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개점한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 지하에 위치한 바, CHARLES H. 비밀스럽고 아늑한 분위기에 수준 높은 바텐더들이 다양한 칵테일을 제공한다.

비밀의 자리들은 사라졌다. 좁은 골목을 두고 다양한 개성으로 행인을 유인하던 많은 술집과 밥집들이 어느 빌딩 지하로 숨거나 없어졌다. 그가 광화문 대로에 있는 외국계 언론사에 입사한 지 어느덧 17년 남짓, 밀레니엄과 붉은 악마로 채워지던 광화문도 보았고, 가이바시와 시사모를 굽던 피맛골의 꼬치집들이 추억 속으로 사라진 것도 보았다. 칼을 찬 장군상이 자리를 옮겼고 대로 사이에 공원이 생겼고 몇 개의 빌딩이 새로 지어졌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광화문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억울함에 몰려드는 군중들로 넘실거리는 거리를 꾸준히 봐왔고 그 또한 점심시간이면 정장 차림의 수많은 군중들에 떠밀려 밥집을 찾았다. 북악산은 변화가 없었고 오래된 빌딩들도 그대로였다. 쉽게 바뀔 수 없는 랜드마크들과 자신과 같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움직이는 톱니 인생들로 채워진 광화문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곳 같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그는 변했다. 변하지 않는 땅 위에서면 그곳에 진 기분이 들었다. 긴 시간 동안 월급이 근근이 오른 대신, 커다란 위 수술이 있었고 살집이 붙었다. 그가 입사하던 20대 중반의 젊음은 자리를 내줬다. 흰머리가 늘었고 눈의 흰자에는 핏줄이 채워졌고 피부는 수분과 탄력을 잃었다. 그곳에서 작동하는 기계 부속으로는 수명이 아직 많이 남았지만 언젠가 끝이 있음을 고민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그가 하는 일은 금융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는 주로 과거에 능통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제 지표의 그래프를 그려낼 수 있었다. 그가 눈을 감으면 지난 시절의 모든 변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는 둔했다. 그는 예측에 대한 말을 아꼈지만 어쩔 수 없이 불확실한 전망에 대한 예측안을 내놓아야 할 때, 백전백패의 예언을 뱉어냈다.
그는 아직 가정을 갖지 못했다. 동료들은 그의 건강보다 그가 둥지를 트지 않은 것을 염려했다. 그는 사실 가정을 갖지 못한 것에 개의치 않았지만 주변의 염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는 사람 만나는 것에 재주가 없고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는 많이 긴장했기 때문에 주위에서 누군가를 소개시켜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예의상 몇 번의 주선을 견뎌내듯 만났지만 십 몇 년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는 어느 평일 저녁 처음 만나는 여자와 함께 예의 있는 저녁 식사를 했다. 모든 대화가 예의라는 가죽을 뚫지 못했고 헛헛한 기분에 감싸인 둘은 세종로 뒷길에서 헤어졌다. 그는 지하철역으로 가기 위해 작은 골목을 지났는데 여울을 지나는 바람 사이, 남아있던 겨울이 그의 몸에 달라붙었다. 몸을 움츠리며 길에서 나오자 새로 지은 검은 빌딩이 그의 앞에 솟아 있었다.
“차장님!”
외투 깃을 올리고 말간 젊음이 다가왔다. J는 그의 회사에 입사해서 3년 정도 근무하다 1년 전 이맘때 회사를 떠났다. 말간 젊음은 미소를 지었다.
— 오랜만에 광화문에 들렀더니 역시 반가운 분을 만나네요.
J는 그에게 술 한잔을 청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검은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지은 호텔의 위용 있는 로비 라운지를 지나 계단을 찾았다.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J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여기 한잔하기 좋은 데가 있다고 들었거든요. 저도 처음 와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그들 옆을 스쳐갔다. 대리석 벽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갔다. 둘은 그들이 들어간 쪽으로 향했다. 간판도 없고 문의 생김새가 없는 출구가 열렸고 그들은 호텔의 바로 들어섰다. 낮은 조도의 고급 바 안, 생긴 지 얼마 안 된 술집의 어색한 활기가 있었다. 그들은 바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 요즘 종종 밀주 시대 미국 어딘가를 떠올리게 하는 위스키 바가 생겨나요. 여기도 그런 분위기인 듯해요. 죄짓는 건 아닌데 몰래 훔쳐 먹는 기분이 들게 하는.
— 그래. 새롭네.
바텐더들은 분주했다. 단단한 얼음을 잔에 담고 리큐어들을 섞고 손님들과 대화하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바쁜 움직임이 흘러갔다. 눈앞에 말간 젊음처럼, 바텐더들 또한 새로 생긴 톱니처럼 빈틈없이 움직였다. 코트를 입은 손님들이 줄지어 들어오더니 바에 앉거나 안락한 소파로 숨어들었다. 젊은 여자들이 화려한 칵테일을 시켰다. 그는 느리고 어색하게 칵테일을 골랐다. 그는 올드 패션을, J는 맨하탄을 시켰다.
— 차장님은 그래도 멋을 아시네요. 소주, 맥주, 임페리얼 외의 취향이 있으신 거잖아요.
— 혼자 노는 데 익숙해지다 보면 칵테일 하나둘 정도는 좋아하게 되어 있어.
직장은? 만나는 여자는? 그는 J에게 하나마나한 질문을 던졌다. J는 금융사에 들어갔고 연애는 안 한다고 했다. 옆테이블의 여자들이 J에게 눈길을 주었다. J는 그 눈길을 부드럽게 받아넘기고 가느다란 손으로 빈 잔을 어루만지다 체리를 입안에 넣었다.
— 여긴 좀… 비밀스럽군.
— 네, 차장님. 체리가 정말 맛있어요.
J는 체리를 오물거렸다.
— 차장님도 비밀스러운 분이잖아요.
— 그런가. 그래도 이렇게 화려한 느낌은 아니지….
— 은밀하고 신사다우시죠. 제가 차장님 비밀은 하나 알지만요.
— 뭔가. 비밀이?
— 알기까지 오래 걸렸는데…. 자신은 없어요.
J는 미소 지었다. 그는 뒤늦게 J의 손끝 하나가 자신의 손목에 닿아 있는 것을 느꼈다. 그가 J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text — photograph 김종관
김종관은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 단편 영화로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서 입상했으며 장편영화로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있다. 저서로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