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main

Dining

ㅅㄹㅅㄹ @김종관

2016년 1월 19일 — 0

연남동 동진시장 골목에 위치해 있는 홍차 전문 카페 ㅅㄹㅅㄹ(실론살롱). 홍차와 밀크티가 있고 수제 당근케이크와 마카롱이 있다. 시장 골목과 어우러져 오래된 외관을 살린 듯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카페다.

textphotograph 김종관

© 김종관
© 김종관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릴 수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일 수도 있다. 텅스텐 스탠드 조명 아래 테이블 위에 차와 케이크를 둔 채 책장을 넘겼다. 그녀는 그에게 종종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에 과일을 파는 리어카 노점이 있었다고 했다. 매일같이 버스 정류장에서 퇴근하는 아버지를 기다렸고, 아버지의 어깨 위로 목말을 탄 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렁주렁 매달린 백열등 아래 과일들을 비추는 노란빛을 좋아했다고 했다.

반듯한 나무 창틀 너머 따뜻한 불빛 아래 그녀가 있었다. 그의 기억보다 머리가 조금 짧아졌고 조금 더 여성스러운 스웨터를 입는 여자가 되었다. 그는 그녀와 자신의 집 지붕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집 지붕을 궁금해했다. 그녀는 모험가였고 둘은 지붕에 올랐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새벽 거리를 보았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소년이 있었고 커튼 너머 혼자서 설거지를 하는 남자도 보았다. 그와 그녀는 아직 불빛이 있는 수많은 창문 너머를 엿보았고 비밀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는 그때처럼 창문 너머의 그녀를 엿보고 있다. 담배 한 대를 핑계로 귀찮은 술자리에서 잠깐 빠져나왔을 때 그는 골목 끝 카페 안에 홀로 있는 그녀와 재회했다. 그와 그녀는 골목을 두고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었지만 그는 그녀의 찻잔에 무엇이 담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홍차를 좋아했고 특히 다즐링을 좋아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홍차를 시켰다. 그는 가만히 앉아 물고기 모양의 인퓨저에서 연기가 피어나듯 차 색이 번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의 마음 어디에선가도 같은 작용이 있었고 그녀와 만나 차 색이 번지는 그 시간들을 즐겼다.

그는 담배를 물고 어둠 속으로 숨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책갈피를 쥐고 턱에 괸 손을 풀어 찻잔을 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찻잔에 오래 머물렀다. 그녀는 찻잔을 홀짝거리는 법이 없었다. 항상 잔을 조용히 입에 대고 그 안에 차가 천천히 입안으로 흘러들어가게 했다. 그녀는 우유를 타는 법도 설탕을 타는 법도 없었다. 찻잎만으로 우린 순수한 차를 좋아했다. 그가 그녀에게 홍차의 즐거움을 물었을 때 그녀는 홍차의 붉은 빛깔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또한 맛과 빛깔을 내는 잠시 사이의 시간을 좋아했다. 설익고 익고 물러지는 과일의 시간처럼, 홍차 또한 맛이 옅고 진하고 떫어지는 시간이 있다고 했다.

그들에게도 익었고 진했던 시간이 있었지만 견고했던 그들의 시간 또한 흘렀다. 그는 여전히 꿈속에서 그녀와 지붕에 올랐지만 그 꿈속에서 그녀의 얼굴은 점점 지워졌다. 기억 속의 그녀는 점점 저 너머의 거리로 물러나 있었다. 어둠 속에 숨은 그와 나무 창틀에 가려진 그녀 또한 꿈속의 관계와 다를 바가 없다. 그는 심지가 다 타버린 꽁초를 한 손에 쥔 채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귀찮은 술자리에 합류했다.

그녀는 책장을 넘기다 문득 창 너머를 보았다. 추위에 몸을 웅크린 남자가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창 쪽으로 가까히 내민 손등이 시렸다. 골목을 휘도는 바람에 나무 창틀이 들썩거렸다. 그녀는 찻잔을 들었다. 처음 마셔보는 밀크티였지만 맛이 나쁘지 않았다. 몸은 이내 따뜻해졌다. 추위에 발걸음이 바빠진 사람들의 종종걸음을 보며 그녀는 겨울 풍경을 엿보는 기분이 들었다.

김종관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 단편영화로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서 입상했으며 장편영화로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있다. 저서로 <사라지고 있 습니까><그러나불은끄지말것>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