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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인문학 @함돈균

2019년 9월 23일 — 0

음식이 몸이고, 곧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그것이 음식과 생의 ‘깊은 맛’을 낸다.

text 함돈균

흔히들 삶을 이루는 실용적 조건, 필수 요소들을 얘기할 때 ‘의식주’를 말한다. 이 중에서 하나만 남기라고 하면 무엇을 나중까지 남길 수 있을까. 아마 음식이 아닐까. 옷과 집도 중요하지만 자기 몸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이 음식이다. 음식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실은 음식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제 먹은 음식이 오늘의 나다’라고 얘기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옳거니’ 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동학東學에서는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이라는 사상이 있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고, 사물을 공경하라는 것인데, 이때 사물에는 사람이 먹는 음식에 대한 공경이 구체적으로 중요하게 생각된다. ‘밥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이 그것인데, 거기에는 음식이 무기물과 유기물이 순환하는 우주 전체의 구조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을 담고 있는 사물이라는 함의가 같이 있다. 우주와 인간의 드라마와 제 몸이 음식 안에 또는 음식과 매개되어 동시에 있는 것이다.

“새벽에 너무 어두워/밥솥을 열어봅니다/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별이 쌀이 될 때까지/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김승희 ‘새벽밥’ 전문

이 시를 쓴 이의 발상도 그렇다. 새벽이 너무 어두운 것은 밤하늘에 별이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별 없는 밤하늘의 어둠이 무서워 화자가 한 행동이 밥솥을 여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천상의 별을 지상의 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가 연 것은 쌀을 밥으로 만드는 밥솥이다. 밤의 두려움은 별이 있다고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쌀이 밥이 되는 과정까지 포함해야 한다. 밤의 두려움은 단지 어둠의 두려움이 아니라, 실은 ‘외로움’이라는 인간적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밥은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사랑의 형상이다. 밤하늘에 무수한 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산산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면 그 고립성이 만드는 공허를 인간은, 아니 나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천상의 별이 지상의 쌀로 이어지는 것은 우주적 순환에 대한 상상을 담고 있지만, 그 쌀이 밥이 되어 서로를 껴안는 것은 그 순환에 인간의 노동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 노동의 산물은 형상적으로 사랑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은 곧 고독의 두려움이기도 하다.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우주의 공허에 참여하지만, 그것의 근원적 해소는 사랑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다. 어쩌면 인간의 협력을 통해 이뤄지는 노동 자체가 사랑일지도 모른다. 시는 짧지만, ‘밥’이라는 음식에 담긴 시인의 상념은 존재론적으로 복합적이다.

“모름지기 배추는/다섯 번은 죽어야 /깊은 맛을 얻을 수 있다는데//밭에서 잘 자란 놈을/모가지 잡아채서 쑤욱 뽑아내니/그 첫 번째요/도마 위에 올려놓고/번득이는 칼로 몸통을 동강내니/그 두 번째요/커다란 고무다라에 /소금물 뒤집어쓰고 누웠으니/그 세 번째요/고춧가루에 마늘에 생강에/온몸이 붉은 피로 뒤범벅이 되었으니/그 네 번째요/마지막으로 독이란 관에 묻혀/흙 속으로 다시 돌아가니/그 다섯 번째라”

-김종제 ‘깊은 맛’ 중에서

음식이 인생살이에 대한 메타포가 되는 것은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새삼 여기에서 상기할 일은 음식이란 ‘자연(날것)’이 아니라, 가공의 과정을 거치는 문화적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식물’ 자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을 수 있다고 여기는 인식론적 범주의 ‘채소’로서 ‘배추’를 선택하고, 이를 물리적으로 가공하여 ‘김치’라는 음식을 만들어 ‘깊은 맛’을 낸다. 그러므로 ‘맛’을 단지 감각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의미화되고 개별적 몸으로 체득된 ‘인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것은 ‘맛’이 단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기에, 탐구되고 음미되어야 하는 무엇이라는 뜻이며, 사람들마다 ‘깊은 맛’이 무엇인지 다른 감각과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인은 ‘죽음’을 관통하고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깊은 맛’, 생의 원숙성을 이루는 바탕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죽음’의 경험은 생의 국면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으로 경험된다. 배추의 입장에서 보자면 잘나간다고 생각했던 삶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뿌리째 생이 뽑히는 경험을 하는 경우다. 우연, 느닷없음, 예상할 수 없음, 맥락 없는 생의 경로로 이탈하는 부조리의 고통이 따른다. 그것은 존재가 어찌할 수 없는 비합리의 경험이다. 번득이는 칼로 몸통이 동강 나는 일은 그 사정없는 칼날 위에 존재가 겪는 속수무책의 경험이다. 소금물을 뒤집어쓰고 눕는 경험이나, 고춧가루에 마늘에 생강에 뒤범벅이 되는 경험은 생의 오욕칠정, 그중에서도 간난신고를 겪는 인생살이의 신산함일 테다. 소금물에 절여진다고 할 때, 여기에는 의식 있는 존재가 겪는 굴욕적인 체험 감각이 함께 느껴진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 아니다. “독이란 관에 묻혀/흙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야말로 혼자 ‘파묻히는’ 경험이다. 하지만 김치가 되는 데에, ‘깊은 맛’을 내는 데에 이 ‘숙성’의 과정은 화룡점정이다. ‘맛’에는 겪었던 모든 죽음을 다시 한 번 완전히 제 안에 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유행인 세상에서, 이런 간난신고의 생의 경험을 ‘깊은 맛’의 조건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관점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이 권할 만한 인생의 경로인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죽음’이 삶의 일부이며, 삶이 죽음을 포함하고 있기에 그 경험을 우리가 선택하거나 회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몸의 삶을 구성하는 음식은 이렇게 죽음을 인지하는 아이러니를 통해 생의 ‘깊은 맛’을 생각하게도 한다. 하지만 음식이 늘 이렇게 삶의 비관적 인식론을 부여하는 메타포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반대다. ‘음식남녀’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 음식은 생의 기쁨과 약동과 살아 있음을 경험하게 하는 산 감각이다.

함돈균은 문학평론가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현재는 사회디자인학교 ‘미지행’의 디렉터다. 200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한 이래 문학 고유의 정치성과 예술적 전위를 철학적 시야로 결합시키는 이론·문학사 연구와 현장 비평에 매진해왔으며 다수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