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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피냥의 와인

2017년 10월 4일 — 0

눈부시게 맛있는 와인을 만드는 남프랑스 루시용의 와인 수도, 페르피냥 근교에 다녀왔다.

가을로 접어드는 남프랑스 와인 산지 루시용의 포도밭 풍경.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포도의 건강을 해치는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가을로 접어드는 남프랑스 와인 산지 루시용의 포도밭 풍경.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포도의 건강을 해치는 바닷바람을 막아준다.

남프랑스라는 지역이 주는 환상은 대단하다. 파라솔과, 바다와, 여름의 햇빛을 사계절 내내 소유하고 있을 듯한 니스와 칸, 생트로페 같은 해변도시가 고민 없이도 차례차례 떠오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지도를 들여다보면, 남프랑스에는 남쪽의 바닷가 경계선을 따라 이런 휴양도시들과 별개의 매력을 지닌 마을들이 촘촘히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페르피냥이다. 페르피냥의 매력은 와인 빼고는 상상할 수 없다. 페르피냥이 위치한 루시용 지역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를 이루는 피레네산맥 동쪽에 위치한다. 삼면을 산이 에워싸고, 동쪽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닷바람이 온화하게 마을 한복판을 통과하는 지형이다. 이곳에서 자라는 포도는 연간 2500시간 넘게 햇빛을 받으며, 고민 많은 보르도나 부르고뉴의 포도와 달리 태평하게 자란다.
그리스인들이 포도를 심고, 로마인들이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 마시던 이 유서 깊은 동네는 최근 20세기의 역사와 요즘의 와인 트렌드 사이에서 징조가 나쁘지 않은 진통을 앓고 있는 듯하다. 원래 이 동네는 포도밭의 등급이나 원산지 명칭에 있어 프랑스의 다른 산지에 비해 규제의 엄격함이 비교적 덜 적용된 곳이다. 심기만 하면 포도가 알아서 잘 자라는 천혜의 땅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마케팅과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샹파뉴, 보르도, 부르고뉴에 비해 와인 품질로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젊은 양조가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심상치 않은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와이너리 부동산 값도, 만드는 와인 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데다 등급 규제에 옭아매일 필요 없이 내 스타일대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선 기회의 땅인 셈이다.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청량하고 신선한 이 지역 와인은 짭짤한 육가공품, 올리브, 치즈와 최고의 궁합을 이룬다.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청량하고 신선한 이 지역 와인은 짭짤한 육가공품, 올리브, 치즈와 최고의 궁합을 이룬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스위트 와인 VDN
페르피냥 일대를 유명하게 한 데는 드라이한 화이트나 레드 와인보다 스위트 와인 ‘뱅 뒤 나튀렐Vin du Naturel’의 공이 크다. VDN이라고 불리는 이 와인은 최소 알코올 도수가 14.5도는 유지해야 한다. 포도 주스에 순도 96%에 가까운 주정을 첨가하고, 알코올이 모두 날아가기 전에 발효를 중지시켜 당분의 일부를 남겨둔다. 알코올 도수도 높고, 단맛도 나는 스위트 와인 VDN이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이트나 레드 VDN에서는 말린 과일, 생강 과자, 구운 체리와 무화과, 담배나 꿀 같은 복합적인 풍미가 나 마시는 사람의 후각을 단번에 매혹시킨다. 향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싱글 몰트위스키를 연상시키는 고혹적인 황동 빛깔도 VDN의 특징이다. 이런 색은 ‘담 존느’라고 불리는 커다란 호리병 모양의 유리 용기에 담아 1~2년 정도 외부의 햇빛에 노출시켜야 얻어진다. 와인 비니거 같은 독특한 산도도 이 같은 산화를 거친 덕분에 얻어지는 VDN만의 고유한 맛이다. 이런 맛의 스위트 와인은 독일의 아이스바인이나 보르도의 귀부 와인이 갖지 못하는 개성 있는 풍미라, 스위트 와인 중에서도 유독 페르피냥 일대의 와인을 찾는 마니아층이 형성돼 있다.
질 좋은 VDN을 찾는다면 몇몇 마을 이름을 외워두는 게 도움이 된다. 뮈스카 드 리브잘트Muscat de Rivesaltes, 리브잘트Rivesaltes, 바뉼스 그랑 크뤼Banyuls Grand Cru, 바뉼스, 모리Maury에서 만드는 스위트 와인이라야 단편적이지 않고 섬세한 스타일을 맛볼 수 있다. 바뉼스의 카브 에투알Cave l’Etoile은 캐주얼한 VDN부터 고급스러운 스타일까지 고루 만드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생산자다. 리브잘트를 수준급으로 만드는 테라수Terrassous는 세련되고 모던한 테이스팅 공간에서 기분 좋게 애호가들을 호객한다.

 페르피냥이 특산품인 뱅 뒤 나튀렐은 커다란 호리병 모양의 담 존느 병에 담겨 1~2년간 산화돼 독특한 풍미를 갖는다.
페르피냥이 특산품인 뱅 뒤 나튀렐은 커다란 호리병 모양의 담 존느 병에 담겨 1~2년간 산화돼 독특한 풍미를 갖는다.

자유분방한 드라이 화이트와 레드 와인
페르피냥이 위치한 루시용 일대는 1년 중 300일 넘게 햇빛이 내리쬐는, 그래서 우울함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힘든 동네다. 포도에게도 이런 기후는 최고의 환경이다. 건조하고, 일조량이 풍부하고, 밤과 낮의 온도 차가 심하고, 토질이 척박해야 포도나무가 저 밑에 숨어 있는 깊숙한 미네랄과 영양분까지 뿌리를 뻗어 건강하게 성장한다.
환경은 훌륭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에게 회자될 만한 멋진 와인이 덜한 것도 바로 이 지역이다. ‘기를 쓰고 좋은 와인을 만들어보자’는 신선한 바람은 고작 10년 전부터 불기 시작했는데, 이런 흐름은 이 동네 양조가들이 아니라 프랑스 다른 지역에서 건너온 외지인들이 주도했다. 그 수요는 벌써 10%에 이른다. 이들은 루시용에서 제공하는 협동조합 시스템 대신, 개인 양조장을 열고 밤낮으로 품질 연구에 매진한다.
원산지 명칭과 등급 체계가 중요한 프랑스 다른 지역과는 달리, 남프랑스는 정형화된 체계의 엄격함이 덜하다. 꼭 좋은 등급의 와인이 아니라도 꾸준히 팔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이런 특징 때문에 젊은 양조가들은 이곳에 터를 잡고 다양한 시도를 한다. 보르도에서 피노 누아를 재배하거나 샹파뉴에서 레드 와인을 만들면 프랑스 전역에서 들고일어나 결사 반대하겠지만, 남프랑스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품종도, 양조 방식도, 맛도, 레이블 디자인조차도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다.
앞서 언급한 뮈스카 드 리브잘트, 리브잘트를 포함한 다섯 곳의 마을은 원래 스위트 와인 VDN으로 유명한 산지들이다. 그런데 최근 젊은 양조가들이 이 지역에 둥지를 틀면서 드라이 화이트와 레드 와인의 퀄리티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다섯 마을 중 가장 이름이 덜 알려진 모리 지역의 생산자들은 스위트 와인보다는 드라이 화이트나 레드 와인에 승부수를 띄우는 분위기다. 레바논 출신의 양조가가 만드는 발 드 레이Val de Ray나 론 지역 북부의 코트 로티에서 나고 자란 와인 메이커가 남프랑스로 옮겨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 그리에Grier도 남프랑스 와인의 미래에 기대감을 갖게 했다. 부르고뉴의 양조가 집안에서 태어난 가예 가문의 오너는 근사한 건축물 같은 로크 데 앙주Roc des Ange를 지어 눈부시게 세련된 화이트 와인을 만들고 있다. 마스 베차Mas Becha가 만드는 최고급 레드 와인은 수십만원을 호가하는데,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시음하면 론, 나파밸리 등 쉽사리 원산지를 판별할 수 없는 강렬한 맛으로 승부한다.

페르피냥 도심 뒷골목을 걷다 보면 동화책에 나올 듯한 색색의 집들이 관광객을 반긴다.
페르피냥 도심 뒷골목을 걷다 보면 동화책에 나올 듯한 색색의 집들이 관광객을 반긴다.

남프랑스에서 즐기는 카탈루냐식 다이닝
위에서 언급한 와인들을 가장 맛있게 즐기는 방법은, 당연지사 이 지역의 로컬 음식에 곁들이는 것이다. 페르피냥은 프랑스령이지만 스페인과 프랑스가 반반 나눠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곳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카탈란 사람들처럼 사고하고, 카탈란 사람들이 먹는 것을 먹는다. 닷새 동안 방문한 레스토랑 중에 프랑스 와인 산지에서 만나는 르 코르동 블루 레시피 스타일의 프랑스 음식점은 거의 없었을 정도다.
식재료부터가 바르셀로나를 수도로 둔 카탈란식이다. 바닷가에 위치한 라 리토린La Littorine 레스토랑에서 기억나는 최고의 음식은 식전에 한 스푼 떠먹고 내내 여운이 남던 질 좋은 올리브유와 제철 복숭아를 VND에 절인 과일 요리였다. 모리 지역에서 만든 신선한 화이트 와인과 잘 어울렸다. 리조트 안에 위치한 라 파세렐La Passerelle은 일곱 가지도 넘는 이 지역의 대표 와인에 맞춰 최고의 마리아주를 보여줬다. 카탈란 가정식 요리를 하는 비밀의 정원 같은 식당 메종 파레Maison Pare는 안초비, 허브를 활용해 피로한 미각이 와인과 함께 깨어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곳은 유럽 전역에서 휴가철이 되면 자동차를 몰고 오는 수십 년 된 명소다.
현지인도 추천하는 샤르퀴트리(육가공품) 전문점 르 티레 부숑Le Tire Bouchon은 프랑스뿐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식 소시지와 햄류를 잔뜩 쌓아두고 파는, 와인 안주의 보물창고였다. 이곳에서 파는 프랑스식 순대 부댕과 겉을 감싸 오븐에서 중탕으로 오래 굽는 테린은 그 짭짤하고 꾸덕꾸덕한 식감 때문에 한 조각만 먹고 멈출 수 없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리니 왼쪽에는 테이블이 있고 글라스 와인을 여러 종류 팔았다. 작정하고 찾아가서 근사하게 앉아 마시는 서울에서의 와인 라이프가 아쉬웠다. 도시 곳곳에서, 식당과 양조장 곳곳에서 그것을 만드는 종주국이자 생산국의 여유가 느껴졌다.

1 ——— 유럽 전역의 미식가들이 찾는 카탈란 레스토랑, 메종 파레의 테라스 풍경.
유럽 전역의 미식가들이 찾는 카탈란 레스토랑, 메종 파레의 테라스 풍경.
이 지역의 와이너리에서는 어떤 곳을 방문해도 뱅 뒤 나튀렐용 담 존느 병을 집집마다 내놓고 있는 풍경을 보게 된다.
이 지역의 와이너리에서는 어떤 곳을 방문해도 뱅 뒤 나튀렐용 담 존느 병을 집집마다 내놓고 있는 풍경을 보게 된다.

text 이영지 — photograph 루시용와인협회, 이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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