년 메르스 바이러스는 김치의 효능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무너뜨렸다. 사스 바이러스의 친척뻘인 메르스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강타하여 186명을 감염시키고, 그중 38명이 사망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서 음식으로 바이러스 감염을 피할 수 있다는 대중의 믿음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음식에 대한 글을 쓰다 보면 종종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과 싸우고 있는 듯한 상상에 빠진다. 잦은 외식과 수입 식품 섭취가 건강에 가장 해롭다, 밀가루가 건강에 좋지 않다, 한국 사람은 김치를 많이 먹어서 건강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따지고 보면 전부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들어온 것들이니 그런 느낌이 드는가 보다. 만약 지금의 내가 30여 년 전 초등학교 교실로 돌아간다면 선생님께 대든다고 매일 얻어맞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음식의 효능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믿음은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아무도 선생님의 말씀에 반박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냥 다 받아들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굳어진 음식에 대한 관념은 때로 해로운 결과를 초래한다. 겨울철 독감 예방에는 백신 접종과 손 씻기가 더 중요하지만, 포털 뉴스 상위는 ‘독감을 막아주는 음식 7가지’와 ‘독감 바이러스 음식으로 잡자’가 차지하는 식이다.

고정불변의 김치는 없다
김치 하면 배추김치다. 그중에서도 고춧가루와 액젓, 마늘, 생강 등을 넉넉히 넣어 담근 김장김치야말로 한국인의 맛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음식의 전통에 대한 대중적 관념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이야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고민해봐야 한다. 18세기에 기록된 이시필의 <소문사설>에는 오늘날의 깍두기(또는 섞박지)에 해당하는 김치 조리법을 소개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당시 고춧가루는 선택 사항이지 필수 조건은 아니었다. “고춧가루를 많이 섞어놓으면 오래되어도 맛이 있고 그다지 짜지도 않다”면서 장점을 기록하고는 있으나, 대부분의 가정에서 담근 깍두기는 맛이 짜고 색깔이 깨끗하지 않다고 되어 있는 걸 보면, 그때만 해도 고춧가루가 빠진 김치가 주류였고, 김치에 고춧가루를 조금씩 더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배추김치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초 <규합총서>에 이르러서인데, 이 당시 배추김치도 우리가 먹는 김치와는 차이가 크다. 일제강점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과 같은 조리서로 가면 김치의 조리법이 현대와 비슷해지지만, 닭고기, 꿩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등의 다양한 고기가 재료로 사용되고, 국물로 설렁탕까지 넣었다는 기록을 보고 있으면, 이게 대체 김치가 맞긴 한 건가 의아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전통 식품의 상징 김치가 지금의 형태로 자리를 잡은 게 고작 100년도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이야 토마토가 이탈리아 음식의 상징 같지만,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전까지 토마토는 이탈리아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식재료이고, 지금처럼 토마토소스를 얹은 피자와 파스타를 즐겨 먹은 건 2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치즈 또는 설탕과 향신료를 뿌려 먹는 파스타가 주류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토마토를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고춧가루가 김치 속으로 들어오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이수광이 1613년에 펴낸 <지봉유설>에는 고추를 ‘남만초라는 센 독’으로 언급하면서 이것을 소주에 타서 마시면 대부분 죽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말 먹고 죽은 사람이야 없었겠지만, 생소하며 강렬한 매운맛을 내는 음식이 독으로 느껴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마침내 고춧가루가 채소와 결합하여 새로운 김치를 만들어내게 되었을 때, 그것은 한국인의 맛이 되었고, 주류로 자리 잡았다.

김치의 미래
혼밥 혼술의 시대, 가족이 다 함께 모여 김장을 준비하는 일은 점점 더 보기 드문 일이 되어가고 있다. 마트에서 사먹는 김치만으로 충분히 맛있고, 김치냉장고의 도움을 받으면 연중 내내 김장김치처럼 아삭하고, 시원한 맛의 김치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산업적 김치 생산이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김치의 종류가 줄어들고 재료가 더 단순해졌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송이버섯, 수박, 복숭아, 살구로도 침채를 담갔던 조선 시대와 비교하면 우리는 훨씬 더 적은 종류의 김치를 먹고 있다. 과거의 조리서를 반드시 재현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대로 재현해봤자 맛있을 가능성은 낮다. 유럽 음식 역사 전문가 플랑드랭Flandrin이 중세 요리책에 나오는 레시피를 따라 만들어보았더니 요즘 요리보다 나은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과거의 김치가 지금보다 훨씬 다양했다는 걸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현대적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모더니스트 퀴진>에 수박 껍질 김치가 오르고, 영국 <텔레그래프>지에 적양배추로 담근 브릿치(Brit-chi, 영국식 김치의 별칭)가 오르는 세계에서 고춧가루와 배추, 무를 벗어나볼 때도 됐다.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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