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main

Dining

일일 一日

2015년 7월 16일 — 0

일일은 호젓한 누하동 길 건물 2층에 있는 술집이다. 재즈 넘버와 낮은 조도 아래서 창 너머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곳. 계절마다 변화하는 조용한 길을 내려다보는 재미가 있다. 벚꽃 피는 4월에는 창 너머 풍경이 절정을 이룬다. 위스키, 맥주, 간단한 칵테일을 즐길 수 있다.

text, photograph 김종관

0716-11

그에게 그럭저럭 혼자 취할 수 있는 술집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어느 날 벚꽃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 있는 누하동의 조용한 길을 걷다가 길 가운데 건물 2층에 위치한, 길쭉한 정면 창 너머 간판 없는 술집 내부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조도 아래 불분명한 형체의 사람들이 보였는데 누군가 트럼펫을 불고 있었다. 관객인 듯 손님인 듯 연주를 듣는 사람들이 보였다. 창밖에 서서 담배를 물고 창을 올려다보았다. 감출 데 없는 공간이지만 그처럼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이 들어가기에 비밀스러워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연주자와 관객들을 보았다. 담배 끝이 필터에 닿았고 아까 마신 술의 취기가 뒤늦게 올랐다. 그는 용기가 생겼다. 낯선 술집의 문을 열고 대여섯 명의 관객 사이로 들어가 눈앞에서 트럼펫 연주자의 연주를 즐겼다.
이후 그는 종종 그 술집을 찾았다. 일일一日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 술집의 검은 철문 옆에는 간결한 폰트의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가 다음에 들렀을 때는 연주자도 없었고 관객도 없었다. 몇 명의 손님만 있었다. 그곳은 항상 재즈 넘버가 흘렀고 들쑥날쑥하게 오가는 손님들 탓에 잠시 동안의 소란과 정적이 반복됐다. 그는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바 테이블을 좋아했다. 창가에 앉아 거리에 시선을 두고 위스키 한두 잔을 마셨다.
두어 주에 한 번씩 들르게 되면서 어떤 단골이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늦은 시간이면 우르르 몰려오는 프랑스 남자들 일행이 있었고 그처럼 혼자 술을 마시는 영화감독도 있었다. 그 바를 들락거리게 되고 나서 머지않아 젊은 사장과 간단한 안부도 묻게 됐다. 그와 사장은 그럭저럭 친했는데 그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사장이 옆에 앉아 간단히 동네 정세를 이야기해주고는 했다. 길 건너 국숫집 주인이 건물주랑 어떻게 싸워 가게를 내놓게 됐는지, 길고양이가 언제 어미를 잃었는지, 피자를 배달하는 사람의 행동거지가 어떤지, 누하동 어느 건물 아들이 무슨 사고를 쳤는지 등등. 그는 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인에게 들어 사연을 아는 사람들도 생겼고 그냥 스쳐 지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그는 당연한 듯 술집을 찾았다. 손님이 없었고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이 흘렀다. 얼음과 제임슨 위스키를 잔에 담았다. 익숙한 스코어가 지나고 막 비가 개인 시원한 여름 길을 내려다볼 때 골목 끝에서 한 여자가 바를 올려다보는 것을 보았다. 그가 처음 담배를 물고 술집을 올려다보던 그 자리였다. 맵시 있게 몸에 붙는 진을 입고 젖은 머리를 올리며 창 쪽으로 고개를 올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마치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시에 빠졌다. 그녀 또한 담배를 물었고 담배가 태워지자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그 옆에 앉아 김렛을 시켰다. 그렇게 그와 그녀는 같은 길을 내려다보았다.
창밖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보였고 마을버스가 지나갔다. 잠시 후 그들 아래 한적한 길 사이로 취한 세 사람이 지나갔다. 휘청이며 걷는 두 남자와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더벅머리에 키가 작고 커다란 가방을 멘 남자의 얼굴이 유독 일그러져 있었다. 그 무거운 공기가 그들을 계속 관찰하게 했다. 셋은 금세 거리에서 사라졌고 한참 빈 거리로 남아 있다가 다시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가로수 그림자 안에 가만히 서서 몸을 움츠렸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일행 중 한 남자가 돌아왔다. 일그러진 얼굴의 더벅머리 남자만 보이지 않았다. 둘은 무표정하게 서로 얼굴을 보더니 돌아온 길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여름의 젖은 길을 느릿하게 걸었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기 전 ‘큭’ 하며 웃음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던 여자가 쓸쓸한 삼각관계에 웃음을 터트린 듯했다. 그와 그녀는 서로 같은 비밀을 훔쳐본 듯 머쓱한 미소를 나눴다. 그들은 계속해서 거리를 보았다. 새끼 고양이가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건넜고 쓰레기차가 지나갔다. 신문을 가득 실은 트럭이 서고 남자 몇 명이 배달소에서 나와 부지런히 신문 뭉치를 옮겼다. 잔을 비운 여자가 일어났고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다시 혼자 남은 바에서 그는 두 번째 잔으로 그녀가 마시던 김렛을 시켰다. 라임 섞인 달고 독한 술이 혀끝에 닿았다. 잔을 넘기기 전 창 너머로 다시 비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우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좁은 계단을 통해 술집에서 내려와 거리를 걸었다. 자정이 넘은 거리엔 인적이 없었다. 그는 철물소 간판 아래서 발길을 멈췄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 담배를 피우던 여자가 웃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자신도 김렛을 한 잔 마셨다고 이야기해줬다.
그녀는 그의 우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잠시 동안 거리를 둘러싼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수히 많은 검은 창이 있었다. 그와 그녀는 그 검은 눈들을 피해 우산 안으로 들어갔고 함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김종관은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 단편영화로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서 입상했으며 장편영화로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있다. 저서로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