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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노중섭

2016년 6월 15일 — 0

맛이란 화학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감각이다. 즐거운 식사에 행복한 맛이 깃든다.

© 심윤석
© 심윤석

어릴 적 우리 삼남매는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 앞에 늘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려주신 밥과 국을 남김없이 먹어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부모님 말씀을 하느님 말씀이라 생각하는 모태 장남인 나는 군소리 없이 늘 그렇게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야 한다며 도시락을 점심 시간에 맞춰 학교로 가져다주셨다. 밥에서 김이나고 맛있는 국 냄새가 교실에 가득 퍼지면 친구들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요즘 엄마들은 아이에게 아무거나 배부르게 먹이지 못한다. 방송에서 보고 듣는 첨가물들은 아예 악으로 규정하고 비싼 유기농을 찾아 헤맨다. 얼마전 식약처에선 나트륨 저감화에 이어 당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방송에선 좋은 음식, 나쁜 음식을 나누고 좋은 식당, 나쁜 식당을 판정한다. 천연은 좋고 합성은 나쁘다는 식의 이야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엄마들은 얇은 지갑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위해 가장 비싼 분유를 산다. 분유통 뒷면을 보면 수백 가지 식품 첨가물이 표기되어 있다. 그런 분유는 아이에게 직접 먹이면서 이유식만큼은 첨가물 없는 유기농을 찾아 직접 해 먹이는 걸 보면 아이러니하다. 100% 친환경 자연산만 존재했던 100년 전에는 평균 수명이 30세를 넘기기 힘들었는데 오염된 환경과 가공식품이 넘치는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기대 수명이 어떻게 세계 최고 수준으로 늘었을까?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그리고 미량의 비타민과 미네랄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이 음식들을 잘게 씹어서 죽처럼 만들고 꿈틀대는 위에서 위산을 섞어 반죽한 다음 구불구불 긴 통로인 소장으로 넘긴다. 죽이 된 음식물들은 소장을 지나면서 소화된다. 소화 과정 중 탄수화물은 포도당과 과당으로 분해되고, 지방은 글리세롤과 지방산으로,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된다. 이렇게 분해된 단위체들은 체내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몸을 구성하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화합물로 변환된다. 뭘 먹든 모든 음식물은 딱 이 과정을 거친다. 맛있는 음식보다 편한 음식이 몸에 좋고, 진한 맛보다 담백한 음식이 몸에 좋다. 하지만 우리는 맛집을 찾지 편한 음식집을 찾지 않는다. 항상 맛 때문에 과식하지만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나쁜 성분 탓을 한다. 우리는 음식을 즐겁고 행복하게 먹는 법보다는 좋은 식품과 나쁜 식품으로 나누는 습관부터 배우고 있다.

음식의 진정한 가치는 즐거움이다. 즐거워야 건강할 수 있다. 프랑스 음식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건강에 좋아서가 아니라 개인과 이웃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념하기에 좋은 문화적 전통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음식의 주인은 당신이다. 의사, 셰프, 식품학자가 아니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음식은 이미 안전하고 영양도 충분하다. 그저 가볍게 즐기기만 하면 나머지는 내 몸이 알아서 한다. 맛은 음식이 아니라 뇌 속에 있다. 음식은 갖가지 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리의 향을 맡으면 뇌 전체에 퍼져있는 뉴런에 불이 들어온다. 향은 기억 중추를 자극하여 우리를 과거의 기억과 연결시킨다. 냄새를 맡는 순간 오랜 세월 땅 밑에 감춰져 있던 지뢰처럼 과거의 기억을 폭발시킨다. 모닥불 피우는 냄새는 군고구마를 먹었다는 단순한 사실만 떠올리지 않는다. 세포 속에 잠들어 있던 그리움을 순간 깨워버린다. 호호 불어주던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이 더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처럼 사람의 뇌리에 박힌 음식은 추억과 함께 먹었을 때 당시의 정경이나 감정까지도 불러일으킨다.

행복한 맛이란 무엇일까? 내 앞에 앉은 사랑스러운 그녀가 고기 한 점을 치지직치지직 구워 뜨거울까 호호 불며 입에 넣어준다. 한잔 술을 권하며…. 인류가 불을 발견한 이후 가장 큰 선물인 마이야르 반응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기의 아미노산이 높은 열에 의해 당과 반응하여 수만 가지의 풍미를 머금고 한 잔의 술과 함께 그녀의 젓가락이 입 안으로 들어온다. 내가 맛본 음식 중 가장 행복한 맛이다(애석하게도 어머니가 아닌 그녀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맛에는 수많은 감각이 관여한다. 우리의 기억, 음식을 먹는 장소, 먹는 도구, 음식의 향 그리고 함께 음식을 나누던 친구들이 영향을 준다. 우리는 맛있다는 감각을 미각만이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을 총동원하여 느낀다. 곧 맛은 화학적이며, 동시에 정신적인 감각인 것이다. 술맛의 10%는 술을 빚은 사람이다. 술맛의 90%는 마주 앉은 사람이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다. 맛 자체보다 맛의 이면에 깔린 멋을 찾고 즐길줄 아는 사람이 진짜 미식가인 셈이다. 영양을 섭취하기 위한 식사는 모든 동물이 하는 식사이고, 좋아하는 사람과 행복한 기억을 남기는 식사는 오로지 인간만이 가능한 식사이다. 어릴적 어머니께서는 파가 머리에 좋다고 파를 잘 먹어야 한다며 파로 만든 온갖 음식을 먹이셨다. 그래야 공부를 잘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머리만 커졌다. 거짓말에 속은 것일까? 사랑에 넘어간 것이다. 착한 음식 나쁜 음식은 따로 없다. 행복한 맛을 즐기고 행복한 기억을 남기자.

노중섭은 연세대학교에서 생명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천연물 화학을 주 전공했으며 그와 관련한 다수의 국내외 논문과 특허를 냈다. 과학자인 남편보다 아침 방송에 나오는 불량 지식을 더 믿는 아내를 보며 생긴 사명감으로 <감칠맛과 MSG이야기>(공저)를 썼다. 현재 해태제과 중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식품 안전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