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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k

미식의 의미 @조경란(소설가)

2015년 9월 14일 — 0

미식은 다음이 더욱 기대되고, 계절과 장소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한결같아야 하는 것도 있다. 바로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

text 조경란(소설가) — photograph 심윤석 — cook&styling 밀리 — assist 김미은

©심윤석
©심윤석

어느 한때는 머핀이나 쿠키 같은 퀵브레드에, 또 한때는 캉파뉴 같은 발효 빵에, 파스타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요리에, 각종 면류를 이용한 요리들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조카들과 도우부터 반죽해 집에서 피자를 만들어 먹고 스파게티도 해 먹고 바게트, 식빵, 캉파뉴 같은 빵들을 구워 먹고 있다. 화려하거나 완성도가 훌륭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담백하다.

여름 한 달을 도쿄 동생 집에서 보내고 있는 지 수년째다. 그곳에서 내가 즐겨 먹는 음식은 우동이나 소바. 종류는 다양하다. 쯔유에 찍어 먹을 수도 있고 국물과 함께 나오는 걸 시킬 수도 있고 붓가케처럼 부어 먹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사 먹기만 하다 지난여름부터 직접 냉우동, 사누키 우동을 만들어보게 되었다. 우동이나 소바는 면이 생명이라 면은 믿을 만한 데서 구매한다. 내가 만드는 것은 쯔유이며 여기에 고명으로 얹을 와카메(미역), 대파, 버섯 등을 준비한다. 올여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는 냉우동 제대로 만들기에 심취해 있었다면 올해는 사누키 우동이다. 얼마 전 도쿄에서 돌아온 지금도 마찬가지다.

동생 집 근처 지하철역 앞에 일본 말로 ‘안주와 우동’이라고 하는 거의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식당이 하나 있다. 늘 동네 사람들로 만원이라 서너 번 시도 끝에야 지난해 귀국 전날 간신히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분위기가 꼭 일본 드라마 <심야 식당>과 흡사해 나도 모르게 친밀감이 느껴지던. 다른 게 있다면 작은 탁자 네 개가 더 있다는 것, 영업은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오픈 시간에 맞춰 가도 벌써 대기 줄들이 늘어서 있다. 동생 말에 따르면 TV 맛집 취재도 거절했다지. 올여름 나는 확실히 그 식당의 단골이 돼버렸다. 맛? 소박하고 다정하다. 맛에 관해 이런 표현을 써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메뉴는 어딘가 모르게 사무라이 분위기를 풍기는 무뚝뚝한 주인장이 그날그날 만들어내는 ‘창작 요리’가 중심.

일단 생맥주와 냉우동, 혹은 날씨에 따라 온우동을 주문한다. 이 집 우동은 인기가 많아 쯔유가 일찍 떨어지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못 먹게 되는 날도 있으니까. 우동 한 그릇을 다 비우곤 이제 다시 시작한다. 명란소스 무샐러드, 사시미, 튀김두부, 꽈리고추, 옥수수튀김, 감자튀김, 가지구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우동 한 그릇. 맞은편에서 동생은 나 혼자서 우동 두 그릇과 그 음식들을 다 먹어치우는 것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저 까다롭고 빼빼 마른 언니가 웬일이래, 하는 얼굴로. 그 음식들을 먹는 동안, 혹은 일본인인 내 제부의 말대로 일본 사람한테는 라면보다 더 쳐주지 않는 그런 우동 한 그릇을 다른 곳에서 동생과 반주를 곁들여 천천히 먹는 동안, 우리는 이야기를 나눈다. 일 년 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와 감정들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이 그때 거기 다 있다. 우동 한 그릇, 맥주 한 잔, 그리고 자주 볼 수 없는 내 동생.

올해는 그 동생과 사누키 우동을 가장 자주 먹었다. 오늘 점심에 나는 도쿄에서 공수해온 재료들로 1인분의 우동을 만들었다. 동생과 같이 감탄하며 후루룩후루룩 먹던 맛은 아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모자라도 내년 여름 다시 동생과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맛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한테는 그런 것이 미식이다. 다음에 먹을 걸 기대하게 만들고 같이 먹을 사람이 있고 장소와 계절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는.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것도 있다. 내게 아무리 익숙해도, 가족과 친밀한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라면 ‘고독한 미식가’는 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래도 우동이나 빵 같은 건 혼자라도 괜찮다. 음, 그렇지 않은가.

조경란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불란서 안경원>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혀> <복어>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등 다수의 소설과 산문을 집필했다. 문학동네작가상, 현대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동인문학상, 고양행주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