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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노중훈

2016년 11월 11일 — 0

미식은 누군가의 수고로움이자 인내이고 시간의 누적이다.

글. 노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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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국어대사전에서 미식美食을 찾으면 ‘좋은 음식. 또는 그런 음식을 먹음’이라고 나온다. 그럼, ‘좋은 음식’이란 무엇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마다 기준과 취향이 다르니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고 명확하게 줄 세울 수 없다. 좋은 음식을 구성하는 혹은 좋은 음식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요소는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주관적이며 복합적이다. 식재료, 조리 방법, 가격, 식당의 역사, 맛의 일관성, 종업원에 대한 처우, 날씨, 특정 음식과 결부된 개인적인 추억, 몸의 컨디션, 주고받는 대화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에도 숨이 차다.

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배로 약 1시간 거리에 우도가 있다. 인구라고 해봤자 20여 세대 30여 명에 불과한 아담한 섬이다. 송도호민박은 섬의 유일한 민박집이자 식당이다. 안주인 강남연 씨는 마을 어르신들을 세심하게 살펴 ‘우도의 딸’로 불린다. 부지런한 성품에 음식 솜씨도 특출하다. 점심시간 식당에 자리를 잡으면 기본적으로 미역, 가시리, 서실 등으로 차린 해초 밥상을 준비해준다. 톳을 넣고 지은 밥이 숭늉처럼 구수하다. 갯바위에서 직접 채취한 따개비와 거북손 등도 낸다. 겨울에 우도를 찾으면 제철 물메기와 학꽁치가 식탁의 중심을 잡아준다. 보통 무, 마늘, 파 등을 넣고 맑은 탕으로 끓여낸다. 통영의 청정 바다를 닮은, 그야말로 잡티 하나 없는 순정한 자연의 맛이다. 주둥이가 뾰족한 학꽁치를 토막 쳐서 넣은 김장 김치는 ‘공깃밥 잡는 귀신’이다. 미식은 제철을 길어 올리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이다.

창원시 진동면 고현리는 미더덕 양식으로 유명하다. 전국 생산량의 70% 정도를 담당한다. 실제 양식장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1999년 이전까지는 굴 양식에 방해된다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미더덕이지만 지금은 마을 전체를 먹여 살리는 효자 상품이자 봄을 알리는 맛의 전령사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미더덕 껍질을 까는 일은 여간 까다롭지가 않다. 안쪽 막을 터뜨리지 않은 채 꽃잎처럼 얇은 껍질을 벗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강철로 만든 짧고 날카로운 전용 칼을 사용한다. 마을 주민들은 미더덕 철이 되면 하루 10시간씩 이 고단한 작업을 해낸다. 멍게의 향이 혈기 방장한 20대라면 은은하고 잔잔하게 퍼지는 미더덕 향은 원숙한 40~50대에 비유할 수 있다. 미더덕이 어금니 위에서 와그작거리며 부서지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귀를 세차게 자극한다. 미식은 숭고한 육체노동의 산물이다. 서울 종로구 누하동 골목에 위치한 일본식 메밀국숫집 노부는 체구가 작다. 덩치가 우람한 사내 몇 명만 들어가도 공기가 답답해진다. 노부의 젊은 주인은 매일 아침 맷돌로 메밀쌀을 갈아 그날 판매할 분량의 반죽을 만든다. 반죽을 밀어 메밀 전용 칼로 써는 등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다. 그는 메뉴판에 인상적인 글귀를 적어놓았다. ‘메밀은 계절이나 날씨, 습도에 따라 반죽할 때 물의 양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일정한 면을 만들기란 매우 어렵지만 항상 한결같은 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자 참을 인忍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인장과도 같은 그 ‘참을 인’ 자 뒤에 숨은 젊은 장인의 결기와 성근함을 직감했다. 미식은 누군가의 지독한 인내에서 비롯된다. 반드시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오래된 식당에는 오래 일한 종업원이 있다. 그들의 정직한 몸에는 식당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유명한 식당, 업력이 긴 식당 중에는 자식이나 손주에게 물려준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서울 낙원동의 호반은 좀 다르다. 1961년 개업 이후 많은 사람의 사랑방 구실을 해오다 사정이 생겨 문을 닫은 것이 지난해 6월. 애주가와 미식가들의 탄식을 안도의 한숨으로 바꾼 장본인은 무려 40여 년간 호반에서 일한 ‘주방 이모’다. 그는 재동에서 낙원동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문을 열었다. 누구보다 가게를 잘 아는 종업원이 새 주인이 된 까닭에 호반은 옛 멋과 맛을 누락 없이 계승하고 있다. 호반은 기본으로 깔리는 반찬부터가 강력하다. 특히 수더분해서 더 호감이 가는 물김치와 ‘뼛속’까지 하들하들한 꽁치조림은 이 집의 간판이라 할 만하다. 봄비처럼 촉촉한 콩비지, 어지간한 순대 전문 식당을 부끄럽게 만드는 대창 순대, 살도 양념도 삼삼한 병어찜까지 갈 때마다 주문하고 싶은 메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식은 오래된 위로다.

나는 오래되고 낡은 가게에서 안온함을 느낀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거나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이 주요 고객인 음식점에 관심이 쏠린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선반, 닳고 닳아 종잇장처럼 얇아진 부엌칼, 거의 자취를 감춘 한 장씩 떼는 일력, 시커멓게 그을리고 움푹 팬 대형 주전자가 그 어떤 오브제보다 내 마음에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수원집은 인천 차이나타운 입구에서 한 꺼풀 비껴난 밴댕이 골목에 자리한다. 가게 안팎에 시간의 더께가 불룩하게 쌓여 있다. 작고 좁은 실내 중앙에는 철판을 씌운 술청이 떡하니 놓여 있고, 중년과 초로의 사내들이 연신 소주잔을 비워낸다. 안주는 주인아주머니가 노련한 솜씨로 썰어준 밴댕이, 병어, 준치, 광어 등이다. 매일 아침 남편이 시장에서 구입하는 제철 생선들이 고요히 빛난다. 수원집에서 혼자 술 마시는 일은 자연스럽다. 누구도 눈꼬리를 올리거나 퉁을 놓지 않는다. 생면부지의 사람들만 있더라도 한두 잔 마시다 보면 어느새 말을 섞고 서로의 술잔을 채워주게 된다. 수십 년 단골들의 ‘깨알 에피소드’와 아재들의 슬며시 끼어드는 허풍은 술맛을 배가시키는 최고의 조미료다. 미식은 시간의 누적이다.

노중훈은 여행 칼럼니스트다. 여행신문에 입사해 2년 6개월간 근무하다 2001년 10월부터 지금까지 프리랜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각종 신문과 잡지 등에 여행 관련 글과 사진을 활발히 기고하고 있으며 <백년식당>을 펴냈다. 로칸다 몽로의 박찬일 셰프와 함께 찾아낸 훌륭한 맛과 역사가 깃든 식당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매주 토요일 오전 라디오 프로그램 <노중훈의 여행의 맛>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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