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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엽은 취향을 담고 싶다

2020년 6월 4일 — 0

정엽은 서울의 낭만을 담은 오리올에 이어 같은 해방촌에 한식 국숫집 린자면옥을 열었다. 이번에도 본인의 입맛과 취향을 가득 담았다.

‘TV에서 봤던 게 언제였더라?’ 10년 전 MBC <나는 가수다>에서 멋진 활약을 보이고 ‘담배가게 아가씨’를 부르며 퇴장한 이후 깜깜무소식이다. 방송에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맏형 정엽의 무대를 보기가 어렵다. 매년 브라운 아이드 소울 콘서트로 팬들을 찾아오긴 하지만 정엽이 대중에게 모습을 비치는 일 자체가 매우 드물다. 가끔 드라마 OST로 목소리를 들려주거나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던 게 전부. 그것도 몇 해 전까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줄었다. 기억에서 정엽이 잊혀질 찰나 비슷한 유의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태원 클라쓰> 단밤포차의 실제 주인은 누구?” 올해 3월 최고 시청률 16.5%를 기록하고 막을 내린 박서준 주연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단밤포차’ 가 단연 화두였다. 단밤포차는 극 중 박새로이가 장대희 회장의 방해로 어쩔 수 없이 장소를 옮긴 가게이자 멋진 서울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옥상, 친구들과 내일을 이야기했던 장소다. 단밤포차의 실제 촬영지가 바로 해방촌 루프톱 카페로 유명한 ‘오리올’이다. 오리올은 2016년 정엽이 문을 연 비스트로이자 바이자 카페다. 드라마가 워낙 흥행한 덕분에 덩달아 오리올과 오리올의 사장인 정엽이 때아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죽 하면 정엽이 오리올 건물을 팔아서 얼마를 남겼다느니 하는 기사가 쏟아졌을까.

친구들과의 아지트를 꿈꾸며
정엽은 자칭 미식가다. 타칭이라고 해도 미식가다. 또 대식가이기도 하다. 혼자 살아온 지난 20년간 매 끼니 를 맛있게 먹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하고 실험해왔다. 어릴적부터 입맛이 까다로웠던 집안 내력 덕을 봤다고 해야 할까? 음식을 음미하는데 자연스럽게 일가견이 있었다.음식은 끼니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아닌 그 자체로 기쁨이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다는건 이해할 수 없어요.(웃음) 음식에 목숨을 거는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맛있고 즐겁게 먹고 싶어요. 음악을 하든 방송을 하든 일정을 마치면 사람들과 맛있는거 먹으면서 술도 한잔하고. 그런 낙으로 살았던 거 같아 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혼자 살다 보면 일종의 패턴이 생긴다. 한동안은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먹는게 그렇게 좋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아무리 맛있어도 사먹는 음식에 물리기 마련이다. 그럴 때면 집밥, 직접 만든 음식을 갈망하게 된다. 정엽도 그랬다. 그간 음식을 즐기며 쌓아둔 아이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집에 있는 재료로, 아무렇게 해먹기보다 꼭 마음에 드는 음식의 레시피를 연구하며 직접 만들어 먹었다. 늘 음식을 탐미하고 평가해왔기때문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확고한 미식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취향이 확고해지면 확고해질수록 드러내 보이고 싶어진다. 하루를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낙으로 살아 왔던 정엽에겐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아무도 모르고 나만아는  친한 사람들만 은밀하게 불러 음식과 술과 음악을 대접하고 또 공유하고 싶은 그런 공간. 평소 정엽은 여기저기 서로 다른 동네의 매력을 찾아 다니길 좋아했다. 본격적으로 공간 물색에 나섰다. 마침내 발견한 곳이 오리올이 자리한 해방촌이다. “동네마다 매력적인 포인트를 찾는걸 즐기는데 어쩌다 해방촌을 발견했어요. 해방촌은 옛 서울의 흔적이 많이 남은 동네여서 마음에 쏙 들었죠. 유동 인구가 적어 나만 아는 곳이 될 수 있었고요.”

경리단길이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건너편 해방촌은 세월의 흔적이 많이 남은 주거촌일 뿐이었다. 상권이니 시세니 따지지 않는 정엽에게 제격이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지 않아 더할 나위 없었다. 해방촌 안에서도 높진 않지만 남산 아래의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금의 오리올 건물을 발견했다. 루프 톱 전망을 확인한 순간 사랑에 빠졌다. 수십 년간 같은 자리에서 살던 분을 삼고초려 끝에 설득해 건물을 매입 했다. 오리올의 문이 열렸다.

린자면옥은 정엽이 친한 동생 2명과 의기투합해 운영하는 한식 국숫집이다.
가게 공간이 협소하다. 린자면옥은 키오스크로 주문하고 바 테이블에 앉는 방식을 적용했다.
정엽은 바쁜 일정에도 일주일에 1~2번은 꼭 가게에 나와 직접 음식을 만든다.
매운 양념의 뜨거운 비빔면인 린자완면과 한국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얼큰한 국물의 린자신면도 매력적이다.
세 가지 면 요리와 사이드 메뉴 한 가지만 판매하기 때문에 주방도 단순하다.

처음에 오리올은 계획한대로 정엽의 아지트로 기능했다. 친한 사람들과 함께 술과 음악, 소중한 시간을 공유하는 곳으로 운영됐다. 술 한잔 걸치고 노래를 하거나, 음식을 먹다가 연주를 하기도 하는. 다만 입소문이 무서웠다. 오리올만의 탁 트인 루프톱 전망은 해방촌 부 흥과 함께 빠르게 유명해졌다. 아지트로만 사용하기엔 드나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다. CF 촬영 등 대관 문의 도 줄을 이었다. <이태원 클라쓰>의 단밤포차도 그렇게 탄생했다. “말 그대로 정식 대관이었어요. 루프톱 전망이 워낙 좋아 그거 하나 때문에도 평소 대관 문의가 많거든요.  <이태원 클라쓰>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했죠. 처음에는 어떤 드라마인지 몰랐어요.(웃음)”

집에서 만들어 먹던 음식을 메뉴로
정엽은 음식에 대한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 머릿속 에 담고만 있지 않는다. 언제나 복닥복닥한 주방에서 직접 만들어보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크다. 결심이 서면 실행에 옮겨야 직성이 풀린다. 오리올 건물이 가십거리가 된 건 그래서 좀 아이러니하다. 정엽이 지난해 오리올 건물을 팔아 발생한 시세차익은 다시금 해방촌에 한식 국숫집 ‘린자면옥’과 내추럴 와인 바 ‘회전 목마’, 커피 브랜드 ‘금의공자’로 이어졌다. 5년 전 오리 올처럼, 2년 전 ‘오리올 케이크’처럼. 본인의 취향이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취향일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정엽은 모든 음식을 좋아하지만 유독 면을 즐긴다. 2015년 <올리브 매거진 코리아>와 나눈 이야기의 주 제도 오직 면이었다. 면이라면 그 자리에서 세 그릇도 가능하다. 특히 소면을 좋아한다. 집에서 소면으로 만든 냉면을 자주 해먹는데 내심 궁금해졌다. “면 요리를 좋아하다 보니 엄청 많이 먹으러 다니죠. 나름대로 평가도 하고요. 린자면옥은 냉면 때문에 시작한 거예요.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국수를 팔아보고 싶었거든요. 사람들이 과연 좋아할까? 반응은 어떨까?”

물론 국숫집을 연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았다. 레시피와 상상했던 모습만으로는 어떻게 가게를 꾸려야할지 감이 잘안왔다. 오리올에서 요리하던 친한동생과 머리를 맞댔다. 일본에서 면 음식만 공부하던 친구도 합류시켰다. 부족한 전문성을 메우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더했다. 정엽의 시그니처 메뉴인 린자냉면에 이어 매운 국물의 린자신면과 매운 비빔면인 린자완면, 곤드레밥 린자소반은 그렇게 탄생했다. “처음엔 한 가지 메뉴가 더 필요해서 머릿속에 있던 매운 면 레시피를 구체화했어요. 다른 친구가 비빔면도 있으면 좋지 않겠냐하고, 또 얘기하다보니까 양이 부족한 사람을 위한 밥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았죠.(웃음)”

린자면옥에는 정엽의 취향이 온전히 담겨 있다. 정엽은 처음 왠지 모르게 영화 <화양연화>에 등장하는 홍콩 뒷골목에 있을 법한 가게를 떠올렸다. 동양적인 느낌의 가게였음 했다. 그러다 중국풍도 일본풍도 아닌 한국풍으로 콘셉트를 정했다. 간단하지만 빠르게 후루룩 먹을 수 있는 우리네 면이 가진 매력대로,린자면옥을 ‘면 요리 패스트푸드’ 가게로 만들고 싶었다. 테이블을 한지로 마감한 것도, 연꽃 모양의 전등을 사용한 것도, 격자형 창문틀을 사용한 것도 그래서다. “값은 싸지만 한 끼 식사로 충분한 패스트푸드처럼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면 했어요. 한식 면 요리가 딱 그렇잖아요. 대신 조금 더 젊은 감각으로, 거기다 우리만의 스타일을 잘 녹여서.”

정엽은 해방촌에서 운영하는 가게만 다섯 곳이지만 사업을 하는 게 아니다. 본인의 취향을 무기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함이다.

즐거운 부담을 안고서
린자면옥을 기획할 때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게 공사가 끝나갈 무렵 국내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졌다. 린자면옥뿐만 아니라 회전목마와 금의 공자까지. 총 세가지 장르의 가게를 작은 건물에 어렵게 녹였는데 하필이면 안좋은 상황이 겹쳤다.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됐지만 이미 준비가 다 된 상황에 마냥 오픈을 미룰 수도 없었다. 더욱이 돈도 많이 들었다. 정엽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당분간 손님이 적을 수밖에 없겠지만 오히려 잘 된 것 같아요. 처음하는 국숫집인만큼 점검하는 시간으로 삼고 있어요. 미흡한 부분에 대해 보완하고 있죠.(웃음) 무엇보다 직원이 많거든요. 가게 문을 안 열면 월급을 못줘요.”

정엽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만 총 20명에 이른다. 하고싶어 일을 벌이긴 했는데 내심부담이 크다. 그렇다고 피하고 싶은 그런 부담은 아니다. 오히려 부담 덕에 하루하루가 즐겁다. 정엽에게 직원은 아랫사람이 아니라 친구이자 동료이기 때문이다. 혹자가 정엽을 보며 아예 요식업에 뛰어든게 아니냐고 말할지 몰라도, 정엽에게 가게는 벌이의 수단이 아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울타리다. “이 친구들하고 그냥 잘 살아 보고 싶어요. 원래 그런 걸 좋아해요. 사랑하는 사람들하고 작은 울타리를 쳐놓고 나혼자만 잘 사는게 아니라 함께 잘 사는.”

또 하나 계획하는 가게가 있다. 고기를 좋아해 직접 고깃집도 차려보고 싶다. 평소 고기 잡내와 식당 청결에 민감한 터라 본인의 취향을 반영한 고깃집을 꿈꾼다. 1980년대에 많았을 것 같은 정감 넘치는 고깃집. 아직은 여유가 없어 계획만 가지고 있지만 금방 ‘정엽고깃집’이라며 사진마다 해시태그가 달릴지 모른다. 정엽은 늘 안 하고는 못 배기는 성격으로 살아왔다. “ 제 기준에 있어서 절대 ‘패스’ 당하지 않을 고깃집을 내고 싶은 거죠. 으리으리한 가게 말고 린자면옥처럼 구멍가게 같은, 혼자는 못하니까 지금처럼 친구들과 함께.”

시류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 정엽과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음악이 더디게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엽은 최근 실력이 좋은 젊은 뮤지션들이 많아지면서 갈수록 본인이 메인스트림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럼에도 본인의 음악을 계속하고 싶다. 대신 금방 휘발 돼 사라지는 음악은 만들고 싶지 않다. 뮤지션 친구들과 음악을 기반으로 한 색다른 라이브 채널을 기획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가게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오래오래 함께 즐거울 수 있도록 내실이 탄탄한 가게를 운영하고 싶다. 가게에도 음악에도 정엽은 본인의 취향을 담는다.

린자면옥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맏형 정엽이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던 냉면과 함께 신면과 완면도 판매하는 한식 국숫집이다. 언제든 후다닥 한 끼 맛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맥도날드와 유사하다. 짭조름한 감칠맛과 얼큰한 매운맛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맛. 린자면옥에서 키오스크로 주문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린자냉면·린자신면·린자완면 7500원씩, 린자소반 2000원
∙서울시 용산구 소월로20길 268
∙수~일요일 오전 11시~오후 9시 (브레이크 타임 오후 3~5시), 월·화요일 휴무
∙0269535217 

edit 곽봉석
photograph 양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