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main

Dining

동치미 @양진채

2017년 2월 10일 — 0

그녀는 그를 잃고도 음식의 맛을 느낀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치미 국물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국물을 한 숟가락 넘기자 가슴이 찌르르 하며 열렸다.

text 양진채 — illustration 왕조현

여자는 김치냉장고 통에서 마지막 남은 동치미 무를 꺼내 썰었다. 겨울 동안 여자는 동치미를 먹으며 버텨냈다. 버텨냈다는 말은 과장도 엄살도 아니었다. 동치미가 아니었다면 여자는 지금도 새벽에 거실로 나와 아주 어두운 것도, 그렇다고 밝아진 것도 아닌 어둠 속처럼 현실도 아닌, 꿈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서 시린 발로 서성거리고 있을 거였다. 여자는 지극히 평범한 삶에 만족했다. 만족했다기보다 특별히 불만이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여자는 마흔이 되도록 험한 일을 당하지도 않았고, 크게 다치지도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큰돈을 쥐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빚을 지고 사는 것도 아니었다. 여자의 무던한 성격처럼 삶도 그렇게 무던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그러니 암 진단을 받은 그가 한 달 만에 죽어버린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한 달 동안 여자는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암 말기라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빠르게 죽음 쪽으로 갔지만 붙잡을 수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했고, 자고 일어나면 원래대로 돌아와 있을 줄 알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여자는 그의 손가락을 붙들었다. 떨어지면 안 되는 거였다. 겨울이 시작되었을 때, 여자는 그와 가까운 바닷가 횟집에 갔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 앉아 회를 주문했다. 아직 초겨울이어서 그렇게 춥지 않았는데 방바닥이 따뜻했다. 손이 차지 않았지만 허벅지 밑으로 손을 넣어 따뜻한 방바닥에 댔다. 둘이 앉기에는 큰 상에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짓수만도 스무 개쯤 되는 반찬들이었다. 그가 문득 여자에게 오른손 엄지와 검지 끝을 맞대고 둥글게 원을 만들며 따라 해보라고 했다. 여자가 오른손으로 그를 따라 하자 그는 여자의 왼손에 소위 스키다시로 나온 반찬 중 삶은 메추리알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힘을 바짝 주라고 했다. 그러고는 여자의 엄지와 검지를 벌려보려고 했다. 벌려지지 않았다. 다시 왼손에 해삼 접시를 올려놓고 같은 방법으로 엄지와 검지를 벌려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여자는 손가락에 똑같이 힘을 주고 있었는데 어이없게 맞닿은 엄지와 검지가 벌려졌다.

그는 이것을 오링 테스트라고 했다. 그는 식탁에 있는 멍게, 청어구이, 해초무침, 콘치즈, 부침, 붉은 새우, 삶은 소라, 가리비, 홍합 국물, 연두부까지 차례로 여자의 왼손에 올려놓았고 오른손 오링을 하고 있는 손가락을 벌려보았다. 어느 음식에는 손가락이 스르르 벌려지고, 어느 것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음식을 나르던 종업원이 지나가며 웃었다. 마지막에는 소주, 락교까지 테스트했다.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가 꿈쩍하지 않을 때 왼손에 들린 음식이 몸에 잘 맞는 좋은 음식이라고 했다. 여자와 그는 그렇게 음식 테스트를 해보다가 나중에는 장난기가 발동해 식탁, 식탁의 비닐, 수저, 방석 같은 것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여자는 그의 손을 왼손으로 잡고 아까부터 흘낏 보고 있던 주인에게 오른손의 오링을 떼어보라고 했다.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와서 여자의 엄지와 검지를 벌리려 했다. 벌려지지 않았다. 주인이 손에 힘을 주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주인은 알 수 없다는 듯이 뒷머리를 긁더니,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십시요, 했다. 여자는 혹시나 엄지와 검지가 쉽게 벌려질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때도 여자는 생각했다. 이전에 그래왔듯이 이후로도 별다르지 않은 삶이 펼쳐질 거라고. 모험도 활동적인 것도 싫어하는 여자는 매일 같은 삶에 감사했다. 여자는 잠들지 못하는 밤에 그날 왼손에 놓인 그의 손과 꿈쩍하지 않던 오른손의 오링이 가끔 떠올랐다. 여자는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먹었다가도 토하는 일을 반복했다.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앉을 때마다, 푸르고 고요하던 새벽의 병원 복도가 떠올랐다. 먹지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자 살이 급격하게 빠졌고, 몽롱해졌다. 그와 관련된 물건들이 집 안 곳곳에 있었고, 그것들을 볼 때마다 무릎이 꺾였다.

선잠에서 깨었을 때, 여자는 새벽인 줄 알았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엄마가 불도 켜지 않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주방 쪽에서 고소하면서도 단내가 났다. 냄비 안에 조금 전 끓인 듯한 흰 쌀죽이 있었다. 여자는 엄마 옆에 가서 앉았다. 이 새벽에 무슨 죽을. 여자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엄마는 여자가 곁에 와 앉는 것도 모르고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이와 어른이 절벽과도 같은 곳에 좁게 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길도 산도 온통 흰 눈에 덮여 있었다.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영하 25도에 이르는 날씨인데 길에서 잠을 잤고, 얼지 않은 물을 건너야 할 때에는 바지를 벗은 어른이 팬티만 입은 채, 아이와 짐을 진 채 얼음이 떠다니는 차가운 물을 건넜다. 허벅지까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며칠을 걸었고 이웃 마을에 다다랐다. 그제야 여자는 내레이션을 통해 그들이 학교에 가는 길임을 알았다. 학교까지 가는 데 10일이 걸렸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길이었다. 얘야, 학교를 가야 한다는구나. 공부를 해야 한다고, 배워야 한다고 목숨을 내놓고 길을 간다는구나. 여자의 엄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자는 그렇게 가는 길을 ‘차다’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가 온통 눈으로 뒤덮인 히말라야 풍경에서 눈을 돌렸을 때, 거실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걸 보았다. 첫눈이었다. 이젠 여자에게 눈이 온다고, 꽃이 피었다고 문자를 해줄 그가 없었다. 차다,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자의 엄마가 주방으로 가서 가스레인지 불을 켜고 냄비 안의 죽을 저었다. 새벽인 줄 알았는데 날은 밝아지지 않고 더 어두워졌다. 유리창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고, 그 눈을 바라보는 여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여자의 엄마가 여자를 끌어다 의자에 앉히고, 죽을 대접에 담고,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 식탁에 놓았다. 동치미였다.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죽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숟가락이 간 것은 동치미 국물이었다. 살얼음이 뜬 동치미 국물을 한 숟가락 넘기자 가슴이 찌르르 하며 열렸다. 동치미 국물에서는 파와 마늘과 청갓과 생강과 삭힌 고추가 무와 물속에서 어울려 익으면서 나는 옅은 아릿한, 쌉쓰름하면서 시원한 맛이 났다. 재료들이 소금물 속에서 무와 함께 익으면서 그 어떤 요리로도 흉내 낼 수 없는 맛을 내고 있었다. 그를 잃고도 동치미 국물 맛이 느껴진다는 게 용납할 수 없었지만 동치미 국물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피클처럼 시거나 달지 않고, 짠지처럼 짜지 않으면서, 동치미 국물은 여자의 위 속으로 스며들었다. 여자는 그렇게 국물을 떠 마시고 무를 씹기 시작했다. 아삭한 식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여름 무에서는 느낄 수 없는 단단한 무 맛이었다. 동치미에 들어가는 재료가 겨울이 제철인 재료였고, 무 역시 김장철일 때 가장 달고 단단했다. 그리고 낮은 온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동冬치미였다. 겨울이 아니면 제대로 맛볼 수 없는 김치, 동치미였다. 여름에 내놓는 동치미는 제대로 맛을 낼 수가 없었고, 무도 물러진 경우가 많았다. 오직 겨울이어야만 했다. 영하의 눈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이었고, 온통 눈밖에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기어이 그 길을 갔다. 여자는 동치미를 한 그릇 깨끗이 비우고 나자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이 떠지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딘지 분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여자가 어렸을 때 연탄가스를 마신 적이 있었다. 엄마 역시 연탄가스를 마셨지만 여자를 질질 끌고 방문을 열고, 마루를 지나 눈 쌓인 마당까지 기어가 얼음덩이가 동동 뜬 동치미 국물을 떠다가 입에 넣어줬고, 여자는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여자는 잊고 있었지만 동치미는 두 번이나 여자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었다. 아직도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붙여 그와의 오링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이제는 왼손에 올려놓을 그의 손이 없었다. 어쩌면 그때 식당 주인은 혹시라도 여자의 손가락이 쉽게 벌려질까봐 힘을 주는 척만 하면서 여자의 손가락을 벌려보려 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여자가 동치미를 한 그릇 다 비우고 나서 창밖을 보았을 때, 밖은 완전히 깜깜해졌고, 내리던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시계를 보았고, 새벽이 아니라 밤이 깊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한 그릇의 동치미를 다 비우고 일어서려고 의자를 빼는데 갑자기 끄윽, 하고 트림이 나왔다. 여자의 엄마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

양진채는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나스카 라인>이 당선되어 소설가가 되었다. 소설집 <푸른 유리 심장>, 장편소설 <변사 기담>이 있고, 공저 소설집으로 <인천, 소설을 낳다>, <선택>, <일곱 편의 연애편지> 등이 있다. 제2회 스마트소설 박인성 문학상, 2016년 문학비단길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 기사도 읽어보세요
케이크를 디자인하는 여자, 김예분 초콜릿 마스터, 케이크 디자이너, 와인 소믈리에, 아동 요리, 외식 경영까지 총 5개의 요리 자격증을 갖고 있는 김예분. 케이크 디자이너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레드앙트르메를 만드는 김예...
배달 앱과 음식의 미래 @정재훈 전화 주문의 시대는 갔다. 단 몇 번의 터치면 집 앞까지 요리를 전해주는 배달 앱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뜨겁다. 배달 요리 주문 플랫폼의 발전은 우리의 식사 패턴은 물론 더 나아가 인류의 미래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파리에서 즐기는 쇼콜라 매해 11월은 파리의 포르트 베르사유에서 쇼콜라 박람회가 열린다. 프랑스인들이 유독 사랑하는 힐링 아이템 쇼콜라의 숨겨진 면모를 프랑스 최고의 쇼콜라 전문 셰프들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text 오윤경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