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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ing

하와이 카레 @김종관

2015년 9월 17일 — 0

그녀는 식당에서 나와 나지막이 혼잣말로 인사를 했다. 알로하.
그녀의 가족들에게. 그의 가족들에게. 휴가를 떠나는 모든 가족들에게. 모두 알로하.

text photograph 김종관

©김종관
하와이 카레, 경복궁역 근처 체부동 골목에 위치해 있다. 카레라이스와 카레우동, 알로하 비프라이스 등이 주메뉴다. 작고 젊고 활기 있고 감각적인 레스토랑이다. ©김종관

출근길, 그녀는 외대앞역 승강장에 들어서자마자 멈춰진 전철을 보았다. 전동차는 출발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전동차에 타지 않고 웅성거렸다. 사람들 사이로 문 열린 객차 안이 슬쩍 보였는데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누운 어느 남자의 양복바지와 구두였다. 사람들은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역무원이 달려와 누워 있는 남자의 의식을 확인했다. 50대 중반가량의 남자가 희미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한 채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역무원은 남자의 혁대를 풀어주었지만 남자는 숨 쉬는 것을 힘들어 했다. 의식을 잡지 못하는 불안정한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남자의 눈에서 생이 미끄러지는 것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이내 구급대원들의 들것이 왔고 의식을 잃어가는 남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벗어났다.
그녀는 전동차 문 앞에서 잠깐 망설였지만 객차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의 흐름 속에 전철을 탔다. 그녀는 방금 그 남자가 누워 있던 자리에 섰다. 객차 안 모든 이들이 방금 전의 일을 기억했다. 그녀는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후 회기역에 전철이 섰고 많은 사람이 내렸고 많은 사람이 탔다. 전철 안으로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그녀가 있던 자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전동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둠 속 창 너머로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구역질을 하듯 슬픔이 쏟아졌다. 그녀는 출근길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회사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있었다. 증권 회사를 다니다 리서치 회사로 이직한 것이 벌써 3년째다. 그녀는 입사한 해에 같은 회사의 대리를 좋아했다. 대리 또한 그녀에게 호감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리는 처가 있었다. 대리는 얼마 전 과장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전 과장이 된 그와 잠자리를 가졌다. 피곤한 연애임을 알았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둘은 종종 동료들의 눈을 피해 점심을 먹었다. 남자는 카카오톡으로 여자에게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물었다.

— 기분 좋아지는 음식이오.

점심 시간, 직장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여자는 동료들이 향하는 시내 방향과 다른 쪽으로 향했다. 경복궁역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과장도 옆에 있었다. 인파들 속에 거리를 둔 채, 별말 없이 거리를 보고 있었다. 폭염으로 달궈진 도로를 허우적거리며 넘어섰다. 횡단보도를 지나자 남자는 여자의 곁에 붙었다. 번화가를 벗어났을 때 둘은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남자는 길을 걸으며 주변의 식당을 살폈고 여자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남자의 옆얼굴을 보았다.
둘은 카레집에 들렀다. 카레집은 작았지만 산뜻한 붉은색으로 채워져 있었고 활기 넘치는 음악이 있었다. 그들은 창가 테이블에 붙어 앉았고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는 동네 골목과 작은 가게들을 보았다. 해는 뜨겁고 사람들은 여전히 느렸다.

— 카레가 좀. 기분 좋아지는 음식 아닌가?

둘은 카레라이스를 시켰고 기다리면서 몇 가지 대화를 했다. 휴가로 자리를 비운 동료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는 자연스레 남자의 휴가 계획이 궁금했다. 아무래도 가족과 함께하겠지만.
한 무리의 젊은 여자들이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뒤따라 중년 남자 한 명이 들어왔지만 가게 안의 모든 자리들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남자는 가게 앞에 줄 세워진 작은 대기석에 앉았다. 대기석은 카레집의 전면창과 붙어 있어, 그들이 앉은 자리 바로 앞에 있는 셈이었다. 남자는 유리창 너머 폭염의 세계에 있었다. 유리에 등을 기대고 쉬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목덜미로 땀이 흘렀다. 전철 안에서 쓰러져 있던 남자의 희뿌연 눈빛이 떠올랐다. 여자는 스스럼없이 남자에게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오전에 그녀가 보았던 일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점심은 즐겁고 맛있게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카레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작은 테이블에서 저마다 즐겁게 식사를 했고 그들의 자리에도 카레가 나왔다. 진홍색의 번들거리는 나무 식탁 위에 카레가 보기 좋게 담긴 접시가 올려졌다. 카레와 밥이 있었고 밥 위에 동그란 폭을 유지한 채 납작하게 잘린 파인애플과 작은 달걀 프라이가 얹어져 있었다. 둘은 먹는 방법을 고민했다. 여자는 수저의 무딘 날로 파인애플을 잘랐다. 작은 조각에 프라이의 노른자를 바르고 카레를 적신 밥을 모아 입안에 넣었다. 매콤한 카레밥과 함께 아싹하니 파인애플이 씹혔다. 남자는 웃으며 그녀가 먹는 방식을 따라 했다.
“알로하” 냅킨에 하와이 인사가 써 있었다. 하와이 사람들이 실제로 카레를 즐기는지 궁금했다. 카레가 기분 좋은 음식이듯 그곳은 기분 좋은 날씨만 이어질 것 같았다. 막연한 휴가 계획을 떠올렸다. 비치 보이스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자리가 하나 비고 가게 바깥에서 대기하던 중년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테이블을 흘깃 보더니 그 또한 카레라이스를 시켰다.

그녀는 식당에서 나와 나지막이 혼잣말로 인사를 했다. 알로하. 그녀의 가족들에게. 그의 가족들에게. 휴가를 떠나는 모든 가족들에게. 모두 알로하. 오전에 보았던 그 남자, 입을 뻐끔거리며, 수많은 이들에 둘러싸여 수치심 속에서 생과 사 사이에 놓여 있던 그 남자에게도. 알. 로. 하.
여자와 남자는 폭염의 횡단보도에 다시 섰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들의 거리는 50센티미터 정도 더 멀어졌다. 그들은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마주 섰다. 그들은 서로 다른 루트를 이용해 자신의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웃으며 인사했다. 남자가 들을 수 있도록.

“알로하.”

김종관은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 단편영화로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서 입상했으며 장편영화로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있다. 저서로 <사라지고 있 습니까>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