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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ing

킬리뱅뱅

2015년 6월 19일 — 0

킬리뱅뱅은 경복궁역 근처 먹거리 골목인 금천시장의 새로운 명소다. 인테리어가 감각 있고 캐주얼하며 흥을 돋우는 음악과 괜찮은 리스트의 술이 있다. 활기 넘치는 분위기 덕에 다양한 사람이 몰려들고 있다.

글,사진 김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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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꼭 결혼하자. 다음 생애에. 그리고 이번 생은 각자 가는 걸로.
– 치사하다. 그럼 잠이라도 계속 자요, 누나.
– 잠은 자야지. 각자 알아서.

바의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너무 속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시차를 두고 고개를 돌려보니 얼굴 벌건 남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고, 남자보다 어려 보이는 누나는 닭다리로 만든 바비큐를 맛있다며 뜯어먹고 있었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려 우리 테이블에 집중했다.

– 여기 마음에 드세요?
– 네. 괜찮은데요.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우리도 옆 커플처럼 서로 각자 가고 있었다. 뒤쪽 테이블에서는 남자 셋이서 그날 오전에 있었던 파퀴아오와 메이웨더가 벌인 세기의 복싱 대전에 대해 떠들어댔다. 복싱에 별 관심 없던 나도 그 경기를 보았다. 공격적인 복서 파퀴아오는 계속 파고들 틈을 노렸지만 메이웨더의 철저하고 세기적인 방어가 경기를 재미없게 만들었다. 그녀와 나 사이도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경기와 다름없었다. 카페에서의 첫 만남부터 저녁 식사와 술자리까지 나는 짧고 지속적인 공격을 이어갔지만 메이웨더의 철저한 방어에 막혔다. ‘네’ ‘아니오’ ‘괜찮아요’와 같은 단답형 디펜스. 괜찮은 날이 될 리 없는 하루가 가고 있었다.
평소 소개팅에 대한 욕구가 전혀 없었음에도 주선자에 대한 미안함과 일말의 기대감으로 소개팅을 했고, 결국 그 지루하고 기분 나쁜 과정을 이어가고 만 것이다.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다. 그녀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몇십 분 만에 알았기 때문에 나 또한 흥미가 사라졌다. 형식적인 예의가 3차 자리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그녀도 나만큼 우유부단한 면모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감이 모두 사라진 2차 식사 자리 이후 각자의 길로 돌아서기 전 이 술집을 발견했다.

– 괜찮아 보이는데 한잔하실래요?
– 네.
예의로 시작한 말에 희망 없는 연장전이 이어졌다.

테이블 위에 술과 안주가 놓였다. 바삭한 튀김 요리 한 접시와 두툼한 글라스에 가득 담긴 골드에일 맥주였다. 체부동의 낡은 먹거리 시장과 어울리지 않는 젊은 펍에서 우리는 술을 한잔했고 그녀가 처음으로 묻지 않은 말을 했다.

– 술이 맛있네요. 다른 것도 마셔볼까요?

이번에는 삼페인을 시켰다. 미니 사이즈의 샴페인에 빨대가 꽂혀 나왔다. 술 몇 모금을 마시니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함께 튀긴 가지 요리를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벼운 하늘색 재킷을 벗었다. 시원한 상의 덕에 그녀의 매끈한 어깨가 드러났고 난 주방의 열기 때문인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비좁은 바 테이블 위에 몸을 붙이고 우리는 매우 가까이 있었다. 영문 모를 땀이 뺨과 턱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오른손으로 냅킨을 쥔 채 내 왼뺨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아줬다.

– 술을 좋아하시나 봐요?
– 네.

그녀는 여전히 단답형을 선호했지만 어찌되었든 내 땀을 닦아주지 않았는가. 주방 냉장고 위의 마샬 스피커에서는 마빈 게이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옆 테이블의 동생과 누나는 서로 얼굴을 부비고 있었다.

– 위스키도 좋아하세요?

그녀가 한 말이다. 과묵한 여자는 취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우리는 아일레이 위스키를 잔술로 따라 마셨고 마지막으로 스케어디켓이라는 호주산 와인을 시켰다. 나는 번들거리는 그녀의 어깨 위 머리카락 한 올을 떼어주었다. 그녀의 흐트러진 눈이 처음으로 웃었다.

– 귀엽네요.

이것 또한 과묵한 그녀가 한 말이다. 괜찮은 하루가 눈앞에 있었다. 와인은 맛이 있었고 괜찮은 앞으로의 나날들 또한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말수는 없지만 그녀는 미소를 짓기 시작했고 스킨십에 넉넉했다. 혹 나날을 가질 수 없더라도 오늘이 잘 흘러갈 것은 분명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소주를 네 잔 마시고 응급실에 실려 갔던 나의 경력이다. 그 이후로 술을 두 잔 이상 마신 적이 없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고 이제 10년이 지났으니 체질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와인 잔은 금세 비워졌고 내 잔 또한 최선을 다해 균형을 맞췄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녀의 미소와 건배를 했다. 마빈 게이의 노래가 술집 안을 뱅뱅 도는 와중에 갑자기 그녀의 미소가 공중으로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눈앞으로 바 테이블도 솟구쳤고 땅바닥도 솟구쳤다. 놀란 그녀가 테이블 아래로 내려와 바닥에 쓰러진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슬로 모션으로 흘렀고 그녀의 입김에서는 달콤한 와인 향이 풍겼다. 안타깝게도 나의 의식은 꿈결로 잠겼다.
그날 난 장렬하게 전사했다. 패배했지만 에이웨더의 경기처럼 재미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난 의식이 잠기기 전, 조용한 여자와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다음 생이 있기를 바랐다.

김종관은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 단편영화로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서 입상했으며 장편영화로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있다. 저서로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