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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인문학 @장석주

2019년 8월 13일 — 0

음식을 몸에 들이는 일은 ‘육체적인 것’이지만 사실은 다분히 마음과 관련된 일이다. 배부름의 원초적인 행복이 가져다주는 나를 빚는 일이다.

text 장석주

먹는 것은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파릇한 식욕을 가져야 한다. 음식을 꾸역꾸역 삼켜 배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주린 위를 채워 포만감을 넘어서 감각적 기쁨을 취하는 행위다. 나는 딱히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탓에 외국에 체류할 때 낯선 음식도 곧잘 먹는다. 정말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 토속 요리, 각 지방에서 나온 제철 재료로 만든 전통 요리들이다. 한반도 남부 지역인 통영에서 봄날에 찾아 먹는 도다리쑥국이나 보리 싹이 날 때 먹는 전라도 목포의 홍어애국, 강원도 정선이나 그보다 더 깊은 산골짝에 들어가 한상차림으로 나온 산채백반 같은 것이 기억에 남는 지방 음식들이다. 밥맛 없을 때 일부러 찾아가 먹고 싶은 음식들이다. 그것들은 미각을 일깨우고 감각적 기쁨을 솟구치게 해서 결국 팍팍한 삶을 더 힘차게 살아보고 싶게 원기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제철 재료를 조리해 건강에 유익하고 먹기에도 좋은 음식을 몸에 들이는 일은 즐거운 경험이다. 이 미각의 풍요함이 만드는 기쁨은 그 무엇과 바꾸고 싶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는 것은 우리가 삶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 중 하나일 테다. 비 오는 날엔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햇감자를 채 썰어 넣고 끓인 수제비를 간절하게 먹고 싶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아직 꽃샘추위가 매운 계절엔 더운밥과 묵은지에 고등어를 통째로 넣어 찜한 것을 먹고 싶고, 복날 땡볕 더위에 시달려 기운이 약해진 여름날엔 민어회 몇 점과 여름 보양식으로 꼽는 국물 맛이 깊은 민어탕을 끓여 땀 삐질삐질 흘리며 먹고 싶고, 천지간에 단풍이 다 지고 초록 식물은 덧없이 시드는 입동 무렵 동파육을 안주 삼아 중국술 몇 잔을 삼키고 싶고, 시골집 장지문 창호지를 싸라기눈이 모래알처럼 치는 저녁엔 흰밥에 매운 갈치조림을 먹고 싶다. 내 식욕이 유별나다고 할 수는 없다. 좋은 사람과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단지 한 끼니의 식사를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다. ‘식구食口’란 한 집에 살며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면 식구가 아니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식사는 일종의 가족이 치르는 의례다.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을 때 우리는 감각적 경험을 공유하면서 관계의 결속력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이다. 만일 한 집에 살면서 식사를 따로 한다면 그것은 가족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무의식의 신호다. 식구들이 아침을 먹고 다 집을 나간 뒤 느지막이 일어나 혼자 식사를 하고, 식구들이 다 잠든 한밤중에 혼자서 저녁을 주섬주섬 찾아 먹는다면 이는 스스로 ‘불량 가족’임을 선언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을 먹을까. 우리는 끼니때마다 이런 고민과 마주친다. 선택지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런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음식을 고를 때 맛을 따지고 ‘가성비’를 따진다. 그런데 무엇을 먹을까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취향일까? 그 취향에 작동하는 ‘소화기관의 무의식’을 넘어서서 ‘문화적인 것’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음식을 제 몸 안으로 들이는 일은 동물의 숙명이다. 음식을 우리 몸으로 들이는 일은 몸이 요구하는 영양분을 제공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감각적 기쁨과 함께 오성悟性의 확장에 기여하는 일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라, 당신의 몸이 환호작약할 테니! 오늘 점심도 육즙이 번들거리는 스테이크나 돼지고기와 양파를 썰어 넣고 갖가지 해물과 곁들여 춘장에 버무려 익힌 짜장 소스를 듬뿍 얹은 짜장면, 완벽한 오믈렛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했다. 그렇게 배를 채우면 우리는 허기져서 조급하고 초조할 때와 견줘 느긋함과 여유를 찾는다. 위가 채워진 뒤 우리는 무의식 중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우려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배가 채워진 뒤 느끼는 행복감은 “동물들의 깊고 영원한 원초적인 행복”(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우리는 확실히 식사 뒤에 타인에 대해 더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고, 모든 사안에 더 관대한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이즈막 TV 방송이나 유튜브 등에서 먹는 것을 보여주는 ‘먹방’이 대유행이다. 연예인이나 보통 사람이 음식을 먹는 걸 공들여 찍어서 보여주는데, 대개는 먹는 모습이 건강해 보이지만 더러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삼키는 게 역겨울 때도 없지 않다. 왜 이 시대에 ‘먹방’인가? 가상현실과 터치스크린, 폐쇄 회로에 갇힌 채 살아가는 인간들이 실제로 음식을 먹는 것보다 타인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들여다보며 대리만족을 취한다는 점이 그리 놀랍지는 않다. 사람들은 몸을 움직여 이동하고 돈을 쓰며 음식을 주문해 먹는 수고를 감당하는 것보다 그저 남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쾌락을 찾는 것이다. 잠든 식욕을 깨우고 침샘을 자극하는 ‘먹방’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때 그것은 음식 포르노로 전락한다. 음식을 몸에 들이는 일은 ‘육체적인 것’이지만 사실은 다분히 마음과 관련된 일이다. 섭식 행위는 몸과 마음을 다 아우르는 심신상관적인 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의 행복’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지금 대유행하는 ‘먹방’은 음식을 매개로 저 너머에서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나는 ‘먹방’보다 직접 먹는 걸 더 좋아한다. 아무리 코를 박고 ‘먹방’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허기진 속을 채울 수가 없으니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존재란 뜻이다. 이렇듯 음식과 생존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다.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우리가 누구인가를 드러낸다. 음식을 먹는 것은 ‘문화적인 것’의 일부이고, 우리의 식성과 취향, 은연중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일인 까닭이다. 밥 먹는 것을 절집에서 공양供養이라고 하는데, 이는 음식물로써 우리 몸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밥은 우리 자신을 공양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빚어서 만드는 일이다. 밥을 먹으면서 생각하느니, 이것은 주린 위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서 섭식을 통한 수행이고, 섬김이며, ‘나’를 빚는 과업인 것이다.

장석주는 책과 버드나무를 사랑하는 시인이자 문장노동자, 산책자다. <햇빛사냥>,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등의 시집과 <슬픔을 맛본 사람만이 자두 맛을 안다>, <은유의 힘>,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등의 산문집을 펴냈다.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지금은 파주에 살면서 책을 쓰고 강연을 하며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