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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k

음식과 인문학 @이지형

2019년 10월 20일 — 0

요리와 미식.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 행위를 통해 인식과 감각을 깨우고 대뇌와 대장을 자극한다. 드넓은 우주 속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자신을 확인하고, ‘형이상’과 ‘형이하’의 경계를 허문다.

text 이지형

새벽, 창밖 가랑비 소리에 잠이 깼다. 이십여 분 침대에 그대로 누워 머리맡 발코니 창에 부딪는 빗소리에 집중하는데, 갑자기 적막이다. 비 그쳤다. 날은 여태 어둡고, 나는 빗소리 대신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몸이 속삭인다. 밤새 늘어져 있던 몸이 기동하는 중이다. 기지개를 켜는 대신 눈을 감는다. 몸이 들려주는 내밀한 소리에 은밀하게 귀 기울인다. 빗소리보다 더 조용한 소리―. 누군가 그랬다. 대뇌의 운동이 대장의 운동만큼 우주적 가치가 있는지 회의懷疑한 적이 있다고. 그래, 그날 새벽 비 그친 뒤 어렴풋하게 감지된 내 몸의 희미한 속삭임은 머릿속 전기 신호와 배 속의 꿈틀거림이었다. 대뇌와 대장의 운동이 만들어낸 가녀린 소리. 한낮의 빛이 사라지면서 때 아닌 겨울잠을 청했던 (대뇌의) 인식과 (대장의) 소화가 8시간의 휴식을 뒤로하고 이제 막 기능을 찾는 중이다. 나도 고민해야 하나. 대뇌와 대장의 운동 중 어떤 것이 더 우주적 가치를 품고 있는지. 회의도 하게 될까. 대뇌의 인식은 역시 ‘우주적 가치’의 측면에서 대장의 소화 작용만 못한 게 아닐까 하고.

이유 있는 회의라 생각한다. 긴 세월의 진화가 만들어냈을 인간의 뇌는 우주 전체를 관망한다. 자신의 태생을 거슬러 지구의 탄생을 보고, 지구를 만들어낸 먼지를 넘어, 그 먼지를 떨구어낸 빅뱅을 상상한다. 사고로, 실험으로 검증도 한다. 그 우주적 가치를 누구도 폄하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을 가능하게 한, 인간 그리고 인간 이전 수많은 생물들의 생존을 곧이어 떠올릴 수밖에 없다. 긴 세월의 생존이 없었다면 인식도 불가능했다. 그 기적적인 생존을 가능하게 한, 수많은 생물들의 소화 작용을 인식의 수준에 못 미치는 것으로 평가절하해선 안 되겠다. 그래서 우주적 가치의 경중을 따지자면, 인식보다 소화 작용일 수도. 대뇌 속에서 벌어지는 긴박한 움직임이, 대장 근육의 무던한 수축과 이완보다 우주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 나도 회의하고 만다. 그러나 청명한 이 가을의 새벽에, 종잡을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 우주적 가치만을 논하겠나. 그래서 ‘인간적 가치’를 부여잡는다 치면, 인식과 소화 어느 쪽에 방점을 찍어줘야 할까. 그러나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순간 짧은 고민은 몽상이 된다.

한가한 토요일의 아침은 누구에게나 비슷하다. 느지막이 일어나 물 한잔 마시고 냉장고를 연다. 주중에 챙겨 먹지 못해 장 본 후로 고스란한 식재료들을 눈으로 스캔한다. 주섬주섬 내키는 대로 집어 든다. 쌀을 씻고, 다시마와 멸치로 국을 우린다. 마늘을 다지고, 양파를 채 썬다. 그리고 달걀 몇 개. 된장과 미역도 꺼내야 할까. 사과, 복숭아에 방울토마토까지 과일도 몇 개 집어 흐르는 물에 씻는다. 앞치마를 두르고, 가랑비 그친 뒤의 거리처럼 정갈하고 한산한 부엌을 한가한 걸음으로 오가며 주말 아침의 늦은 한 끼를 준비한다. 그동안 색색의 식재료들이 눈을 자극한다. 도마 위에서 칼을 놀리는 동안 근육과 신경이 깨어나고, 올리브유 두른 프라이팬 위로 피어오르는 마늘과 양파 향은 혼미한 정신을 명징하게 한다. 밤새 자중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나며 대뇌의 신경들은 빛의 속도로 전기 신호들을 교환한다. 그리고 대장이 움찔거리기 시작한다. 곤히 잠든 가족들을 깨우고 불러 식탁에 앉히기 전부터 그랬다. 감자와 소고기를 넣은 된장찌개 간을 맞출 때 이미 귀한 국 한 숟갈을 마른입에 떠 넣어주지 않았나. 아내, 두 아이와 함께 식탁에 앉아 토요일의 브런치를 먹는 동안 대장은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잘 먹을게. 국이 참 맛있네.”

“언제 나물을 다 무쳤어.”

“흠, 초무침. 미역은 언제나 옳으니까.”

휴일의 부지런함으로 빚어낸 밥과 반찬들을 섭취하며 여러 ‘몸’들이 생기를 얻는다. 소담한 백반이 침과 뒤섞이고 식도를 거쳐 위에 머무는 동안, 우리의 대장은 태양과 대지가 만들어낸 영양소들을 알뜰하게 흡수하기 위해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대뇌와 대장의 ‘우주적 우열’을 가리는, 참 쓸모없는 시도가 그때쯤 하얗게 잊힌다.

요리料理와 미식美食. 호흡만큼 긴요하고, 호흡만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일상의 반복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살아간다. 썰고 볶고 끓이고 찌는 요리를 통해 대뇌를 자극하고, 보고 맡고 씹고 삼키는 미식을 통해 대장을 자극한다. 잠에서 깨면 벌어지는 기적과 신비를 통해 우리는 대뇌와 대장의 운동을, 인식과 소화를,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를 통합한다. 그들의 경계를 허문다. 부엌과 식탁에 머무는 한 시간 남짓, 나는 우주적 가치를 저울질하느라 품었던 회의를 날린다. 요리와 미식이 맛보게 해주는 그 풍성한 인간적 가치 앞에서 ‘우주’를 잊는다. ‘인간’을 느낀다.

요리와 미식은 모든 인간적 가치의 시발인 동시에 절정일지도.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두 행위가 인간의 감각을 한껏 끌어올려서는 건강한 인식까지 촉발시키는 풍경 앞에서 나는 자주 황홀하다. 우주의 시원인 빅뱅을 추적하는 인간의 지성만큼이나, 요리와 미식은 매혹적이다. 꽃 한 송이에 우주 전체가 담겼다고 하던가. 가치의 측면에서라면, 쌀 한 톨 역시 우주를 품는다.

이지형은 부엌을 사랑한다. 기분이 가라앉을 때 색이 고운 음식을 만들며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적는다. 푸드 칼럼니스트란 직함은 덤이랄까. <부엌에서 지중해를 보았다>, <소주 이야기>, <강호인문학>을 썼다. <매일경제신문>에 ‘이지형의 식탁정담’, <주간조선>에 ‘맛기행’을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