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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의 이면 @정재훈

2019년 11월 12일 — 0

우리의 인기 메뉴 돼지고기, 알고 먹으면 맛이 두 배, 건강이 두 배다.

text 정재훈 — edit 진찬호 — photograph 박인호

인기에는 이유가 있다

돼지고기는 웬만해선 실패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삼겹살이 인기를 끈 요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논란이 있었다. 일본 수출 잔여육으로 삼겹살을 먹게 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소고기의 대체재로서 돼지고기 소비를 장려한 정부 정책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하지만 식재료의 공급이라는 바깥 요소 하나만으로 음식의 선택이나 취향이 바뀌지 않는다. 화로에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 한국의 식문화야말로 삼겹살을 중심으로 한 돼지고기의 성공에 결정적 요인이다. 돼지는 소에 비해 사육 기간이 짧아 근육과 결합 조직의 발달이 덜하며 따라서 고기도 더 연한 편이다. 돼지고기 부위 중에서도 지방이 풍부한 삼겹살은 평범한 일상에서 고기 굽는 기술 없이 구워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맛이 보장되는 고기다. 이른바 지방의 보장 이론이다. 육류를 고온으로 조리하다 보면 과잉 익힘으로 인해 근섬유 속 수분이 빠져나오고 이로 인해 질겨지는데 지방이 이를 늦춰주는 보호장치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지방이 풍부한 고기일수록 지방의 단열 효과로 인해 열이 천천히 전달되고 따라서 수분 소실과 단백질 변성을 막아 조리 뒤 더 부드럽게 느껴진다는 이야기이다. 친구들과 떠들며 삼겹살을 굽다가 너무 바싹 익히거나 편의점에서 냉동 삼겹살을 사다가 대충 구워 혼육을 해도 크게 실패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겹살에 촘촘히 박힌 근내지방이 구워 먹을 때 실패 확률을 낮추는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방 함량이 높은 고기일수록 구워 먹을 때 더 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은 그밖에도 셋이 더 있다. 단백질에 비해 밀도가 낮고 씹을 때 저항이 덜한 지방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할수록 부드럽고 연하다는 부피 밀도 이론, 근내지방이 고기를 씹을 때 근섬유와 근섬유 사이를 미끄러지도록 하여 더 연하다는 윤활 이론, 지방이 주위 결합 조직을 약화시켜 덜 질기다는 변형 이론도 있다. 이들 이론을 실제로 검증하기는 어렵고 지방 함량과 고기의 연한 정도 사이에 직접 관계가 없다는 일부 연구 결과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전문가 또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관능 평가에서는 지방 함량이 높은 고기일수록 부드럽고 육즙이 풍부하며 풍미가 좋다는 쪽으로 응답이 모아진다. 삼겹살의 승리는 지방의 승리다.

품종과 맛 차이의 과학

지방이 너무 많아지면 곤란하다. 돼지 체중이 110kg을 넘어가면 체지방이 지나치게 쌓이고 삼겹살의 근육층이 지방으로 침식되어 비계층만 보이게 된다. 근내지방은 고기 맛을 상승시키지만 피하지방과 근간지방이 과하면 고기보다 비곗덩어리처럼 느껴진다. 먹기도 전에 부담스럽다. 오래 사육할수록 특히 삼겹살 부위에 지방이 쏠린다. 스페인에서 도토리를 먹여 방목했다는 이베리코 베요타의 경우 삼겹살에 살코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방이 가득한 이유다.

근내지방 함량은 높이면서도 지방이 과하게 들어차지 않도록 하려면 사료를 주는 방식이나 기간도 고려해야 하지만 품종도 중요하다. 난축맛돈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난지축산연구소에서 제주 흑돼지와 개량종인 랜드레이스를 교배해 개발한 품종으로 근내지방을 일반 돼지보다 세 배 이상 높였다. 일반 돼지고기의 등심 근내지방 함량은 2~5%인데 난축맛돈은 8% 이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등심을 구워서 맛보면 근내지방 덕분에 육즙이 더 촉촉하게 느껴진다. 지방이 침샘을 자극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우리가 고기를 씹을 때 흘러나오는 지방을 육즙으로 인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방의 조성과 그 속에 녹아 있는 향미 물질도 맛에 영향을 미친다. 이베리코 베요타에서 견과류의 향이 느껴지거나 난축맛돈을 씹을 때 입 속에서 시원하게 지방이 녹아내리는 이유다. 지방이 만들어내는 맛의 차이에 비하면 고기 자체의 맛 차이는 크지 않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목심이나 삼겹살 같은 부위를 구워 먹는 방식으로만 맛봐서는 삼원교잡종인지 듀록인지 버크셔K인지 품종을 맞히기 어려울 때가 많다. 결합 조직과 근육의 발달 정도에 따라 탄력성과 식감 면에서 차이를 느낄 수 있지만 구운 고기 맛 자체는 여러 번 씹지 않는 이상 엇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은 국물의 버크셔K 돼지 곰탕, 듀록 돈가스처럼 특정 품종으로 만든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에 줄을 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맛의 차이를 감지하고 자신의 취향에 따라 돼지고기를 고르는 사람의 수가 늘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양한 품종별로 돈가스를 골라 먹을 수 있는 식당처럼 동일 요리를 품종별로 선택해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아지고 비교 시식할 기회가 늘어나서 돼지고기 품종에 대한 관심도 계속 더 커지길 바란다. 식당 벽에 붙여둔 사진 속에서 뛰어노는 돼지와 실제 식탁에 내어놓는 돼지고기의 품종이나 등급이 다른 경우도 사라지면 좋겠다.

돼지고기와 건강

지방이 많은 삼겹살을 주로 즐기다 보니 돼지고기 하면 고열량 식품의 대명사처럼 여기곤 한다. 하지만 돼지고기의 지방도 부위별로 다르다. 삼겹살은 절반이 지방이지만 등심처럼 지방이 적은 살코기 부위를 놓고 보면 소고기와 대등하다. 지방을 기피하는 현대인의 취향에 따라 돼지고기의 지방 함량은 과거보다 줄어드는 추세다. 게다가 돼지고기는 소고기보다 올레산 같은 불포화지방 함량이 높다. 차돌박이보다 삼겹살의 지방이 입에서 잘 녹고 맑게 느껴지는 이유다. 돼지고기에는 비타민 B1, B3, B6, B12와 철분, 셀레늄과 같은 필수 비타민과 미네랄도 풍부하다. 과잉 섭취만 하지 않으면 훌륭한 영양 공급원이다. 하지만 돼지고기와 건강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덜 익혀 먹으면 갈고리촌충에 감염될 수 있어 위험하다는 건 과거에는 상식이었다. 유대교나 이슬람 문화권에서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것도 이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핑크빛이 나는 미디엄 레어로 익힌 돼지고기 스테이크가 제법 흔하다. 미국 농무부에서는 내부 온도가 63℃가 되도록 익힌 뒤 3분 동안 레스팅하는 방식을 권하지만 요즘 북미권에는 심지어 날돼지고기를 내어놓는 식당도 생겨나고 있다. 갈고리촌충에 감염될 우려가 적다 해도 익히지 않은 고기로 인한 세균 감염 위험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돼지고기 타르타르는 여전히 안 먹는 게 나을 듯하다. 옹호하는 측에서는 그 위험이 날달걀이나 소고기 육회를 먹는 것보다 특별히 높을 게 없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말이다.

나를 비롯한 일부 사람은 가끔 돼지고기를 먹고 나서 팔뚝이나 볼에 두드러기가 나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고 돼지고기에 대한 알레르기는 아닌 게 대부분의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아직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런 현상은 아마도 돼지고기로 인해 히스타민 분비가 자극되어 일어나는 것으로 추측한다. 2011년 대한피부과학회지에는 흥미로운 사례가 하나 실렸다. 6세 소년이 돼지고기 60g을 먹었을 때는 아무 증상이 없고 200g을 먹고 나면 아토피 피부염 증상이 악화된 것이다. 연구자들은 돼지고기에 히스타민이 고농도로 들어 있어서 문제를 일으킨 것으로 추측했다. 돼지고기를 숙성시키면 히스타민 농도가 높아질 수 있다. 돼지고기 숙성이 맛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되느냐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나처럼 돼지고기를 먹고 가끔 두드러기가 나는 사람에게는 맛과 관계없이 숙성육보다는 신선육을 선택하는 게 건강 면에서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지난 몇 주 동안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사람에게는 감염되지 않는 바이러스이지만 돼지에게는 치명적이다. 바이러스에 오염된 돼지고기나 돈육 가공식품을 먹어도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먹다 남긴 음식을 통해 돼지에게 감염을 일으킬 수 있다. 돼지열병 바이러스를 걱정하여 돼지고기를 적게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닌 이상 해외여행 중에 무심코 식품을 가져오지 말라는 주의를 따르는 것밖에 할 게 없다며 안타까워할 수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이런 뉴스에 관심을 가지고 문제가 나아질 때까지 계속 지켜보는 것이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사람의 건강만큼이나 동물의 건강도 중요하니까.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