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main

Trend

밀가루의 이면성에 대하여 @정재훈

2016년 4월 11일 — 0

밀가루 중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식생활에 있어 중요한 존재인 밀가루. 건강을 위해 밀가루 섭취를 줄이자는 의견이 상당한 요즘, 밀가루는 우리 건강에 적인가, 아군인가.

© 백경호
© 백경호

밀가루의 힘
강력분, 중력분, 박력분. 잘게 쪼개져 부슬부슬한 가루에 무슨 힘이 있다고, 저렇게 종류를 나눠둔 걸까 싶지만 밀가루에는 정말 근육이 숨겨져 있다. 가루에 물을 넣고 개면 근육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반죽을 치대면서 물리적 힘을 가하면 그 근육은 더 튼튼해진다. 다시 반죽을 물에 넣고 전분을 씻어내면 숨어있던 근육질의 단백질 구조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두 가지 단백질 분자(글리아딘Gliadin과 글루테닌Glutenin)가 물분자와 뒤섞이며 만들어낸 글루텐이다. 글루텐은 6세기 중국의 국수 제조자들이 처음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500년쯤 지난 송나라 때는 이미 널리 알려진 식재료가 되었다. 동물의 근육처럼 수축과 이완이 가능한 이 탄성 좋은 덩어리에 밀가루의 근육(몐진面筋)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고기를 대신하는 인공육의 재료로 종종 사용되었다. ‘빛깔은 발효 우유 같고 맛은 돼지고기, 닭고기보다 뛰어나다’는 내용의 시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당시 중국인들의 글루텐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글루텐을 사랑한 인류
중국인들의 관찰력은 예리했다. 유럽에서 글루텐을 발견한 건 중국보다 한참 뒤인 17세기 이탈리아의 과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새로 발견한 이 물질이 접착제처럼 끈끈하다는 뜻에서 글루텐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그 물질이 단백질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밀가루 반죽 속의 글루텐이 동물의 근육 속 단백질과 유사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한 세대가 더 걸렸다. 하지만 발견이 늦었을 뿐, 유럽인들도 글루텐을 사랑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밀이 빵을 굽기에 제일 좋은 곡물이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밀가루의 성분은 대부분 탄수화물이고 단백질은 10분의 1수준이지만, 반죽 속에서 공간을 구획짓는 뼈대는 바로 단백질이다. 밀가루 속 단백질은 반죽 속에서 물과 섞이며 엉겨 붙어서 그물처럼 생긴 글루텐 구조물을 만든다. 계속해서 반죽을 치대면 글루텐은 풍선처럼 얇은 막으로 펴진다. 반죽 속에 넣은 효모에 의한 발효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많은 이산화탄소 기체가 만들어 진다. 이때 반죽이 너무 질기면(탄성) 풍선이 부풀어 오를 수 없을 것이고, 반죽이 너무 쉽게 늘어나면(가소성) 풍선이 터져버리는 문제가 생긴다. 이렇듯 글루텐은 가소성과 탄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오븐에 익힌 모차렐라 치즈처럼 쭉쭉 늘어나면서도 스프링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한다. 글루텐의 이러한 성질 덕분에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빵은 효모가 당분을 발효하면서 만드는 이산화탄소 기체의 압력을 버틸 수 있다. 반죽 속에서 풍선과 같은 이산화탄소 기포가 커져도 터지지 않고 모양을 유지하면서 부풀어 오른다. 잘 구운 빵을 잘라 단면을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구멍들이 눈에 띈다. 거죽을 뚫고 지나가려는 이산화탄소 기체와 그에 저항한 글루텐이 서로 맞대어 남긴 흔적들이다. 역사 저술가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H.E. Jacob은 자신의 저서 <빵의 역사>에서 인류가 밀을 선택한 것은 가장 빵을 잘 구울 수 있는 곡물가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밀이 빵을 굽기에 가장 적합한 원료가 되는 것은 글루텐 함유량이 다른 곡물들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가 밀을 선택한 것은 글루텐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똥배의 원인으로 지목된 밀가루
글루텐의 존재에 대해 처음 듣게 된 건 20년 전쯤 제빵 일을 하던 친구를 통해서였다. “밀가루 반죽 덩어리를 물에 씻으면 작고 끈기있는 덩어리가 남는데 그게 글루텐이야. 몸에 아주 안 좋은 거지.”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다. 당시만 해도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외하면 빵이나 국수는 알아도 글루텐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미국의 심장 전문의 윌리엄 데이비스William Davies가 쓴 책 <밀가루 똥배>가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그는 밀이 현대인의 건강을 해치고 있으며, 글루텐이 함유된 밀은 통밀이든 정제 밀가루든 모두 독이라는 과감한 주장을 펼쳤다. 신경 장애, 당뇨병, 심장병부터 관절염, 발진, 정신분열 증 환자의 망상까지 광범위한 질환이 밀 때문이라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펄머터David Perlmutter라는 신경과 전문의는 여기에 한 술 더 얹어 밀이 뇌를 늙게 만드는 조용한 살인자라는 주장을 담은 <그레인 브레인>이란 책을 냈다. 그는 “글루텐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고,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훨씬 크다”고 단언했다.
파장은 컸다. 글루텐의 존재를 알게 된 지금, 글루텐이 들어 있는 음식을 먹으면 복통을 경험한다는 사람의 수는 미국에만 2000만 명에 달한다. 미국인 열 명 중 셋은 글루텐을 피하려고 애쓰며 이들이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글루텐 프리 또는 밀가루 프리 메뉴만 2억인분이 넘는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글루텐에 대한 지식을 간단히 테스트해보자. 다음 중 글루텐이 들어 있는 곡물은 어떤 것일까?

a.밀 b.호밀 c.보리 d.귀리 e.옥수수

답을 확인하기 전, 호주 모나시Monash 의과대학의 피터 깁슨Peter Gibson 교수의 연구 결과를 살펴보 자. 깁슨 교수는 사람들이 글루텐에 정말 민감한지 알고 싶었다. 그는 2011년 실험을 통해 유전 질환이 없는 환자에게도 밀, 호밀, 보리의 글루텐이 속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다. 밀뿐만 아니라 호밀, 보리, 귀리에도 글루텐이 들어 있다. 옥수수 하나를 제외하면 전부 위 테스트의 정답이다). 깁슨 교수의 연구 결과는 데이비스가 <밀가루 똥배>를 펴낸 해에 발표되었으니, 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셈이었다. 하지만 정말 글루텐 때문이었을까? 다른 변수가 있었던 건 아닐까? 의문을 품은 깁슨 교수는 3년 뒤 자신의 이전 연구 결과를 뒤집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복통을 일으킬 수 있는 유당, 다당류 등의 다른 여러 성분을 철저히 없애고 더 엄격하게 실험을 진행한 결과, 글루텐에 민감하다고 주장한 참가자들이 실제로 글루텐 때문에 속이 불편한 것은 아닌 걸로 드러났다. 참가자들의 복통은 음식 성분의 구성보다는 그들의 기대치에 좌우되었다. 증상의 원인은 밀가루 음식이 아니라 밀가루가 자신에게 해를 준다는 믿음 때문이었던 것이다(귀리에 글루텐이 들어 있다는 걸 알게 된 다음 날, 오트밀을 먹으면 멀쩡했던 배가 하루 사이 아플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번 생겨난 잘못된 믿음을 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데이비스가 <밀가루 똥배>를 출간한 지 5년이 지난 올해, 미국의 글루텐 프리 제품의 판매량은 이전보다 갑절로 늘어나 원화로 환산하면 무려 18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글루텐의 문제는 데이비스나 펄머터의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퍼뜨린 글루텐 괴담이 사회에 미친 영향이 예상보다 큰 것은 분명하다.

밀가루와 다이어트의 연관성
과학자들의 글루텐에 관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글루텐이 대중의 건강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는 데이비스와 펄머터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유전성 질환인 셀리악병 환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이 글루텐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가루를 적게 먹으니 건강이 좋아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기분 탓이기도 하겠지만 음식 섭취량이 줄어서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하루 세끼 중 한 끼를 밀가루로 먹는 대한민국에서 밀가루를 섭취하지 않기로 결심할 경우, 먹을 음식의 종류는 상당히 줄어든다. 게다가 특정 재료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식단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섭취 칼로리가 감소할 수 있다. 물론, 농사를 짓고, 밀을 추수하고, 제분을 하고, 빵과 국수를 만들어 먹으며 발전한 문명에 반기를 들고, 글루텐과 밀을 거부할 수 있으며, 원시인처럼 먹는 걸 꿈꿀 수도 있다. 다만, 그 당시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서른을 넘기지 못했다는 사실 만큼은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정말 궁금해야 할 것은 원시인 다이어트 보다는 빵을 먹으면서 오래도록 건강한 사람들의 비결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더 많다.

text 정재훈 — edit 권민지 — photograph 백경호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

이 기사도 읽어보세요
파리 스타일 버거 레스토랑 패스트푸드를 경멸하던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 버거 바람이 불었다. 프렌치 스타일로 새롭게 해석한 버거 레스토랑을 구경해보자. 글: 오윤경 / 사진: 오윤경, 코케트 1. 마미버거 (Mamieburger)  ...
식초 명인 김순양 전라남도 진도의 건강한 땅에서 천연발효식초를 만들어내는 명인 김순양을 만났다. text 송정림 / photograph 차가연 (왼쪽부터) 김순양 명인은 단기 발효인 공장식 탱크 발효가 아닌...
알렉스가 해장하러 가는 집 겨울비가 내려 쌀쌀하던 날, 동부이촌동의 작은 골목에 위치한 르번미에서 알렉스를 만났다. 해장엔 역시 뜨끈한 국수라며 한 그릇을 순식간에 비웠다. edit 전보라 — photograph 이향아 르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