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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정서진

2017년 2월 3일 — 0

고단한 삶의 한가운데 작은 기쁨이 필요한 순간 생각나는 음식이 미식이다.

text 정서진

2015년, ‘먹방’에 이어 ‘쿡방’ 열풍이 불기 시작하던 무렵 나는 미식 문화와 관련된 책을 번역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미식 쇼쇼쇼>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의 원제는 미식가로 유명한 브리야 사바랭이 남긴 경구(“당신이 먹은 음식을 말해보라.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겠다.”)를 부정하는 “당신이 먹은 음식이 곧 당신은 아니다”이다. 음식의 준비와 소비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푸디즘Foodism 문화를 파헤친 책 속에는 세계 유명 미식 레스토랑의 각종 미식 요리, 요리 기법, 진귀한 재료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나는 듣도 보도 못한 요리 기법과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남의 나라 요리를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서 인터넷 바다를 떠돌다 알 수 없는 곳에 표류하기 일쑤였다.

책에 나오는 수비드, 콩피, 분자요리, 드리즐 기법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사이 내 집 밥상은 날이 갈수록 단출해졌다. 레시피 없이는 뭐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요리 무능력자에 가까운 내가 미식 문화를 다룬 책을 겁도 없이 맡았으니 검색만 하다 몇 시간씩 흘려보내기도 했다. 번역과 육아, 집안일 사이에서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날들이었다. 그나마 위로 아닌 위로를 받은 순간이 있다면 최고급 미식 문화를 주도하는 셰프들이 일하는 현장도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는 사실이다. 직업전선에 뛰어든 자는 너나 할 것 없이 평등하게 피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먹은 음식이 당신이 속한 계급을 보여주고 당신의 미학적 감수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러다 보니 최고급 미식 문화 향유자들에게는 그들의 부를 과시하고 존재감을 드러낼 새로운 요리가 필요하다. 새로운 맛, 새로운 재료와 기법에 더해 심지어 식재료는 새로워지기 위해 개명까지 한다(파타고니아 비막치어는 칠레 농어로, 부시돌치는 오렌지 러피로 개명했다). 현대 요리의 기법을 정리한 오귀스트 에스코피에는 괴로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참신함! 그게 지배적인 요청이다…. 새로운 조합을 발견하고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분자요리까지 등장했나 보다. 전에 없던 요리를 만들 목적으로 음식을 분자 단위까지 연구해 음식 재료의 질감, 조직을 변형시켜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음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액화질소로 냉각해 만든 아이스크림을 맛보고서 “절묘하다, 독특하다” 같은 형용사를 남발하지 않고, “임금님은 벌거벗었다”라고 외쳤던 소년처럼 “올리브유 덩어리를 삼킨 것 같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값비싼 요리를 먹으며 자유롭게 음식 본연의 맛을 느끼고 즐길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이런 음식을 창조하는 셰프들도 자신이 만든 것을 즐겨 먹지는 않는 듯하다. 요리사이자 작가인 앤서니 보댕이 일류 요리사들에게 생애 마지막 식사를 택해야 한다면 무얼 먹겠냐고 묻자 모두들 평범한 가정식 요리를 꼽았다고 하니 말이다.

미식 문화에 관한 책을 산고 끝에 번역한 후 나는 미식, 즉 좋은 음식이란 일상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당장 좋은 음식으로 삶의 작은 기쁨을 느끼고 싶은데 1년에 6개월은 창의성을 충전하기 위해 휴업한다는 엘 불리의 기나긴 예약자 명단에 이름만 올린 채 과연 작은 기쁨을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얼마 전 인상 깊게 읽은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주인공은 작은 기쁨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누구에게나 이런 작은 기쁨을 주는 단골 식당이나 카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아이의 탄생과 함께 가장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이 외식이었다. 그전에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느낌을 맛보고 싶을 때면 이태원 골목 곳곳에 즐비한 이국적인 식당을 찾곤 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한 번도 발걸음을 못했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 동네에는 한창 떼를 쓸 나이인 아이를 데려가도 언제나 반겨주는 단골 식당이 있다. 밥하기 싫은 어느 날 누군가 웃으며 차려주는 음식 앞에서는 삶의 고단함마저 위로받는 느낌이다. 진정한 미식가를 자처하며 음식 문화를 선도한다고 믿는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인정받으려는 과도한 노력 앞에서 일상적인 즐거움을 빼앗기는지도 모른다. 내가 먹은 음식으로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려는 과시욕을 걷어내고 나면 우리는 오롯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선택한 음식으로 소박한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유행과 과시욕에 이끌려 찾는 음식이 아니라 고단한 삶의 한가운데 작은 기쁨이 필요한 순간 생각나는 음식이 진정한 의미의 미식이 아닐까.

정서진은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영번역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스파이스-향신료에 매혹된 사람들이 만든 욕망의 역사>, <미식 쇼쇼쇼>, <신이 토끼였을 때>, <대지의 아이들 1부: 동굴곰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