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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국과 백사

2017년 10월 16일 — 0

음식에 결이 존재한다면 이종국의 요리는 여타의 한식과 다른 결의 한식이다. 베일에 가려있던 그가 새로운 레스토랑 백사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는 한식을 우리 음식으로 정정했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우리 음식을 한식이란 틀 안에 가두지 말자는 것이다.

백사, 우리 음식의 방향성을 제시하다

한양 도성의 북쪽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성북동은 1990년대 이후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시간이 멈춘 곳이다. 덕분에 간송미술관, 한국가구박물관, 심우장 같은 조선 시대와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는 역사와 문화 자원이 동네 곳곳에 남아 있다. 성북동 특유의 정서가 좋아 오래전부터 이곳에 자택 겸 아틀리에인 음식발전소를 차린 요리연구가 이종국은 한식 파인다이닝이란 표현조차 낯설던 시절부터 우리 음식을 모던하게 담는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실력은 알음알음으로 전해져 음식발전소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음식발전소가 전화번호조차 공개되지 않은 프라이빗 레스토랑인 데 반해 2016년 여의도 전경련 건물 50층에 오픈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곳간by이종국은 그가 대중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기틀을 제공했다. 그가 메뉴부터 인테리어까지 참여한 이 레스토랑은 지난해 말 발간된 <미쉐린 가이드 서울편>에서 2스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오는 10월 중순, 그의 음식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레스토랑이 성북동에 문을 연다. 할아버지의 호인 백사白沙를 시각적으로 디자인한 104로 명명한 레스토랑은 크게 3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이 들어선 곳은 과거 광목을 받아 햇빛으로 표백하는 마전터 자리였다. 그 시대 아낙들이 빨래하고 국수를 삶아 먹은 곳이라고 해서 백사 1층에서는 면 요리를 판매한다. 2층은 바다, 들, 산에서 채집한 식재료를 사용해 절기 음식을 만들고 3층은 음식발전소를 통해 보여줬던 음식보다 한 단계 캐주얼해진 비스트로급의 파인다이닝을 선보인다.
항간에선 그를 두고 은둔의 셰프라 칭했다. 2014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 개관 100주년을 기념해 갈라 디너를 선보인 유일한 한국 셰프이고, 올해 초 기획된 포시즌스 호텔 체인의 호화로운 세계 미식 투어에서 서울의 파인다이닝을 대표할 요리사로 지목받은 그의 명성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으나 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궁금해할 수밖에. “기업 컨설팅이나 재계 총수의 사모님들과 요리 수업을 하다 보니 실질적으로 나와서 행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이제는 우리 음식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후배 양성을 위해 상업 공간으로서 한식 레스토랑의 덕목과 방향성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백사 오픈을 앞두고 소회를 밝힌 그는 이 공간을 통해 이루고 싶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좋은 식재료를 가진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겠다는 것. 해외의 미쉐린 스타 셰프가 그의 음식을 맛본 후 했던 질문이 한결같았기 때문이다. “토종 허브나 몇십 년씩 묵은 우리 전통 소스를 맛보고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물어봐요. 우리가 트러플 요리를 하려면 그 나라 산지에서 사와야 하는 것처럼 그들이 우리 음식을 공부하려면 당연히 한국에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가마솥에서 국수를 삶고 있는 이종국.
가마솥에서 국수를 삶고 있는 이종국.
이종국의 우리 음식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그를 지켜보면 화가 같기도 하고 시인 같기도 하다. 접시를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듯 정성스럽게 음식을 담는다. 그리고 그 음식에 대한 그의 설명을 들으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사회에 나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했다는 독특한 이력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음식이나 그림이나 인테리어는 담는 재료만 다를 뿐, 모두 같다고 생각해요. 그림이나 인테리어는 남기 때문에 두고두고 감흥을 줄 수 있지만 음식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요리사는 음식을 먹는 그 순간에 손님의 가슴에 시 한 편, 소설 한 편 남겨야 하지요.”
그가 본격적으로 요리연구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할 때였다. 유독 주방을 의뢰하는 클라이언트들이 많았는데 자신이 디자인한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은 요리를 내놓는 것을 보고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이후 입소문을 통해 찾아오는 이들이 생겼고 그중에는 매거진 회사 대표도 있었다. 그가 해준 밥을 먹고 요리 기사 연재를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재계 총수의 부인들이 요리 수업을 부탁해왔고 나중에는 가족, 지인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식사를 의뢰하면서 음식발전소에서 프라이빗한 레스토랑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단 한 번도 전문 기관에서 요리를 배운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손맛 좋은 어머니를 따라 시장 가는 것을 즐겼고, 또 어머니는 이것저것 궁금해하는 아들에게 식재료를 설명해주는 것을 좋아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크고 작은 시련이 닥칠 때마다 시장을 돌아다니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던 그는 처음 보는 식재료는 상인에게 조리법을 물어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켰다. 아들 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와 시장에서 소명을 다한 아낙들이 그의 스승이었던 셈이다.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운 적이 없으니 고정관념도 없다. 9년간 쿠킹 클래스를 진행하면서 수업 시간에만 사용한 레시피가 500개가 넘는데도 여전히 막힘이 없는 이유다. “작년에 봤던 냉이와 올해 봤던 냉이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표현할 수 있겠어요?”

3층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은 모두 개별 룸으로 이루어져 있다.
3층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은 모두 개별 룸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려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음식

이종국이 말하는 우리 음식의 근간은 사람에 대한 배려다. 그는 프라이빗 다이닝을 선보일 때마다 참석자의 식성과 모임의 성격, 제철 식재료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새롭게 코스 메뉴를 짜고 테마에 어울리는 메뉴판을 만들어 손님에게 선물했다. 배려의 대상은 비단 손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백사 지하 1층에 위치한 메인 키친 한편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자리하고 벽에는 대형 그림이 걸려 있다. 직원들이 마음 놓고 식사하면서 언제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배려의 철학은 우리 음식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에서 기인한다. 쌀이 귀하던 시절 아들에게 잡곡밥을 주고 껌껌한 방 한구석에서 흰쌀밥을 먹던 어머니의 그릇에 알고 보니 국화꽃이 가득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과거 우리 민족의 처절했던 가난과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음식이란 매개체를 통해 자식을 배려한 어머니의 사랑이 더 아름답게 빛난다. 그는 음식마다 담겨 있는 스토리가 우리 음식의 저력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정찬을 준비할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스토리를 해독하고자 애쓴다. “코스 메뉴를 짤 때 불의 정화, 물의 기운 같은 타이틀을 정하는 것은 불을 통해 우리 음식이 만들어지고 좋은 물을 통해 우리 장류가 완성되어간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우리 음식의 묘미를 ‘시간의 맛’이라고 표현한 이종국은 백사 주방에 아궁이를 만들었다. 간장과 젓갈을 연도별로 구분해 사용하는 그가 가마솥에서 천천히 끓여낸 국물이 표현할 수 있는 음식의 스펙트럼이 양은냄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스태프들에게 조리모 대신 유생 모자를 씌우는 것, 할아버지 이항복의 호를 레스토랑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모두 그가 백사를 통해 한식의 맛만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백사는 다이닝 공간뿐만 아니라 우리 식재료를 상품화해서 해외에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뭉친 7인. 왼쪽부터 이종국, 음식발전소 최혜리, 마케터 서고은, 조용재 셰프, 음식발전소 한동욱, 수원과학대학교 박희지 교수, 영평푸드 박종일 대표.
백사는 다이닝 공간뿐만 아니라 우리 식재료를 상품화해서 해외에 수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뭉친 7인. 왼쪽부터 이종국,
음식발전소 최혜리, 마케터 서고은, 조용재 셰프, 음식발전소 한동욱, 수원과학대학교 박희지 교수, 영평푸드 박종일 대표.
백사를 통해 성북동 미식의 불이 환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백사를 통해 성북동 미식의 불이 환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Dining at 104
Dining at 104

1. 전식 9가지. 옥잠화꽃튀김, 호박잎게살말이, 포도마늘장아찌, 초알오징어포, 방아오일, 새우편, 육포단자, 샐러드바구니, 물만두.
2. 양지 사태를 우려낸 육수에 콩나물로 시원한 맛을 더한 각무국과 맑은 액젓을 사용한 빨간배추물김치.
3. 한방 재료와 50년 묵은 간장으로 맛을 낸 한우꼬리찜.
4. 디저트로 서비스되는 항아리모둠. 대추를 사용한 조란, 녹차소·참깨소·흑임자소를 이용한 마카롱, 유자 향을 입힌 과줄, 생강을 사용한 강란.
5. 제일능이로 만든 향이 뛰어난 능이잡채.

백사 INFO
요리연구가 이종국의 한식에 대한 스펙트럼을 경험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다. 1층은 면 요리를 파는 다이닝 공간과 그가 만든 반찬과 소스 그릇, 패브릭을 판매하는 숍이 함께 있다. 2층은 제철에 나온 수산물, 임산물, 농산물로 만든 절기 음식을 선보이며, 3층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다. 공간 곳곳에 궁중 유물과 고가구가 전시되어 있어 갤러리로도 손색없다.
· 1층 2만5000원+싯가(전식 디저트 포함), 2층 제철 음식 5만원+싯가, 3층 30만원(저녁 예약제)
· 서울시 성북구 성북로 95-1
· 010-747-0104

edit 이미주 — photograph 이과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