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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로 만든 화병

2019년 7월 10일 — 0

종이와 천, 철사로 자기를 빚었다. 새로운 선이 자기에 그어졌다. 이영아의 도자기다.

이영아 작가는 날카로우면서 부드러운 선을 자기로 풀어낸다.
이영아 작가는 날카로우면서 부드러운 선을 자기로 풀어낸다.

공예가 이영아 작가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흰 벽면 때문인지 진열된 흰 자기 때문인지 단층의 넓은 작업실에 햇살이 하얗게 들이친다. 작업실처럼 그녀의 작품에도 빛이 가득 고인다. 빛이 가득 고이는 만큼 그림자도 짙어진다. 칼로 도려낸 듯한 날카로운 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자기의 원형은 화려한 고려청자나 단아한 조선백자에 있다. 둘 다 우아한 곡선이 근간이다. 이영아 작가의 자기는 백자가 바탕이라 기본적으로 단정한 곡선 형태를 띤다. 다만 종이를 반으로 접은 뒤 끝을 따라 손톱으로 꾹 눌러 민 것 같은 날카로운 주름이 둘러져 있다. 여기서 그녀만의 현대적 감각이 돋아난다. 단아한 형상보다 잘 다린 단정함에 가깝다. 겉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고 스펀지로 면을 매끄럽고 날카롭게 다듬어내서다. 무엇보다 형태를 종이로 잡아내기 때문이다. “저는 철사나 천, 종이로 모델링을 해요. 도예가이지만 디자인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새로운 시도는 보는 이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물레를 돌려 다양한 형태와 표현을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새로운 재료를 대입하거나 형태를 디자인하면 해당 재료의 물성이 자기에 투영된다. “전 종이나 다른 재료가 편해요. 만드는 걸 좋아해서 선을 그리기보다 직접 표현해야 인식이 돼요. 화병이나 그릇의 비율도 종이를 엄청나게 접어서 나온 결과물이죠. 그래야 새로운 선의 감각이 키워져요.” 종이로 만든 형태가 흙으로 빚어지면 무게감이 생기고 선이 자연스러워지면서 고급스러워진다. 긴 접시도 종이로 양 끝을 날카롭게 세워 올려 디자인을 잡지만 흙으로 빚어 가마에 넣고 구우면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끝이 처져 곡선으로 휘어진 결과물이 나온다. 디자인과 공예가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다. “의도하지 않은 선인 거죠. 도예 작업의 매력이에요.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결과를 알 수 없어요.”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검수하고 있는 이영아 작가.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을 검수하고 있는 이영아 작가.
가마에 들어가기 전의 컵들. 밑면에는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이런 날카로운 모서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가마에 들어가기 전의 컵들. 밑면에는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이런 날카로운 모서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이영아 작가의 초기 작품은 지금보다 더 크고 길었다. 어떤 작품은 종이학처럼 바닥이 좁은데 선과 면이 날개처럼 길게 뻗어나갔다. 새로운 선 하나를 만드는 데 몇 개월씩 걸렸다. 한국적인 선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복의 선이나 매듭, 주름, 그리고 기와의 곡선을 차용했다. 그러고 보니 댕기머리 같아 보이던 무늬가 한복의 섶을 여러 개 겹친 형태로 보였다. 컵에서는 소매의 주름도 보였다. 이런 선들은 유광 작품이 아니라 무광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하지만 겉면에 유약을 바르지 않으면 실용성이 떨어진다. 무광은 마모가 생기고 매끄럽지 않아 사용이 불편하다. 그렇지만 사용하는 순간 일상이 더 특별해진다. 그녀는 최근 식기 라인을 고민하고 있다. 지난해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그릇 가게이자 갤러리인 포터리밈에서 전시를 하며 청담동에 있는 한우 오마카세 레스토랑 부로일의 식기를 일부 작업하면서 더 구체화됐다. 자신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코스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식기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면서 배운 점도 많다. 그릇의 실용성을 더 골몰했고 작품에 투영되는 자신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 풀어낼지 고민했다. 그녀는 ‘작품이 본인과 닮았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도자기와 같다는 말의 의미를 자주 곱씹어요. 저는 도자기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요. 하나하나 제 손길을 거쳐서 나오는 게 좋아요.” 그렇게 작업에 매진하면 작품은 당연히 작가를 닮는다. 아니면 작가가 작품을 닮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양주 진접읍에 있는 이영아 작가의 공방.
남양주 진접읍에 있는 이영아 작가의 공방.

edit 안상호 — photograph 최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