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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연의 달콤한 인생

2019년 10월 18일 — 0

오정연은 열심히 살지 않을 때조차 열심히 산다. 그래서 내일의 오정연은 어제의 오정연을 지나쳐 간다.

당옥의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를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정연.
당옥의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를 앞에 두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오정연.

리넨 같은 여자

지난 10년간 짙은 화장과 찢은 스타킹이 걸크러시의 지표이던 세상에 살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청순해 보이지만 빽빽하게 직조된 리넨 같은, 총알처럼 단단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방송인 오정연이다. 강하다고 소리치지 않았지만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아니 강해졌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저녁 방송인 <생생정보통>에서 아침 햇살 같은 웃음을 짓던 그녀가 처음으로 달리 보인 건 토크쇼 <라디오스타>에 나와 발차기로 송판을 격파하던 때다. 날렵하게 회전해 발을 높게 치켜들어 내리꽂자 나무 송판이 비스킷처럼 똑 하고 부러졌다. 활시위처럼 유연한 몸과 그 몸을 딱 필요한 만큼 절제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때부터 그녀가 화면에 나오면 채널을 멈추고 작은 체구 속의 힘을 가만히 헤아리게 됐다.

그러나 지금의 오정연은 그때의 오정연과 또 다르다. 그사이 몇 겹은 더 늘었다. 올 초 그녀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단 근황을 전해 화제가 됐다. 방송을 통해 얼굴이 알려진 사람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잣대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는 한국 사회에서 그녀의 그런 행보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었다. “대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너무 하고 싶어 했어요. 저희 집이 보수적인 편이라 과외 아르바이트 말곤 경험해본 적이 없거든요. 계산대 앞에 서서 포스기를 다루는 것에 대한 로망과 미련이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남았더라고요.(웃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환한 조명을 받다 하루아침에 포스기 앞에 서서 사람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이 단순히 로망을 실현하는 설렘만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을 테다. “부모님의 기대와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아득바득 산 적도 있었죠. 사실 그렇게 살아왔고요. 그러다 힘든 일을 겪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게 맞는지 인생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뒤늦은 사춘기를 겪었다고나 할까요?” 그때부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녀는 하고 싶었던 일들에 지체 않고 도전해보기로 했다. 아르바이트하던 중 누군가는 ‘오정연 닮았다’, ‘혹시 오정연의 자매냐’ 물었다. 카페 사장의 부모님은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냐’고도 했다. 그녀의 용기있는 행보가 다수의 매체들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녀는 비슷한 몸살을 앓는 요즘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며 큰 지지를 얻었다. 한 손님은 직접 쓴 편지를 전하기도 했다. 번아웃 증후군으로 고액 연봉을 받던 회사에서 퇴사한 뒤 어떤 일을 해도 전 직장과 비교돼 남의 시선이 힘들었는데, 그녀의 용감한 움직임이 큰 힘이 되었다는 것.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 생각해 시작한 일은 그렇게 예기치 않은 곳으로 뻗어 큰 울림을 주었고 그녀에게까지 공명했다. 예기치 않은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일하던 카페 사장에게 카페를 인수해 운영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생각보다 권리금이 비싸더라고요. 이 돈이면 제가 원하는 동네에 제 개성을 녹인 새로운 공간을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싶었죠. 그래서 지금의 체리블리를 오픈하게 된 거예요.” 카페 아르바이트는 하고 싶었지만 카페 사장은 그때까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이다. 새로운 도전은 뜻밖의 문 앞에 그녀를 데려다 놓았고, 오정연은 그 문을 주저 없이 활짝 열었다.

‘오 사장’의 체리블리

오정연이 운영하는 카페 체리블리는 ‘체리’와 ‘러블리’ 그리고 ‘able(~할 수 있는)’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제가 체리를 워낙 좋아해요. 맛도 좋은데 알고 보니 체리에 성숙함(Mature), 그윽하고 풍부한(Mellow), 건강한(Healthy), 밝은(Bright) 같은 속성들이 있더라고요. 제가 닮고 싶은 부분이죠. 저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카페에 오신 분들 모두 스스로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You are definitely enough(당신은 그 자체로 충분합니다)’란 문구가 새겨진 카페 체리블리에는 커피 한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눈치 주는 이가 없다. 체리블리의 ‘오 사장’은 카페 내에 힘들 때 힘이 되는 책들과 얼마든지 머물 수 있도록 1인 1콘센트도 마련해놓았다. 메뉴의 가격도 착한 편. 카페 외에도 그녀는 스킨스쿠버·오토바이 자격증, 디제잉 등 앞만 보고 달리느라 마음속에 묵혀뒀던 일들을 하나하나 실현시켜갔다. “예전에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잠을 청하거나 잊어버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잊어버리는 건 한순간일 뿐, 그게 결국 쌓여서 몸에 서서히 퍼지더라고요. 그걸 알고 나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털어내려고 해요.” 활동적인 취미를 즐기거나 사람들을 만나고 방탈출 카페에 가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을 원하는 만큼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보여지는 직업 특성상 다이어트는 숙명이지만 3일 중 하루만큼은 스스로에게 관대한 시간을 가진다. “채소보다 고기를 즐기는데 아기 입맛이라 고기도 양념이 무쳐진 제육볶음, 숯불돼지갈비를 좋아해요.” 고기를 먹으러는 진대감이나 조박집에 가고 정말 스트레스가 쌓인 날에는 마음속 보물 창고같이 아껴뒀던 서서갈비집으로 향한다. 아기 입맛이니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터뷰를 위해 이제 막 스케줄을 마친 그녀를 만난 곳도 마침 디저트 카페 당옥이었다. “당옥의 신동민 셰프님은 <6시 내고향> 리포터로도 활동했던 식생활 소통 전문가 안은금주 언니를 통해서 알게 됐어요. <6시 내고향>을 진행하면서 산지의 1차 생산자도 만났고 셰프님도 많이 알게 됐죠. 그때 국내 식재료에 관한 애정이 많아진 걸 계기로 푸드 큐레이터 자격증을 따기도 했어요. 지금은 생존의 수단으로 하는 요리가 전부지만요.(웃음)” 당옥에서 그녀가 가장 즐겨 찾는 메뉴는 다시마키 산도와 복숭아 빙수다. 다시마키 산도에는 기장 다시마와 가쓰오부시로 맛을 낸 촉촉한 달걀말이와 담백한 당근 퓌레, 알싸한 머스터드소스가 어우러졌다. 복숭아 빙수에는 프리미엄급 복숭아 과육과 우유 빙수, 마스카르포네 치즈로 만든 소스, 복숭아 쥬레, 복숭아 셔벗 등이 한 볼에 담긴다. 복숭아 시즌이 끝난 관계로 이날 신동민 셰프는 곧 개시 예정인 샤인머스캣 빙수를 권했다. 빙수를 크게 한 술 떠 입에 넣자 청량하고 달콤한 청포도 향에 눈이 질끈 감겼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맛보는 이런 꿀 같은 휴식이라면 어떤 피로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당옥에 오면 꼭 맛본다는 ‘최애’ 메뉴 다시마키 산도를 들고 있는 오정연.

아나테이너에서 배우로

대표적인 아나테이너 중 하나로 꼽히는 오정연은 MBC의 120부작 드라마 <워킹 맘 육아 대디>에서 주연을 맡아 연기에 도전한 바 있다. 기회가 된다면 계속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현재 연극 무대에도 서고 있다. 현재 그녀는 연극 <옥상 위 달빛이 머무는 자리>의 앙코르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옥상 위 달빛이 머무는 자리>는 각자의 사연으로 자살을 결심한 뒤 옥상에 오른 이들이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옴니버스 형식의 연극이다. 죽자고 옥상에 올라 왔지만, 알고보면 그 누구보다 잘 살고 싶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여고생, 젊은 부부, 노숙자, 아저씨의 역할 중 오정연은 젊은 아내로 분해 극 중 남편을 맡은 배우 김승현과 함께 호흡을 맞췄다. “사실 무대는 좀 친숙한 곳이라 생각했어요. 무용을 전공해 공연도 많이 했고 아나운서로 음악회 진행이나 사회를 본 적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연극 무대는 정말 다르더라고요. 연극을 한 곳이 소극장이다 보니 앞에서 관객들 숨소리까지 다 들려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이 모든 게 날것이죠.” 드라마의 경우 신을 끊어가니까 집중하는 시간이 길어야 몇 분이지만 연극은 러닝타임 동안 온전히 배역에 몰입해야 한다. “내가 정말 극 중 인물이 된 것 같은 느낌? 그 순간만큼은 꽤 긴 시간 동안 저 오정연이란 사람을 잊고 극 중 인물에 몰입된 것 같은 희열을 느꼈어요. 아나운서 하면서 늘 중립을 유지하고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우는 습관이 있었는데 연극을 하면서 내 감정에 충실하고 분출하는 트레이닝이 된 것 같아요.”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연인에 대해 이야기하듯 신중하고 애정 어린 어조로 말을 잇던 그녀는 언젠가 논버벌 뮤지컬에 도전하고 싶다는 바람도 밝혔다. “음악과 노래가 주가 되는 뮤지컬과 달리 논버벌은 아예 대사가 없는 것도 있고 몸을 사용해서만 표현하는 장르도 있어요. 무용을 했으니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름마저 가지런한 정연. 한때는 그 이름처럼, 물웅덩이처럼 고요해 보인 때도 있었지만 빛을 산란시키고 사물을 굴절시키는 압도적인 기질이 그 속에 항상 있었다. 이제 그 물이 바람을 타고 물결을 일으키며 흐르려는 의지까지 가졌으니, 어느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어제의 오정연이 지나쳐 갈 수많은 오정연을 기대해본다.

다완에 담긴 말차를 즐기고 있는 오정연.
다완에 담긴 말차를 즐기고 있는 오정연.
초콜릿 양갱, 말차, 무화과 와케이크, 말차 와케이크.
초콜릿 양갱, 말차, 무화과 와케이크, 말차 와케이크.

당옥
슈밍화미코, 멘야미코의 신동민 오너셰프의 디저트 숍. 시그너처 메뉴인 와케이크를 비롯해 제철 과일 빙수, 다시마키 산도, 가츠산도 등을 즐길 수 있다.
· 설 와케이크 1900원, 제철과일 와케이크 2900원, 트러플 초코양갱 8000원
· 서울시 강남구 강남대로162길 22
· 화~일요일 오전 11시 30분~오후 8시, 월요일 휴무
· 02-3443-1227
· @dangok2018

edit 장은지 — photograph 양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