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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실체 @정재훈

2015년 11월 11일 — 0

MSG 덩어리로 취급받는 라면의 본모습을 간단한 실험과 함께 제대로 파헤쳐보았다.

text 정재훈 — edit 권민지 — photograph 심윤석

© 심윤석
© 심윤석

라면에는 당당함이 없다. 인기 TV 프로그램 <수요미식회>에 등장한 짜장면은 당당했다. 마포 모처의 중국음식점에서 만드는 그 짜장면 면발은 화면으로 봐도 하얗다. 반죽에 소다를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맛이 조금 떨어질지언정 첨가물을 넣지 않았다는 짜장면은 <수요미식회>패널 중 한 명을 울릴 정도로 감동시켰다. 그렇다. 보통 짜장면 반죽에는 염기성의 소다가 들어간다. 라면 포장 뒷면에서 늘 찾을 수 있는 면류첨가알칼리제도 같은 부류다. 이들 첨가제는 밀가루 속에 숨은 천연 색소와 반응해 노란색을 도드라지게 하고, 글루텐의 점탄성을 높여 면발을 탱탱하게 해주며, 알칼리 밀면 특유의 독특한 풍미를 더해준다. 라면이 입 속으로 후루룩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도 알칼리 처리한 면발 덕분이다. 인체의 지방산과 면발의 염기 성분이 만나 일종의 비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맛있지만, 첨가제를 넣은 것은 분명하다. 라면의 어깨가 축 처지는 소리가 들린다.

스프는 라면을 더 움츠러들게 한다. 감칠맛 조미료의 대명사, MSG(L-글루타민산나트륨)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포장지 앞면에 당당하게 MSG를 자랑하는 라면은 마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향미증진제가 들어 있는지 확인하려면 뒷면의 깨알 같은 성분 표시를 읽어 봐야 한다. 하지만 원재료의 목록 어디를 봐도 L-글루타민산나트륨을 찾기 어렵다. 양념조미분말부터 불고기맛 분말까지, 나열된 28가지 스프 성분 가운데 MSG는 없다. 정말 MSG가 빠진 건 아니다. 작년 12월 한국소비자원에서 소비자 선호도가 높은 라면 12개 제품을 대상으로 성분을 조사한 결과 MSG는 모든 제품에서 발견되었다. 다만 그 양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내가 즐겨 먹는 라면 한 봉지에는 MSG가 고작 59mg 들어 있었다. 포도주스 한 잔에 들어 있는 글루타민산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적은 양이다. 포도주스 한 잔에 들어있는 만큼의 글루타민산을 라면으로 섭취하려면 스프만 무려 11봉지를 넣어 먹어야 한다.

요즘 라면 스프의 MSG 함량이 이렇게 적은 이유는 MSG를 직접 넣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식물성 단백가수분해물(HVP)을 넣는다. 단백질 자체는 맛이 없다. 숙성과 발효를 통해 단백질 일부가 아미노산으로 잘게 쪼개져야 풍미가 만들어진다. HVP는 그런 원리를 이용해서, 탈지대두, 밀글루텐, 옥수수글루텐 등의 단백질 원료를 산으로 분해해 얻은 아미노산 조미료이다. HVP는 글루타민산에 더해 다른 아미노산과 펩타이드가 섞여 있어 순수한 MSG보다 더 복합적인 풍미를 낸다. 그래도 맛은 비슷하다. 감칠맛을 강화하기 위한 조력자로 투입된 핵산 조미료 덕택이다. 핵산 조미료가 MSG와 함께 섞이면 감칠맛은 원래의 수십 배 이상으로 상승한다.

맛이 비슷하긴 한데, 똑같진 않다. 나트륨 저감화 정책에 맞춰 나트륨 함량을 줄였다는데 이상하게 더 짜고 맛은 떨어지는 느낌이다. 인터넷 여기저기에도 비슷한 의견이 많다. “맛이 없어졌다” “짜기만 하다” “예전 그 맛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라면에 대한 냉엄한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근거 있는 의심일까? 우리의 입맛이 변한 건 아닐까? 직접 실험해보기로 했다.

라면 한 개에 스프 하나를 넣고 뒷면 조리법에 따라 끓인 다음, 두 그릇에 나눴다. 한쪽에는 MSG를 아주 조금 추가하고, 다른 쪽은 그대로 두었다. 한쪽을 맛보고, 물로 입안을 가볍게 헹구고 다시 다른 쪽을 맛봤다. 순서를 바꿔 다시 한 번 양쪽을 맛봤다. 결과는 놀라웠다. 소량의 MSG를, 이미 MSG와 핵산 조미료가 들어 있는 라면 국물에 투하 했을 뿐인데도, 맛의 변화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쓴맛과 짠맛은 부드러워졌고, 단맛은 살아났으며, 서로 어긋나는 듯했던 풍미는 명지휘자를 만난 오케스트라처럼 밸런스가 맞춰졌다. MSG 양의 작은 차이가 만들어낸 맛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론상으로 MSG를 적게 써도, 핵산 조미료를 넣어서 감칠맛을 동일하게 만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핵산 조미료가 글루타민산과 함께 혀의 감칠맛 수용체에 작용하고 상승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9년 일본과 스페인의 과학자들은 오직 글루타민산만 작용하는 미각수용체가 존재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핵산으로 메울 수 없는 MSG만의 맛이 있을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만으로 MSG를 적게 넣고, 핵산 조미료를 많이 넣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 수는 없다. 하지만 MSG를 적게 넣었기 때문에 맛이 변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라면 맛이 변했다고 느끼는 면식수행자라면 스프에 MSG를 아주 조금 더 넣어서 맛보는 간단한 실험을 해볼 것을 권한다.

첨가제 때문에 라면이 주눅 들 필요가 있을까? 첨가제를 넣지 않았다는 짜장면이 어느 시대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당당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면을 알칼리로 가공한 것은 무척 오래된 일이다. 알칼리 면은 중국 밀면의 전통 가운데 하나다. 일찍이 당나라 시대에 잿물이나 함수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고, 명나라 때는 반죽에 간수를 넣은 노란색 면이 탄생해 주변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다. ‘알칼리 처리를 한 라면 면발’은 알고 보면 뼈대 있는 집안의 자식이다.

‘알칼리’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킬 필요도 없다. 염기 성분으로 먹거리를 가공하는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발견되는 오래된 전통이다.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음식에 알칼리제를 사용했다. 그들은 염기성이 강한 석회수 또는 잿물에 옥수수를 담근 다음 반죽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면류첨가알칼리제가 라면 반죽에 탄력과 풍미를 더해주는 것처럼, 잿물 속의 염기 성분을 이용해서 옥수수 반죽에 부드러운 질감과 맛을 더했던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알칼리 처리가 영양 면에서도 유익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게 되면 비타민 B3로 불리는 나이아신 섭취가 모자라기 쉬운데, 잿물의 강한 염기 성분은 옥수수 세포벽에 단단히 잡혀 있는 나이아신을 풀어주어 비타민B3 결핍증인 펠라그라를 예방해준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처음 옥수수를 잿물에 담근 이유는 오늘날 라면을 즐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영양학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풍미가 좋은 토르티야를 만들고 싶었고 알칼리성 잿물로 옥수수를 가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영양상 유익은 덤이었다.

영양학을 모르던 시대 사람들은 솔직했다. 맛을 따라갔고, 영양은 따라왔다. 라면의 MSG와 노란색 면발을 부끄러워하는 요즘 사람들은 다르다. 음식이 맛있으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첨가제를 넣지 않았다면 맛이 없어도 감동한다. 맛있다는 뇌의 생각이 우선시되고, 혀는 무시당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감칠맛을 배운다. 모유에는 우유의 열 배나 되는 유리 글루타민산이 들어 있다. 풀을 먹는 소에게 감칠맛은 별 의미가 없지만, 고기의 영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맛이기 때문이다. 엄마 젖을 빨면서 배우는 감칠맛은 숙성된 고기의 맛, 발효와 요리를 거친 단백질의 맛이다. 설탕이 인간 본연의 단맛에 대한 선호를 보여준다면 MSG는 인간 본연의 요리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에 마트에 가면 L-글루타민산나트륨을 넣었다고 당당하게 표시한 라면을 보고 싶다. 라면은 그래도 된다.


정재훈
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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