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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ing

엔젤스 쉐어 @김종관

2015년 8월 13일 — 0

연남동 엔젤스 쉐어(Angel’s Share)는 ‘어쩌다 가게’ 점포 중 하나인 위스키 바다. 작고 아름다운 곳으로 다양한 위스키와 칵테일들이 구비되어 있다. 위스키를 좋은 잔과 좋은 얼음으로 즐길 수 있다. 한 사람당 세 잔까지만 술을 마실 수 있다.

text photograph 김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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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관

그들은 같은 술을 시켰다. 같은 잔에 같은 술이 같은 양으로 담겼다.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작은 위스키 잔에 글렌드로냑 1994 싱글 캐스트가 담겼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잔을 돌렸고 남자도 따라 했다. 그녀가 먼저 향을 마셨다. 둘은 건배를 했고 술잔을 입에 댔다.

– 이거야? 무슨 뜻이지?

남자는 갸우뚱하며 바에 몸을 기댔다.
그녀는 스트레이트가 처음부터 마시기 좋은 술은 아니라고 말했다. 향은 좋지만 처음부터 혀끝으로 즐길 수는 없는 술. 첫맛은 오로지 독하기만 했고 맛의 세밀함이 없었다고도 했다.

– 하지만 빨리 취했어. 독한 술이 뭔지 알았지. 지금은 좋은 향과 맛을 즐길 수 있지만 처음에는 몰랐어.
– 무슨 맛이 나는데?
– 독한 술은 천천히 즐기는 거야. 향을 맡고, 입안에 살짝 머금고, 마신 후에도 남은 향을 즐기고.

그녀는 남은 위스키를 입안에 털어 넣었고 그도 뒤따랐다. 그녀는 두 번째 술을 시켰다. 바텐더가 똑같은 모양의 두 잔을 준비했다. 얇은 언더록 글라스에 얼음이 가득 담겼다. 바텐더는 코냑과 칵테일용 리큐어를 꺼냈다. 잠시 후 커다랗고 둥근 얼음 위에 붉은 술이 천천히 흘렀다.

– 오우, 이건 이름이 뭐래?
– 프렌치 커넥션.
– 뻘겋고, 뭔가 실해 보이네. 그 사람은 정력적이었나 보다.

여자는 웃었다.

– 일단 마셔봐.

남자는 칵테일을 입에 댔다.

– 달다.
– 응. 여자들이 좋아하는 칵테일이야. 근데 난 별로.

남자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여자는 세 번째 술로 김렛을 시켰다. 바텐더는 셰이커에 재료와 얼음을 담았고, 그들은 잠시 바텐더의 손끝에서 보기 좋게 흔들리는 셰이커를 보았다. 셰이커에서 흘러나오는 술은 역시 똑같은 칵테일 글라스에 담겼다. 남자가 먼저 마셨다. 이어 여자가 따라 마셨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 어때?

남자는 시큰둥하게 좋다고 말했다.

– 그치? 적당히 달면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독하고 차가워. 진이랑 라임 주스가 들어가거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술이지.
– 글쎄, 내가 앞으로도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김렛은 왜?
– 김렛이 진 베이스잖아. 많이 마시면 머리 아픈 술이야. 김렛은 그리고 유부남이었어.

남자는 웃었다.

– 그래, 다음 술은 뭐래?
– 여기는 한 사람이 세 잔의 술밖에 시키지 못해. 그게 이곳 룰이래.

바텐더가 그들을 향해 슬쩍 미소 지었다.

– 사실 세 잔이면 충분하거든. 나는, 아쉽게도.
– 근데 왜 내가 위스키 스트레이트야? 술잔이 좀 작은 게 마음에 걸린다.

남자는 빈 위스키 잔을 물끄러미 보더니 코끝에 대고 킁킁댔다.

– 말린 과일 향인가….
– 거봐, 너도 소질이 있잖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 이게 나라는데, 좋아해야지.

남자는 하품을 했다.

– 세 잔 정도면 충분히 취하네. 더 이상은 못 마시겠다.

여자는 턱을 괴고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어린 뺨을 만졌다. 그녀의 뺨에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팔꿈치에 위스키 잔이 슬쩍 밀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글라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바텐더가 걸어 나와 조심스레 부서진 글라스를 치웠다. 여자는 고개를 들어 텅 빈 바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바텐더에게 사과했다.

– 취한 건 아닌데, 죄송해요.
– 네. 전혀 안 취하셨어요. 죄송할 것도 없고요. 가끔 있는 일입니다.

바텐더는 정중했다. 바텐더는 바 자리로 돌아와 위스키 잔을 하나 더 꺼냈다.

– 버번 종류예요. 한번 드셔보세요.

잔에 짙은 색깔의 버번위스키가 담겼다. 여자는 병의 라벨에 눈이 갔다.

– 15년산이네요.
– 네,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고 편안한 위스키예요. 좋아하실 거예요.
– 참 이상해요. 어제 꿈에 이 바가 나왔어요. 옛날 남자친구랑 이 바에 와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남자친구는 오래전 얼굴 그대로더군요. 15년 전 모습 그대로요.

여자는 바텐더가 내준 위스키를 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비어 있는 옆자리를 봤다. 자꾸만 옅어지는 기억 속에 그리운 하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여리고 마른 몸과 그의 숨결이, 이불 아래서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과 그의 목소리가. 그리움에 아직도 고통이 있다는 것에 슬펐지만 시간이 지났음에도 짙은 빛과 향을 내는 기억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말라비틀어졌음에도 아직도 달콤한 과육의 향기에 대해 생각했다.

잔은 다시 비워졌고, 그녀는 빈 잔을 킁킁거려본다.

김종관은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 단편영화로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서 입상했으며 장편영화로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있다. 저서로 <사라지고 있 습니까>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