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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정동현

2016년 1월 28일 — 0

미식은 취향을 넘어 시대를 나타내는 신호다.

text 정동현

세계 경제 성장률이 5%, 중국이 9%에 이르던 2004년, 샌프란시스코의 전설적인 프렌치 레스토랑 프렌치 론드리French Laundry의 오너 셰프 토머스 켈러Thomas Keller가 뉴욕에 파인다이닝 퍼세Per Se를 열었다. 뉴욕 타임스는 그해 레스토랑 리뷰에서 퍼세에 역대 최고 점수인 4개의 별을 안겼다. 2005년 미슐랭 가이드의 뉴욕 편에서 퍼세는 (당연히) 3개의 별을 받았다. 퍼세의 요리는 평균 객단가가 851달러이고 채식주의자 코스와 셰프의 테이스팅 코스 2가지 메뉴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9개 요리로 짜여져 있으며 랍스터, 캐비아, 푸아그라와 같은 고급 식재료가 아낌없이 쓰인다.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하며 벌어진 전 세계 금융 위기의 여파는 2009년에도 이어졌다. 세계 양대 경매 회사 중 하나인 크리스티의 그해 현대 미술품 판매량은 전년도에 비해 75%나 떨어졌다. 퍼세는 여전히 미슐랭 3스타를 받았다. 그런데 대중의 관심은 산적처럼 턱수염을 기른 데이비드 장의 모모푸쿠Momofuku에 몰렸다. 2004년 라멘집으로 시작한 모모푸쿠는 2009년 미슐랭으로부터 2개의 별을 받았다. 데이비드 장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모모푸쿠의 메뉴판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씨가 롯데 호텔에서 한식 세계화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뉴욕 모모푸쿠에서는 이미 김치찌개, 프라이드치킨, 보쌈을 팔고 있었다. 뉴요커들은 포크 대신 젓가락으로 라멘을 먹었고 닷지에 앉아 빨간 김치를 시켰다. 60°C의 물에서 45분간 삶아낸 달걀이 고명으로 올라간 모모푸쿠의 라멘은 15달러밖에 하지 않았다.

지난해 한국에서 줄이 가장 긴 레스토랑은 연남동의 툭툭누들타이고 예약하기 가장 힘든 레스토랑은 이연복 셰프의 목란이다. 지난해 기준 국내 거주 외국인은 174만 명으로 전체 인구 중 3.4%다. 2012년 필리핀 출신의 이자스민이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뽑힌 것은 상징적이다. 출산율이 세계 최하위권인 이 나라에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은 필연적이다. 마치 예전 데이비드 장의 부모가 미국으로 건너갔듯이 말이다. 더구나 외식 산업의 주 고객인 20~30대의 실업률이 10%대로 역대 최고를 치닫는 상황에서 인구 구성 변화는 외식 산업 트렌드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제 사람들은 2만원에 육박하는 가로수길표 파스타가 아니라 6000~7000원짜리 짜장면과 짬뽕을 먹기 위해 목란에 전화를 하고, 저가 항공 노선을 타고 가서 먹었던 똠얌꿍의 맛을 추억하려 한국으로 건너온 태국 요리사들이 웍을 잡는 툭툭누들타이에서 9000원짜리 팟타이를 먹는다. 동남아 식당의 요리사 수급난에 공단에서 프레스 기계를 만지던 베트남, 태국인부들이 주방으로 스카우트된다는 소리도 들린다.

며칠 전 나는 복합쇼핑센터로 변한 의정부 역사 앞 센트럴 타워 13층 푸드코트의 야타오 완Da Thao Quan에서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다. 값은 5000원, 한국말을 어설프게 하는 베트남 여자가 주문을 받았다. 그 맛은 베트남 호찌민 시에서 먹던 것과 비슷했다. 에두르지 않고 바로 치고 올라오는 감칠맛, 적당히 뜨거운 국물, 보들거리는 면발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처박고 젓가락질을 했다. 그릇을 비우고 주위를 둘러보니 푸드코트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베트남 사람이었다.

2016년 한국에는 숙취에 시달릴 때 해장국이 아니라 쌀국수를 찾고 고명으로 얹은 고수를 반기는 사람들이 더 늘 것이다. 가족 대대로 내려온 전통 레시피로 쌀국수 육수를 끓이는 베트남 사람도 물론이다. 미식은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나의 미식은 이 시대가 원하는 맛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쌀국수 한 그릇에서 알 수 있듯, 당대의 미식은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미식은 취향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식은 현상이고 신호다.

정동현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유통 회사를 다니다가 훌쩍 영국의 요리 학교 탕트 마리Tante Marie로 유학을 떠났다. 호주의 레스토랑에서 늦깎이 셰프로 요리 열정을 불사르며 일했다. 출간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지금은 신세계그룹 F&B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 일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