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main

People

이재훈 셰프의 있을 재

2019년 10월 15일 — 0

뚜또베네, 팔레드고몽의 헤드셰프를 지낸 이재훈 셰프가 와인 비스트로 ‘있을 재’를 오픈했다. 음식의 큰 축은 틀지 않았지만 약간의 자의식을 더했다.

이재훈 셰프는 국내 이탤리언 레스토랑으로는 고목 격이라 할 수 있는 ‘뚜또베네’에서 12년간 근무하다 ‘있을 재’를 통해 첫 오너셰프란 직함을 달게 됐다. 오늘날 다이닝 신은 어느 때보다 가파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파인다이닝, 컨템퍼러리 다이닝, 이노베이티브 퀴진 등 셰프의 자의식이 충만한 실험적인 레스토랑들이 앞다퉈 생기는 요즘. 새롭게 오픈한 ‘있을 재’에서 이재훈 셰프가 야심 차게 선보이는 음식은 늘 ‘하던 것’이다. 물론 뚜또베네에서 하던 것과 똑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기존에 자신이 하던 요리를 전부 뜯어 재조합하기보다 매무새를 고치고 장식적인 요소를 더하는 등 자의식을 옅게, 옅게 덧씌워갔다. 시류에 휩쓸려 온몸에 힘을 주기보다 한결 힘을 뺀 그의 요리는 그래서 이재훈답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보다 하던 것을 더 잘하려는 이재훈의 요리는 쉽고 편안하되, 존엄을 잃지 않는다.

진지한 표정으로 요리 맛을 보는 셰프.
진지한 표정으로 요리 맛을 보는 셰프.

오너셰프가 되기까지

처음부터 요리사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다. 요리와는 상관없는 전자통신학과에 진학한 그는 군 제대 후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았다. 그때 우연히 뛰어든 곳이 이탤리언 레스토랑 주방이었다.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누군가 맛있게 먹어준다는 것이 재미있더라고요. 그걸 계기로 대학 졸업 후 해태 델리에 공채로 입사하게 됐어요.” 해태 델리에서 운영하던 이탤리언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쌓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퇴사 후 당시 유행하던 파스타 전문점에 취직했다. “본사에서 반조리 제품으로 들어오는 소스나 재료를 조리하는 식으로 일을 하다 보니 내가 하고 있는 요리의 뿌리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더라고요.” 배움에 갈증을 느낀 그는 이탈리아 요리학교 ICIF로 진학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박찬일 셰프와 진경수 셰프가 운영하던 프렌치 레스토랑 라싸브어에서 근무하다 박찬일 셰프를 따라 2007년 뚜또베네로 오게 됐다. 그로부터 뚜또베네에서 수셰프부터 헤드셰프까지 역임했고 2013년경엔 같은 회사에서 운영하는 팔레드고몽의 헤드셰프까지 겸임하게 됐다. “뚜또베네는 워낙 유명하고 오래된 곳이라 미식에 까다롭고 마니악한 취향을 가진 손님보다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손님들이 많이 찾으시는 편이에요. 그래서 제 개성을 살리기보다 보편적인 입맛을 고려한 메뉴를 많이 선보였어요.” 그런 부분이 안타까웠던 그는 자신의 업장이 생긴다면 소개하고 싶은 메뉴들을 ‘셰프 스페셜’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개성을 녹여낸 레시피가 쌓이고 쌓였다. 레스토랑 청사진은 마음속으로 이미 수백 번 고쳐 썼다. 덕분에 마침내 자신의 업장을 오픈하게 됐을 때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올 4월 뚜또베네를 관두고 한 달 뒤에 바로 있을 재를 오픈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그가 가지고 있었다.

손질을 기다리고 있는 소고기.
손질을 기다리고 있는 소고기.
디너를 위해 손질을 기다리고 있는 포항 피문어.
디너를 위해 손질을 기다리고 있는 포항 피문어.
요리에 열중하고 있는 이재훈 셰프.
요리에 열중하고 있는 이재훈 셰프.

셰프의 화법이 녹아난 테이블

있을 재는 이재훈 셰프와 로칸다몽로에서 오랜 시간 홀을 책임진 동생 이재호 매니저가 함께 오픈한 공간이다. “동생과 함께 레스토랑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예전에는 우리 둘이 인건비가 비싸서 같이는 못할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으니까요.(웃음) 그런데 나이 들면서 이 일을 오래하려면 결국 우리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둘 다 동의하게 된 거죠.” 이재훈 셰프와 이재호 매니저는 편하되 격식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있을 재는 프렌치·이탤리언 요리와 와인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비스트로다. 요리의 베이스가 되는 소스는 직접 만든 비스크, 쥐리에, 데미글라스 등을 사용해 클래식에 방점을 두고 있다. “예전부터 쭉 내려온 어센틱Authentic한 음식들은 셰프의 개성을 마음껏 펼치기가 매우 어려워요. 정교한 체계와 질서를 깨야 하니까요. 물론 레시피를 바꾸는 것도 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이제 그런 것들이 재미가 없어요. 클래식한 음식들은 제대로 클래식하게 만들었을 때 좋은 나이가 된 거죠.” 있을 재의 ‘따야린’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전통적인 면으로, 노른자로만 반죽한 아주 얇은 파스타다. 버터에 세이지를 넣어 풍미를 올린 다음 직접 만든 생면을 버무려 트러플 슬라이스를 올린다. 함께 올린 노른자는 생노른자가 아니라 65℃ 온도에 3분 정도 담가 유황 냄새, 달걀 비린내를 제거했다. 이처럼 클래식을 기조로 하고 있어도 셰프의 화법은 녹아나기 마련이다. 그는 할머니의 데미글라스 소스나 스파게티를 먹으며 자란 유년 시절 같은, 그가 경험해보지 않은 것들을 억지스레 끌어들여가며 ‘정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의 요리에 녹아난 악센트는 그가 함께 끌어안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온 정서들이다. 있을 재의 요리들에 한식, 일식, 중식의 요소가 눈에 띄는 이유다. “국내 지방의 제철 요리들에도 관심이 많아요. 가령 봄 멸치 하면 저쪽 지역에서는 멸치를 어떤 부재료와 함께 먹는 것을 즐기는지, 그런 것들을 유심히 파악해 메뉴에 아이디어를 얻기도 해요.” 예컨대 ‘멍게 우니 샐러드’는 한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오이냉국의 영향을 받았다. 바다 향 가득한 멍게와 미역에 살짝 염장한 오이와 곰피를 샴페인 비니거 드레싱에 버무려 곁들인다. 거기에 와사비 성게 퓌레를 올리고 딜로 산뜻한 조화를 더한다. 오이와 미역, 산미까지, 오이미역냉국과 유사한 맛과 향을 공유하면서도 보다 입체적이고 확장된 바다 맛을 전한다. 프렌치를 바탕으로 한 ‘메추리구이’는 삼계탕을 모티브로 했다. 백숙에 찹쌀을 채우듯 메추리에 양송이버섯 리소토를 채웠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금류를 먹을 때 능이버섯 향을 함께 즐긴다는 점에 착안해 메추리구이 아래는 능이버섯과 소스를 곁들였다. 능이의 묵직한 흙내음이 야금류 특유의 풍미와 밀착해 원래 한 몸인 듯 조화로운 맛을 선사한다. 디저트인 과일 타르트에는 중식의 터치를 더했다. 타르트 맨 아래에는 계피, 팔각, 너트메그, 정향 등을 넣은 시럽에 익혀 향을 입힌 파인애플을 넣고 그 위로 크렘 파티시에와 딸기 또는 무화과를 올린 다음 팬에 토스트한 화자오를 으깨 뿌렸다.

멍게 우니 샐러드에 바다 향을 더할 미역
멍게 우니 샐러드에 바다 향을 더할 미역
속에 버섯 리소토를 채운 메추리를 시어링하고 있다.
속에 버섯 리소토를 채운 메추리를 시어링하고 있다.
붉은 우드와 은은한 조도의 조명이 어우러진 있을 재의 내부.
붉은 우드와 은은한 조도의 조명이 어우러진 있을 재의 내부.

중심축은 클래식

“오픈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처음부터 무리한 시도로 제 스타일을 강조하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적어도 ‘있을 재가 맛없는 요리는 하지 않는다’는 신뢰도를 손님들에게 심어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앞서 알 수 있듯 새로운 해석을 더한 요리도 있지만, 있을 재의 메뉴에는 이재훈 셰프가 1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쭉 해오던 것에 약간의 변화만 준 요리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요리들엔 ‘클래식’이 단단한 중심축을 잡고 있다. 오늘날 국내의 레스토랑들이 같은 골목에서 경쟁하거나 국내 안에서만 순위를 앞다투던 시대는 지났다. <미쉐린 가이드 코리아>가 발간됐고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50>, <아시아 베스트 레스토랑 50> 등의 국제 시상식이 개최되는 시대다. 세계적으로 국내 레스토랑의 위상이 달라졌고 국내 셰프들도 국제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아졌다.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레스토랑과 비교되다 보니 국내 레스토랑에도 ‘노르딕 퀴진’ 같은 실험적인 양상이 확장됐다. 근래 다이닝 신에 새롭게 진입한 레스토랑 중에서 클래식한 요리를 선보이는 곳이 많지 않게 된 까닭이다. “사람들의 입맛이 삼겹살을 먹다 지루해지면 고추장 삼겹살도 먹어보고 다른 양념에 시즈닝한 삼겹살도 찾지만 결국은 다시 소금구이 삼겹살로 돌아온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요리사는 클래식한 소금구이를 가장 맛있게 요리하는 법을 먼저 알아야 하죠. 자기 요리의 색채를 가지는 건 클래식을 알고 난 다음이에요.”
뚜또베네의 황금기를 이끌며 12년간 클래식의 정도를 지키며 인정받아온 이재훈 셰프. 그는 가던 트랙에서 벗어나 아우토반으로 나왔지만 드리프트하듯 방향을 틀기보다 가던 속도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캐릭터를 약간만 덧입히기를 택했다. 그는 시작한 지 이제 막 3개월이 조금 넘은 ‘있을 재’가 누구든 편안하게 음식과 술을 즐기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마냥 풀어진 편안함이 아니라 충분히 격식 있되, 올드하지 않은 정중함을 갖춘 곳. 있을 재에 자신의 능숙함을 믿고 자만하는 기백 넘치는 요리사는 없다. 곰삭은 치즈와 무르익은 와인같이 실패하지 않는 궁합처럼, 하던 것을 더욱더 잘하려는 관록의 요리사 이재훈이 있을 뿐이다.

곱게 간 닭 가슴살과 항정살로 돼지 대창의 속을 채운 부댕 블랑.
곱게 간 닭 가슴살과 항정살로 돼지 대창의 속을 채운 부댕 블랑.
멍게 우니 샐러드에 마지막 터치를 하고 있는 셰프의 손.
멍게 우니 샐러드에 마지막 터치를 하고 있는 셰프의 손.
화자오가 올라간 과일 타르트. 토핑되는 과일은 계절마다 달라진다.
화자오가 올라간 과일 타르트. 토핑되는 과일은 계절마다 달라진다.

1. 버섯 리소토로 속을 채운 메추리구이.
2. 갖은 재료의 시너지로 은은한 바다 향이 나는 멍게 우니 샐러드.
3. 돼지 대창에 속을 채운 부댕 블랑. 밑에는 머스터드 크림소스와 녹두가 깔렸다.
4. 달걀노른자로 만든 생면에 버터와 세이지 향을 입힌 따야린.

있을 재 INFO
· 메추리구이 3만2000원, 멍게 우니 샐러드 2만5000원, 따야린 3만2000원, 바삭한 감자 뇨끼 2만9000원, 부댕 블랑 3만2000원
·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168길 19
· 월~토요일 오후 6시~새벽 1시, 일요일 휴무
· 02-547-0606

edit 장은지 — photograph 박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