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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의 의미 @정세진

2019년 6월 10일 — 0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온 N개의 음식 문화.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이 공존해온 음식의 세계.

text 정세진

오래전 필자는 JTBC 예능 프로그램인 <비정상회담>에서 ‘빵 터지는’ 장면을 보게 됐다. 그리스 출신의 출연자가 황소와 간통해 미노타우로스를 낳은 왕비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관계 행위를 “라면을 먹었어요”라고 표현한 것이다. 방송에서 차마 하기 힘든 말을 돌려 말하는 센스도 감탄스러웠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온 이 청년이 한국 문화에 대해 정말 제대로 알고 있구나 생각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20여 년 전 영화 <봄날은 간다>를 모른다면 한국의 국민 간식이면서 한 끼 식사 대용으로 사랑받는 라면이 왜 19금 표현으로 쓰이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음식 문화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별것 아닌 듯하지만 낯선 문화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분석을 가능하게 한다. 문화인류학자인 마빈 해리스가 문화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소재 역시 다름 아닌 ‘음식’이다. 그의 저서인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서 중동권의 돼지고기 금기에는 단순한 취향이나 종교 이외에 경제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과 아시아인의 상당수가 유당불내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유가 식재료의 하나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설명은 그 당시만 해도 상당히 신선한 분석이었다.

당장 서양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성경만 하더라도 다양한 음식이 등장한다. 아담과 이브를 생명의 나무에서 멀어지게 한 선악과가 그 시작이다. 우리는 보통 선악과가 사과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중동에서 귀한 과일로 취급받던 무화과였다는 설도 있다.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는 생뚱맞게 바나나로 둔갑했다. 어린 양은 신에게 바치는 귀한 제물이었으며,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성물로 남아 있다. 종교를 막론하고 생명을 이어주는 음식은 신성시된다. 그러나 음식이 단순히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라면 인류가 이처럼 다채로운 음식을 발달시켜온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성스러운 세계에서 세속으로 내려온 음식은 각 지역의 기후와 풍토, 그리고 사람들의 취향을 반영하며 개성과 특이점을 갖게 됐다. 이런 개성은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각종 예술 작품에도 등장하며 인류 문화의 한 부분을 이루기 시작한다.

가령 중국 춘추 시대 고사에서 초나라 성왕은 반란을 일으킨 아들에게 마지막 소원으로 곰 발바닥을 먹고 싶다며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질기고 거친 곰 발바닥은 며칠 이상 푹푹 삶아야 먹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이 틈을 타 군사를 일으킬 계획이었다는 것을 아들은 간파한 것이다. 초한전 속 항우의 여인 우희는 그의 기운을 북돋워주기 위해 닭고기와 자라를 고은 탕을 대접했으며 오늘날 이 요리는 ‘패왕별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절세미녀 양귀비가 즐겨 먹었다는 남쪽 지역의 여지 열매는 당나라의 국운을 기울게 한 과일로 기억된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대추야자와 각종 달콤한 과자 등 중동 지역의 먹거리들은 호화스러웠던 당시의 궁중 문화를 말해주고 있다.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는 문화의 불모지로 불리던 알프스 북쪽 지역의 식탁에 포크를 처음으로 올려놓은 장본인이며 ‘오트 퀴진’으로 통하는 미식 왕국 프랑스 요리를 있게 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풍성하게 자라고 있던 고추와 아보카도, 옥수수 같은 농산물들은 서양뿐 아니라 전 세계 음식 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 왔다. (가령, 당장 오늘날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우리나라 식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구한말 이후 낯선 서양 음식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이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존재하게 됐다. 소설가 김탁환은 신문물에 눈뜨기 시작한 고종 임금과 그의 독살설을 소재 삼아 <노서아 가비>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외국 문화를 일찍 접한 부유층들은 다방이며 호텔을 오가며 마실 줄도 모르던 쓴 커피와 홍차를 즐겼다. 과장이 좀 섞여 있기는 하지만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등장인물들도 무지개떡을 닮은 카스텔라와 단팥빵 같은 ‘서양 떡’ 맛에 신기함을 느낀다.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 소설들을 보면 당시 빠르게 변화하던 음식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당대의 멋쟁이로 통하던 시인 이상은 초콜릿을 ‘초콜레이트’라고 부르는가 하면 29세의 나이로 죽기 전 “레몬 냄새가 맡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채만식 소설 <태평천하> 속 윤직원 영감의 어린 첩은 우동과 탕수육을 시켜 먹고, <운수 좋은 날>의 가난한 인력거꾼 김첨지는 돈을 벌자 아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던 설렁탕을 사가지고 귀가한다. 이후에도 해방과 전쟁 등 복잡한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의 식생활은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해왔다.

한국의 음식 문화를 이야기할 때 주로 나오는 소재로는 영양학적 우수성이나 화려한 궁중 문화, 검약을 지키던 선비들의 정신 등이 언급된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요소들만이 음식 인문학의 전부는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꿀꿀이죽은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의 산물이지만, 오늘날 부대찌개라는 메뉴로 새롭게 거듭났다. 비슷한 베트남을 대표하는 쌀국수 ‘퍼’ 역시 프랑스인들이 먹고 버린 ‘포토푀’에서 비롯된 음식이다.

역사학자가 영광스러운 역사만을 기록하지 않듯, 심리학자도 인간 내면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함께 파헤치고 탐구한다. 누군가는 인간의 삶을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모자이크라고 표현했다. 음식의 문화사 역시 검소함과 부지런함 외에 탐욕과 잔혹함, 극단적 예술성의 추구 등 여러 가지 요소가 혼재해 있다. 달고 짜고 맵고, 때로는 ‘남녀가 함께 먹는 라면’ 같은 은밀한 금기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음식 인문학의 매력이 아닐까.

정세진은 197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으며 글쟁이로 살기 전에 세상 공부를 먼저 하고 싶어 기자를 선택했다. 산업, 증권, 국제경제 등의 분야를 거치다 지금은 음식, 문화, 라이프스타일 글을 주로 쓰고 있다. 낯선 문화와 새로운 맛을 탐색하는 자칭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다. 저서로는 <식탐일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