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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탁재형

2016년 12월 26일 — 0

그 안에 담긴 기억까지 함께 먹을 수 있을 때, 음식은 가장 큰 힘을 갖게 된다.

text 탁재형 — photograph 이과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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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라탕酸辣湯은 닭고기 국물에 중국 식초와 두반장을 넣어 얼큰하면서도 새콤하게 만든 수프다. 네 발 달린 것은 책상 빼고 다 식재료로 이용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진지하게 들릴 정도인 중국에서 산라탕은 그리 귀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는 음식이다. 하지만 내 마음속의 중국요리 랭킹 차트에선 언제나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처음 제대로 된 산라탕을 먹어 본 것은 중국이 아닌 이탈리아에서였다. 2002년 겨울, 밀라노는 추웠다. 알프스가 멀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패션 산업에 대한 취재로 왔다고는 해도 빠듯한 제작비에서 회사의 운영비와 내 인건비까지 뽑아내야 하는 외주 프로듀서 처지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리 없었다. 자연히 숙소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위성도시에 잡게 되었다. 취재가 없던 날, 동네에서 끼니를 해결하려 돌아다녀 봤지만 제대로 된 음식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데 밥 한 끼를 해결하려고 드물게 다니는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닌 듯했다. 그때 불현듯 눈앞에 간판 하나가 보였다. 리스토란테 칸토네제. 말하자면 광동반점. 이렇게 외진 변두리 동네의 주택가에까지 중국 음식점이 들어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메뉴가 온통 이탈리아어로만 되어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심지어 중국인임이 틀림이 없는 주인장은 오로지 이탈리아어밖에 못하는 동네 토박이었다. 흔한 한자 하나 없는 메뉴판을 이리저리 뒤적여 봤자여서, 나는 주인장에게 아는 이탈리아어를 최대한 끌어모아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했다. “쭈파몰또, 몰또아라비아또뻬르파보레(아주 아주 화가 나 있는 수프를 주세요).” 잠시 후 맵고 얼큰한 것이 간절했던 나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홍고추와 두반장이 어우러진 국물의 알싸한 향 앞에 그간 흘릴 일 없었던 눈물과 콧물이 봇물을 이뤘다.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신음 소리를 흘리며 나는 한 방울 남김없이 걸쭉한 국물을 흡입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녹말을 되직하게 푼 국물이 담고 있는 얼큰한 열기는 도통 잊혀지질 않았다. 마지막에 흘려 넣은 계란이 주는 포근한 단맛, 거기에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리는 천추陳醋(검은빛이 나는 중국 식초)의 신맛이라니. 하지만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요리들이 주를 이루는 한국의 중식당 중에서 산라탕을 상차림에 포함시켜 놓은 곳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중국과 교류가 훨씬 더 활발해진 요즘에 와서도 산라탕은 고급 호텔 중식당에나 가야 만날 수 있는 메뉴다. 당연히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결국 나는 연희동이나 대림동에 산재되어 있는 중국 동포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천추, 팔각, 고수처럼 중국에 가지 않고서는 구하기 힘든 산라탕의 재료들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며칠간 인터넷에서 손품을 팔고, 중국 동포 밀집지역에서 발품을 판 끝에 직접 만든 한 그릇의 산라탕을 입에 넣었을 때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밀라노 변두리를 떠돌던 2002년의 겨울이. 차가운 빗줄기에 마음까지 움츠러들었던 해외 취재 초년병 시절의 고단함이. 그리고 고국의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일거에 지워 버릴 수 있게 해준 한 그릇의 수프가. 다시 거리로 나갈 수 있는 힘이 되었던 오래도록 사그라들지 않는 온기가. 그 한 그릇의 산라탕이 시초였던 것 같다. 나라 밖에서 마주쳤던 맛이 내 집 주방에서 재현되는 것의 희열을 깨닫고 나자 나의 찬장은 이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가람 마살라, 케찹 마니스, 삼발 트라시, 누옥 맘, 코코넛밀크, 정향과 팔각 같은 이국의 향신료가 하나씩 늘어 갔다. 그 향신료들은 다시 웍Wok 안에서 합쳐져 하나의 기억이 되었다. 페루의 파리우엘라, 일본 나고야의 도테니, 인도의 팔락 파니르 같은 것들이 내 부엌에서 되살아났다. 그리고 각 지방에도 돌아다니며 만났던 땅과 사람과 공기에 대한 인상을 또렷이 불러왔다. 나는 거기에 나의 이야기를 가니시로 얹어 친구들에게 대접했다. 그 음식은 또 그렇게 친구들의 기억이 되었다. 음식은 그 안에 담겨 있는 기억까지 먹을 수 있을 때 가장 힘이 있다고 믿는다. 좋은 재료와 진귀한 향신료 말고도 음식에 가치를 더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차려지기까지의 맥락이다. 이것이 빠져 있다면 아무리 비싸고 좋은 음식이라고 해도 큰 울림을 만들어내기 힘들다.

음식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시대다. 공중파 방송엔 추상같은 잣대로 음식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하는 프로그램들이 넘쳐난다. 조금이라도 이름이 유명한 식당 앞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하지만 내 생각에 미식은 그러한 열광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미식은 식탁 또는 주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나그네의 설움을 곱씹으며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어느 거리의 뒷골목에서, 힘겨운 산행을 마치고 돌아온 허름한 산장의 등잔불 아래에서, 장대비가 양철 지붕을 때리는 아열대의 어느 산골 오두막 안에서 일생을 함께할 미식의 추억이 잉태된다. 평론가의 호들갑스러운 찬사에서 시작된 ‘트렌드’가 아닌 건강한 식욕의 샘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상황이든 적어도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의 이름 정도는 알아 놓으시길. 나중에 못 견디게 먹고 싶어졌는데 대체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게 되어 버린다면 그것처럼 큰 낭패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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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재형은 <세계테마기행>의 PD이자 오지 전문 여행자다. 팟캐스트 <탁PD의 여행수다>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 다큐멘터리 PD로서 15년간 경험한 여행 이야기를 담은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를 출간했다. 여행지에서 먹었던 요리를 한국에서 다시 만들어보기를 좋아하는 미식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