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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김성윤

2015년 8월 10일 — 0

훌륭한 식사는 맛도 분위기도 아닌, 함께하는 사람으로 완성된다.

text 김성윤(조선일보 음식전문기자) / photograph 심윤석

© 심윤석

아내와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친한 후배에게 소개받아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고, 나는 그녀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그런데 밸런타인데이와 함께 연인들의 양대 명절이라는 크리스마스를 맞은 것이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당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던 프랑스 레스토랑을 어렵게 예약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오는데, 무슨 음식을 먹었으며 무슨 맛이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음식을 맛보고 그걸 글로 쓰는 게 내 직업이다. 맛은 어떤지, 서비스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따위를 항상 생각하면서 음식을 먹는다. 일을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먹고 만들기 즐기는 집에서 태어났다. 엄마가 차려준 밥이건 외식을 할 때건, 우리 가족은 항상 ‘스테이크를 너무 구웠네’ ‘찌개가 평소 엄마 솜씨가 아니네’ ‘냉면 면발이 영 아니네’라는 둥 음식을 평가하며 먹었다. 초등학교 때 쓴 그림일기를 보면 ‘오늘은 엄마가 돈가스를 만들어주셨다. 참 맛있었다’ 같은 음식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음식전문기자가 된 건 운명이구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식사 후 어떤 음식이었는지는 물론이고 어떤 맛이었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매우 큰 충격이었다. 그러면서 이걸 소설로 써보면 어떨까란 생각도 들었다. 어느 날, 미슐랭 가이드 평가원이나 식품연구소 연구원처럼 미각(味覺)으로 먹고사는 남자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사랑을 얻은 대신 미각을 잃는다. 남자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생존(生存)을 위해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생존의 수단인 미각을 포기하고 사랑을 얻을 것인가. 연애를 더 오래 했다면 단편소설이라도 하나 썼을 텐데,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5개월 만에 결혼하고 다시 4개월 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소설은커녕 회사 일과 육아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만큼 바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때 크리스마스의 식사로 깨달은 건, 미식(美食)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구와 함께 먹느냐’라는 것이다.

수많은 음식을 맛보았지만, 기억에 남을 정도로 훌륭했던 식사를 떠올리면 거기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먹었느냐가 추억으로 저장되어 있다. ‘누구와 언제 먹었던 어떤 음식’이지, 음식 하나만으로 남아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래서 나에게 미식 경험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면 첫 번째는 함께 식사하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기분이나 건강 상태 등 나의 컨디션, 그리고 세 번째는 음식점의 분위기와 서비스를 꼽겠다. 요리나 음식의 맛은 네 번째쯤이다.

우리 부부는 최근 외식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아들이 세 살이 되면서 장난이 너무 심해져 다른 손님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미안해 신경을 쓰다 보면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다. 아내와 연애할 때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요즘은 주말 식사를 집에서 아이를 돌보며 허겁지겁 먹는다. 아이가 먹다 뱉은 음식을 아무렇지 않게 집어 먹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 요리보다 더 맛있고 즐겁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이런 말을 진심으로 하게 될 줄은 전혀 상상 못했다. ‘자식은 낳아봐야 한다’던 엄마 말이 이제야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