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main

Dining

소슬다원 @김종관

2015년 12월 23일 — 0

textphotograph 김종관

© 김종관
© 김종관

그는 거의 매달 첫째 주 일요일 저녁 느지막이 그녀의 집에 들렀다. 그곳에서 월요일을 온종일 쉰 뒤 그녀와 함께 저녁을 먹고 부산가는 기차를 탔다. 그렇게 3년을 그 집에 드나들었다. 그녀의 집은 계동의 연립 주택 반지하에 있었는데 처음 그곳에 들렀을 때는 하수구에서 안 좋은 냄새가 흘러나왔다. 작은 원룸형 공간이라 싱크대에서 끼치는 악취를 피할 공간이 없었다. 다음번에 들렀을 때는 향이 피워져 있었다. 샌들우드 향이 악취를 가렸다. 그는 향냄새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그 향을 좋아하게 됐고 훗날 샌들우드 향을 맡으면 자연스레 그때의 그녀 집이 떠올랐다.

그녀의 공간에 침범해 있었음에도 그의 물건은 많지 않았다. 칫솔 하나와 면도기와 속옷과 양말 몇 벌이 다였다. 그의 소유는 아니었지만 그가 그녀에게 선물한 자질구레한 물건도 몇 개 있었다. 그녀는 그중 그가 여행 중 동유럽 어딘가의 벼룩시장에서 사온 커피잔을 아꼈다. 그 또한 골동품만 파는 시장 가판에서 그 조그만 두개의 잔을 봤을 때 샌들우드 향 나는 그 작은 집과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여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차를 타지 않았고 사람 많은 곳을 가지 않았다. 가볍지 않은 공황장애가 있었던 그녀는 집 근처 조용한 카페만 찾아 아르바이트를 했다. 카페에 사람들이 모여들면 일하는 카페를 바꿨다. 하지만 그녀가 여행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가 본 세상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에게는 그녀와 그녀의 집을 떠올리게 하는 두 가지 냄새가 더 있다. 그녀의 침대 안에 들어갔을 때 이불에 붙어 있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그녀가 내려주던 커피 향이다. 그가 사온 커피 잔에 커피를 내리기 위해 그녀는 좋은 원두를 준비했고 그가 오면 그라인더에 원두를 갈아 따뜻한 커피를 내주었다.

두 개의 잔에 커피가 담겼지만 커피는 항상 그 혼자 마셨다. 위가 약한 그녀는 커피를 거의 입에 대지 못했다.

월요일 아침이 되고 그녀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가면 그는 그녀의 집에서 종일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그의 것 외에 다른 칫솔이 있는지 찾아본 적도 있었지만 보통은 그녀가 봤던 영화를 보거나 그녀가 읽었던 책을 읽었다. 그녀는 저녁을 먹으며 그와 자신이 보았던 영화, 읽었던 책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는 그들의 상황이 그러하듯, 혹은 그들의 사정일 수도 있는 이유로 그들만의 내일을 이야기 해본 적이 없다. 다음 달의 만남은 기대했지만 내년의 만남은 기대한 적이 없다. 책과 영화를 이야기하는 저녁 식사는 뜸해졌고 다음 달을 기대할 수 없는 시기 또한 오고 말았다. 그녀가 빠져나가고 그는 그녀의 공간에서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는 그녀의 집에서 늦은 점심을 챙겨먹고 거리로 나왔다. 계동 주변은 월요일의 거리도 한산하지 않다. 붐비지는 않았지만 관광객의 발걸음이 있었고 그 또한 느릿하게 동네를 걸었다. 그는 대로를 건너 인사동으로 흘러들었다. 골동품과 잡화와 먹거리들이 즐비한 시장을 걷다가 그녀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졌다. 그는 다구와 차를 파는 작은 가게에 들러 그녀를 위한 찻잔과 커피를 대용할 다른 차를 찾았다. 이름 모를 다구들의 세계에서 그녀를 위한 것들을 고르기란 쉽지 않았다.

책들로 빼곡한 오래된 서점처럼 서로 얼굴 다른 찻잔과 차구들이 벽을 쌓고 있고 장향과 차향이 가득했다. 중년의 여주인이 손님인 그를 불렀다. 다구들 사이에 둘러싸인 여주인은 무슨 차를 좋아하냐고 묻더니 자기 앞에 펼쳐진 넓은 찻상 앞에 앉아 전기밥솥으로 차를 내릴 물을 데웠다. 여주인은 둥그런 다완에 찻잎을 넣고 익숙한 동작으로 물을 부었다. 물이 넘치고 찻잎이 풀어 지고 우려진 찻물이 다시 버려졌다. 물이 다시 채워지고 이번에는 자신의 작은 찻잔에 따뜻한 차가 담겼다. 처음에는 떫은맛이 혀끝에 닿았고 이어 단맛이 붙었다. 몸 안으로 따뜻한 차의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그는 몇 잔의 차를 얻어 마시고 다시 다완에 다른 종류의 차가 담기는 것을 보았다. 차가 내려가는 과정을 눈으로 배우고 차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녹차와 홍차와 우롱차와 보이차의 차이. 생차와 노차의 차이. 지역별로 향과 생김새를 달리하는 우롱차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차를 얻어 마시면서 그녀에게는 보이차가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그곳에서 비싸지 않은 보이차 한 편을 샀고 그녀가 좋아할 만한 찻잔을 찾아보았다. 차의 종류만큼이나 잔의 종류 또한 많았다. 서로 다른 생김새에 다른 빛깔을 하고 다른 개성을 자랑했다. 그는 한 귀퉁이 먼지 낀 다구들 너머에서 연한 살구색 개완과 비슷한 색의 작은 찻잔 두 개를 찾았다.

그날은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는 그릇이 치워진 테이블에 둥그런 차편과 다구들을 내놓았고 여자는 향 피우고 차 마시는 스스로의 꼴에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종이에 싸인 한 덩이의 보이차를 꺼내고 송곳으로 단단한 끄트머리를 쪼갰다. 그는 찻잎을 떼어내며 한 덩이로 1년은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찻 잎이 뭉쳐진 조각을 조그만 개완 그릇에 넣고 그는 그녀 앞에서 아까 배운 대략적인 다도법을 알려주면서 차를 내렸다. 잔 두 개가 따뜻해지고 뜨거운 차가 담겼다. 잠시의 즐거움이 있었고 잠시의 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차를 몇 번 우릴 무렵 사소한 다툼이 있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다툼이었지만 둘은 불편해졌다. 남자는 다음 달에 그 집에 가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가지 않았다.

2년여의 시간이 지난 뒤 그는 서울 출장 길에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인파가 술렁이는 홍대입구 전철역에서 지하철을 타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더 이상 사람 많은 자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둘은 커피를 마셨고 식사와 술을 함께했고 다시금 그녀의 집을 들렀다. 연희동의 창밖 풍경이 좋은 이층집이었다. 볕이 잘 들고 더이상의 하수구 냄새도 없고 샌들우드 향도 없었다. 그가 사다 준 커피잔은 그대로 있었고 그가 가지고 온 개완과 찻잔도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종이에 싸인 작은 보이차 조각을 꺼냈다. 아껴 마시다 보니 아직 남은 차가 있다고 했다. 둥글고 큰 차편을 담았던 종이에 처음 떼어냈던 보이차 조각만큼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조각이 개완으로 들어갔다. 개완에 뜨거운 물이 넘쳤고 그녀는 그를 위해 익숙한 동작으로 차를 내렸다.

김종관은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 단편 영화로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서 입상했으며 장편영화로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있다. 저서로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이 있다.

소슬다원
인사동길에 위치해 있고 다양한 다구와 차를 파는 가게다. 여러 가지 가격대와 모양새의 다구들은 물론 보이차, 우롱차 등 많은 종류의 차들도 갖추고 있다. 오고 가는 조용한 손님들을 위해 좋은 차를 내주는 인심이 후한 가게다.

이 기사도 읽어보세요
제철 음식을 찾아서 @고성 대문어 동해에서만 어획되는 고성 대문어를 찾아서. 겨울철 고성 대문어 고성은 겨울철 미식 여행을 즐기는 선수들이 문어를 맛보려 쉬쉬하며 찾는 곳.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문어를 크게 분류하면 전 연안에 서식하는 ...
이한철의 취향이 담긴 레스토랑 홍대에 위치한 프랑스 가정식집에 갔다. 그곳은 마치 이한철의 취향이 담긴 집 같았다. edit 문은정 — photograph 한정수 https://www.facebook.com/OliveMagazineKo...
발품 팔아 찾은 맛집 한식부터 시작해 일식, 프렌치, 그리고 퓨전 양식까지.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레스토랑이 속속 오픈했다.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새로운 레스토랑들. 두레유 유현수 셰프의 독창적인 한식 파인다이닝 이십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