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은 재료와 손맛, 환경이 불러온 자연과 혼이다.

자칭 미식가연美食家然하던 시절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기자 시절. 본의 아니게 스타일 지면을 담당하다 보니 음식과 술에 대해 잘 알아야 했다. 프랑스 음식에 대해 쓰자니 당시 국내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던 피에르 가니에르에 들러야 했다. 또 싱글 몰트위스키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위스키 바를 찾아 호기롭게 한 병을 주문한 적도 있었다.
회사에 경비를 청구하는데도 한계가 있던 터라 지갑이 성할리 없었다. 당시 난 경제적 궁핍을 미식에 대한 학습으로 채우고 있다고 위안했다. 한 단계 한 단계 미식의 세계를 섭렵해 가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자신의 혀와 취향을 믿는 대신 남들이 쌓아놓은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다. 학교 공부가 배움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학생들처럼, 그렇게 미식이라는 것을 익혔다.
사회에 내던져진 학생은 학교 공부가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우려 든다. 외식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을 때가 그런 순간이었다. 특히 음식에 대해서 자신이 없었다. 음식을 먹고 비평하는 것과 빼어난 음식을 만드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렇다고 요리사들에게만 맡겨둘 수만도 없었다.
고심 끝에 결심했다. 전국의 이름난 맛집과 좋은 재료를 다 찾아보리라고. 그렇게 배낭과 등산화 하나 사들고 시작한 일에 꼬박 1년 반을 쏟아부었다. 최남단 마라도행 뱃길에서 방어회를 시식했고 연평도 꽃게잡이 배에 올라 밤새 속을 게워내기도 했다. 고맙게도 혼자 하려던 일을 흥미롭게 지켜본 한 방송사가 그 여정에 동행해 주었다. 그때 참 많이 배웠다. 미식은 화려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요리도 기능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외부에서 매긴 등급을 믿지 않게 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당시 미식에 대해 크게 깨친 것이 서너 가지 있었다. 우선 재료의 중요성이다. 하긴, 이탈리아 와이너리 투어 와중에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미식은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에서 맛본 것이 아니었다. 움브리아 와이너리의 대모 격인 할머니가 텃밭에서 기른 재료들을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레시피대로 만들어낸 가정식 요리였다. 직접 길러 수확한 보리쌀을 삶아 내놓은 샐러드며, 싱싱한 호박꽃 안에 소를 채우고 튀겨낸 주키니 요리는 평생을 회고하는 소재가 될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좋은 재료는 약간의 간만 해도 정말 맛있었다. 미나리 산지에서는 고춧가루와 간장만 부어도 완벽한 찬이 됐다. 알타리무는 집에 남 은 돼지고기만 넣고 쪄내도 환상적인 안주로 변신했다. 현지에서 수확한 재료에 별다른 기교 없이 낸 음식만큼 대단한 미식은 없었다.
이른바 ‘손맛’이라고 하는 것을 실감한 것도 그 당시였다. 그것은 이름난 셰프들이 선보이는 탁월한 기능과 예술적인 디스플레이와는 다른 세계였다. 고택古宅에서 오랜 세월 가문을 통해 전해져온 요리를 해야하는 종부宗婦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부잣집 안방마님이 아니었다. 좋고 비싼 재료를 구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내온 음식은 언제나 기가 막혔다. 전보다 빈한貧寒해지는 동안에도 고이 간직해온 손맛만으로 천하진미天下眞味를 선보였다. 손맛은 타고나기만 하는 것도, 배우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인고의 세월이 빚어내는 장인의 예술이었다.
재료나 맛집 연구 시절 이후에도 미식과 관련해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하나 있었다. 몇 해 전 강원도 정선 아우라지 장터에서 곤드레 막걸리를 마실 때 시원하고 쌉싸름한 맛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하지만 서울에 와서 마실 때는 그때의 감흥이 잘 살아나지 않았다. 보관이나 유통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미식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환경이라는 점은 나중에야 깨쳤다.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먹는지뿐만 아니라 장소나 분위기까지 모두 여기에 포함됐다.
전복을 구하러 떠난 여행의 끝, 전남 노화도라는 섬 앞바다의 양식장에 들른 적이 있다. 양식장 어선 위에서 어부 몇이 전복을 권했다. 자신들만의 비법이라며 노련하게 껍데기와 내장, 입을 제거해 전복을 수북이 썰고 묵은지에 쌈을 싼 것이었다. 여기에 소주 한 잔과 깊고 푸른 바다, 잔잔한 수면이 가니시였다. 그것이 내가 경험한 몇 안 되는 궁극의 미식이었다.
그러고 보면 미식이란 신선한 재료와 숨은 손맛 그리고 좋은 환경이 삼위일체가 돼 불러오는 자연과 정신이 아닐까 싶다. 학교 공부가 학습의 전부가 아닌 것처럼, 선입견과 고정관념만 벗어나면 미식의 세계는 우리 주변 어디고 널려 있다.
text 이여영
이여영은 막걸리 전문점 월향의 대표다. 중앙일보, 헤럴드미디어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취재 중 맛본 막걸리에 반해 막걸리 사업에 뛰어 들었다. 월향은 이태원을 비롯해 여의도, 광화문 등에 4개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