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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최낙언

2015년 11월 6일 — 0

식품 회사 연구소에서 27년째 근무하고 있지만 미식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맛을 이해해갈수록 맛에 대한 질문이 늘어갔다.

text 최낙언

어린 시절 살던 마을 옆으로는 강이 흐르고, 뒤에는 산과 밭, 앞에는 넓은 신간지, 그리고 그 너머에 순천만이 펼쳐져 있었다. 먹거리는 정말 풍성했다. 요즘 진미로 꼽히는 꼬막, 갈치, 짱뚱어, 장어, 세발낙지 등도 아주 흔한 식재료였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주는 대로 먹는 편이었고 맛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식품 회사에 취직해서도 제품 개발을 할 때 가장 보편적인 소비자 입맛에 맞추는 것이 중요했지 내 입맛에 맞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더구나 식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맛이라, 모두가 맛있는 제품 개발을 위해 열심히 시제품을 만들고 소비자 평가를 했지만 성공률은 5%를 넘기 힘들었다. 수많은 실험과 조사를 통해 개발된 제품은 시장에서 차갑게 외면당하는 반면 급조된 개발품은 잘 팔리는 경우도 많았다. 맛이란 참으로 알쏭달쏭한 것이었다.

향료 회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식품을 개발자가 아닌 소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음료, 유제품, 과자, 아이스크림, 가공식품 등 신제품을 죄다 구입해 여러 연구원과 함께 시식 및 평가를 했다. 아이스크림 개발팀에서 근무한 이래 아이스크림만 5000종 이상, 나머지 식품도 그 이상 먹어본 것이다. 그야말로 10년 넘게 맛은 나에게 무심한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썼다. 원래는 풍미(Flavor)에 대한 오해가 많아 그것을 풀어보겠다고 쓴 것인데 마지막 단계에서 책 제목이 그렇게 정해졌다. 그 바람에 나의 맛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올해 “맛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답변을 정리해 <맛의 원리>를 출간하게 되었다. 여러 가지 맛의 이론 중에서 내가 그동안 관찰했던 맛의 현상과 일치하는 이론을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마땅한 이론이 없는 것은 그 의미를 찾아 나름의 이론을 제시했다. 맛에 별 흥미없던 내가 맛에 대한 책을 계속 쓰게 되는 배경에는 예전에 여러 신제품의 흥망성쇠를 관찰하면서 느꼈던 의문이 하나하나 풀려가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맛에는 그다지 과학적 원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부해보니 과학으로 설명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재미있었다. 한동안 나에게 맛은 질문이었는데 문제는 그사이 질문이 더 늘어나버렸다는 것이다.

식품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이고 맛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요즘 내가 맛과 관련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욕망, 쾌락 그리고 예술의 원리다. 매슬로의 욕망 이론에 따르면 1단계는 식욕, 성욕, 수면욕 같은 생리적 욕구이고, 2단계는 안전의 욕구, 3단계로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 4단계가 존중의 욕구 그리고 마지막은 자아실현의 욕구다. 그런데 맛에는 이런 모든 욕구가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맛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인간 현상의 내면을 들여다 보기에 가장 좋은 창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들은 식욕과 같은 생리적 욕구를 가장 낮은 단계의 욕구로 보고 자아실현과 같은 욕망을 가장 차원 높은 욕망으로 보지만 최근에는 정반대로 뒤집어도 맞다는 주장도 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성취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항상 즐겁게 식사하면서 정을 나눌 수 있는 것보다 대단한 성취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식사라는 경험을 통해 얻게 되는 모든 행복감이 미식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은 그 즐거움을 방해하는 이상한 훈계와 간섭이 너무 많다. 세상의 어떠한 동물도 영양학의 도움을 받으며 먹지 않고, 어른이 되어서도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훈계를 받지 않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제 먹을 것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취향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술의 효능이 술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마시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듯이 미식의 의미도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니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지고 자신에게 충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최낙언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1988년부터 식품 회사 시아스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식품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너무 많아 2009년부터 홈페이지(www.seehint.com)를 통해 여러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고, 2012년부터 <불량지식이 내 몸을 망친다> <맛이란 무엇인가> <진짜 식품첨가물 이야기> <감칠맛과 MSG 이야기> <감각 착각 환각> <맛의 원리> 등을 발간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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