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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ing

두오모

2015년 5월 21일 — 0

효자동 골목에 자리한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 두오모. 아늑한 불빛과 온기를 품고 사람들을 조용한 골목으로 불러들인다. 좋은 재료와 정성이 깃든 음식을 만날 수 있다.

글,사진 김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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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곳에서 첫 번째 약속을 잡은 날은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3월이었지만 조금 쌀쌀한 날이었습니다. 창가의 좋은 자리로 안내받았고 반듯한 의자에 앉아 비오는 거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물이 담긴 조그만 유리잔이 테이블 위에 놓이더군요. 따뜻한 물 한 잔에 겨울이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메뉴는 당신이 오면 정하겠다고 했어요. 창 너머를 보다가 창에 비친 나를 발견했습니다. 옅은 반사에도 옷의 화려한 무늬는 드러났습니다. 다행히 얼굴이 비치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입은 화려한 원피스가 부끄러웠습니다. 물잔 위에 머무르며 천천히 기화되는 작은 안개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제가 앉아 있는 곳을 둘러보았지요. 제 앞에는 커다란 책장이 있었습니다. 바와 테이블과 의자와 책장이 같은 빛깔과 반듯한 모양새로 저마다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 테이블 위에는 길쭉한 유리병 안에 이른 봄꽃이 꽂혀 있었습니다. 주방의 요리사들은 분주했고 올리브유 냄새가 식당 안을 메웠습니다. 잠시 후 우산과 외투를 털어대며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가장 큰 테이블을 차지했고 뒤따라 점잖은 노인 커플과 젊은 커플이 들어왔어요. 사람들은 저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아쉽게도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이 많이 미안해할 것을 알기에, 또 미리 좋은 자리를 예약해둔 배려를 알았기에 밉지만은 않았어요. 대신 가장 좋은 테이블에 한 시간 넘게 앉아 있었고,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게 일하는 분들께 미안했습니다. 그래도 서빙을 하는 아가씨는 끝까지 상냥했어요. 짙은 회색 에이프런을 두른 아가씨가 유리잔에 세 번째로 물을 채워줄 때, 일행이 오지 않았다고 말한 뒤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제가 그곳을 나설 때는 날이 개었기 때문에 가지고 온 우산은 잊고 챙기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그곳을 찾은 날은 봄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벚꽃은 만개했고 목련은 절정이 지난 때였습니다. 거리의 꽃집에는 허브들이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꽃집에 먼저 들러 몇 가지 화초를 구경했어요. 이번에는 내가 약속 시간을 약간 넘길 생각이었어요. 식당에 들어서자 벌써 그곳의 냄새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끝에 남아 있던 바질 향기가 식당 안에 이미 머물고 있더군요. 이번에도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저는 전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물잔이 두 번 채워졌고 상냥했던 아가씨는 물 대신 화이트 와인을 주었습니다. 저는 가볍게 사양했지만 아가씨의 미소에 두 번의 사양은 결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저마다 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봄옷을 입은 아가씨들이 있었고 파스타를 들이마시는 튼튼한 남자들도 있었습니다. 굉장히 잘생긴 유럽 남자 둘이 파스타를 먹고 있기도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당신에 대한 야속한 마음에 몇 번 눈길을 주었습니다. 시간은 어찌나 빨리 가는지, 전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무던하고 상냥한 그 아가씨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었어요. 와인 값을 지불하고 싶었지만 한사코 거절하더군요.

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5월이고 골목마다 향기가 가득했으니 완연한 봄이라 할까요. 저는 세 번째로 효자동을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해가 지고 나서였지요. 그래서 다른 손님들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할 수밖에 없었어요. 바에 앉아 조용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물론 당신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약자 이름은 당신이었지만 이번에는 예약을 제가 했으니까요. 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병을 보았습니다. 꽃병에는 국화 한 다발이 꽂혀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곳에 대해 몇 번 이야기했어요. 항상 같이 오고 싶어 했지요. 당신이 예약을 해놓은 날,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사실 당신이 청혼할까봐 겁이 났거든요.

며칠이 지나고 당신은 짧은 투병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눈이 안좋다고 했는데 염증이 곧 머릿속으로 들어갔다고 했지요. 갑작스런 입원에 놀라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당신은 큰 몸을 침대 위에 누인 채 생글생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어요. 나이 먹고 연애하자니 염치없는 일만 생긴다며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당신 옆에 있어주고 싶었지만 장성한 당신 자제들 눈치에 슬며시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어요. 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비 오는 창밖을 내다봤어요. 다음 날 당신의 임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영정사진에 국화 한 송이를 놓았습니다.

조용히 앉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일과의 마지막을 천천히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요. 메뉴판을 펼쳤습니다. 파스타를 하나 시켰고 전에 마신 와인도 한 잔 시켰어요. 곧 와인과 식전 빵이 나왔습니다. 부드러운 빵에 페스토를 적셔 화이트 와인과 같이 먹었습니다. 부드러운 인상의 여주인이 단아한 회색 접시에 샐러드를 내왔습니다. 저는 샐러드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치커리와 적상추 등이 담백한 드레싱에 적셔 나왔습니다. 적당히 달콤했고 작은 견과류 조각들이 샐러드 사이에서 기분 좋게 씹혔습니다. 당신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고상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여사장님의 부드러운 분위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묻고 싶네요. 샐러드 그릇이 비자 본식이 나오더군요. 초록으로 버무린 루콜라 파스타였습니다. 루콜라와 페스토가 면을 초록색으로 물들였습니다. 5월의 기운과 맞닿아 있더군요. 온갖 초록색인 것들이 가장 좋은 향기를 머금고 있는 때요. 따뜻한 면이 혀 끝에 닿을 때도 향기는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이곳에서의 청혼은 그리 나쁜 작전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우리는 부부가 아니었지만 당신은 나 혼자서 밥을 먹게 하지 않았어요. 먹성 좋은 당신 덕에 우리의 연애는 먹는 즐거움으로 채워졌습니다. 이곳에서의 식사는 당신이 떠난 후 나의 첫 외식이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먹지는 못한 곳이고 어려운 각오로 세 번을 찾고서야 처음 식사를 한 식당이지만, 계절이 한 번 지나기 전 저는 당신 없는 외식을 이곳에서 할 수 있었어요. 자주 와볼 생각입니다. 그럴 수 있을거 같아요. 어느 때는 혼자일테고 어느 때는 친구와 함께, 또 어느 때는 당신이 질투할 만한 사람과 함께일 수도 있겠지요. 당신이 소개해준 곳이니 가급적 남자는 삼가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음식을 다 먹으니 송구스럽게도 제가 마지막 손님이 되었습니다. 나이가 민폐인지 송구할 날이 끝이 없는 거 같아요. 버젓한 날씨였는데 난데없는 비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큰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곳을 나서기 전 주인이 저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거든요. 지난번에 두고 간 우산이 여기 있다고요. 놓치고 간 것들이 때로는, 가장 필요한 순간에 돌아오는가 봅니다. 저는 반가운 우산을 펼쳤고, 그해 한 계절의 마지막을 걸었습니다.

김종관은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낙원> 등 단편영화로 국내외 다수 영화제에서 입상했으며 장편영화로는 <조금만 더 가까이>가 있다. 저서로 <사라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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