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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준의 슈퍼막셰

2019년 7월 26일 — 0

LA와 파리의 식료품점이 묘하게 뒤섞인 슈퍼마켓이 문을 열었다. 국내 파인다이닝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형준 셰프의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의 시간을 엿봤다.

봉에보와 슈퍼막셰의 간극

슈퍼막셰 바이 에피세리 꼴라주(Supermarchéé by Épicerie Collage). 한남동 주민센터 맞은편, 주소지로는 한남동이지만 상권으로는 사실상 이태원의 시작점에 있는 옛 봉에보 자리에 들어선 구르메 플레이그라운드다. 슈퍼막셰의 준비 소식은 올해 초 정식당과 무오키 등 스타 레스토랑의 주방 설비를 도맡고 있는 유니트키친의 김희준 대표를 통해 처음 접했는데 이형준 셰프의 레스토랑도 대부분 김 대표가 맡았다. 그가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글쎄, 이형준 셰프가 슈퍼마켓을 한대요.” 셰프의 슈퍼마켓이라니, 신선한 느낌이기는 했다. 슈퍼막셰는 프랑스어로 슈퍼마켓이다. 슈퍼마켓이라는 상점의 시스템은 식료품을 셀프서비스로 판매·운영된다. 슈퍼막셰도 그렇다. 1층에는 매장 주문과 포장이 가능한 다양한 델리 섹션이, 2층에는 바와 함께 주문 후 진동 벨로 찾는 픽업 반납 서비스의 120석짜리 다이닝 홀이 있다. 하지만 봉에보나 수마린, 그랑 아무르의 이형준을 생각하면 의아했다. 상당히 콘셉추얼한 파인다이닝과 다이닝 레스토랑을 운영한 그가 자신의 봉에보 자리로 돌아왔는데 슈퍼마켓이라니. 새로운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그래서 가오픈 기간 슈퍼막셰를 찾았다. 그곳은 상당히 독특한 공간이다. 빵집과 정육점, 아이스크림 가게, 양과자점, 냉동식품 등으로 이뤄진 슈퍼마켓인데 대신 가공식품이 아니라 파티시에와 샤르퀴티에, 프렌치 요리사가 주방에서 직접 만든 조리식품을 판다. 국내에서는 찾기 힘든 진정한 에피세리다. 사실 서울의 파인다이닝은 전환기를 맞고 있다. 임정식 셰프가 정식바를 정식카페로 리뉴얼하거나 평화옥을 열고, 피에르가니에르 서울마저 런치 가격을 낮췄다. 파인다이닝 신의 셰프가 B급 구르메에 도전하는 경우도 늘었다. 서울의 파인다이닝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경기 침체 및 인건비 상승과 맞물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어서다. 두 달 전 임정식 셰프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실력 있는 젊은 오너셰프들이 수익이 계속 떨어지는 게 자기 탓이라고 많이 자책해요. 하지만 지금은 유명 레스토랑도 다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시기죠.” 본래 파인다이닝 자체가 수익보다는 명예에 가깝지만 시장의 한계 때문에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하는 시기가 왔다. 이 시점에서 이형준 셰프의 새로운 시도는 꽤 흥미롭다. 천장이 뚫려 다이닝 홀의 노랫소리가 여과 없이 들어오는 사무실에서 이형준 셰프가 말했다. “레스토랑은 셰프와 셰프의 요리, 서비스, 인테리어 등 상당히 복합적인 요소가 한곳에 몰려 있어요. 하지만 주방에서 요리만 전념하다 보면 요리 자체에 너무 갇혀요. 저도 그렇게 된 시간이 길었죠. 물론 그 안에서 행복하고 또 어느 순간에는 불행하죠. 마치 마약 같아요.” 봉에보를 시작으로 주방에서 보낸 시간이 10년이 지났을 때 그는 정의 내리기 힘든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런 생각을 했죠. 내가 요리를 왜 시작했지? 아, 난 레스토랑이라는 공간이 좋았지.” 인생의 반환점이 시작된 것이다.

셰프의 반환점

이형준 셰프는 조각가 할아버지와 순수미술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자연스럽게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고,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떠난 런던에서 첫 번째 전환점을 맞았다. 우연히 방문한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의 공간에 매료된 것이다. 그는 진로를 스위스 호텔학교로 바꿨고 이후 파리 르 코르동 블루에서 요리를 배웠다. “레스토랑이라는 공간에 제가 있는 것 자체가 좋았어요. 공간을 만들고 꾸미는 일이 행복했죠.” 단순하지만 세련된 봉에보도, 본격적인 파인다이닝 스타일의 메종 드 라 카테고리도, 잠수함 콘셉트의 수마린도 모두 이형준의 감각으로 완성된 공간이었다. 수마린의 메인 컬러인 민트나, 민트 색상에 골드 링이 들어간 수마린의 시그너처 디너웨어인 퓌어스텐베르크의 ‘에스테Este’ 컬렉션에 대한 강한 애착도 아마 그의 공간과 디테일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되었을 거다. 하지만 정체된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수마린을 하면서 백화점에 그랑 꼴라주 매장을 오픈했어요. 둘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는데 2년이 지날 때까지 뭐 하나 제대로 못했어요. 그러면서 인생의 그래프를 다시 그렸죠.” 젊은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써보라고 권유한 인생의 목표와 그래프는 서른까지였다. 당시 쓴 내용은 모두 현실이 됐다. 하지만 서른 이후의 계획은 없었다. 그래서 서른 중반에 다다랐을 때 마흔까지의 그래프를 다시 그렸다. 수마린을 그만두고 새로운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의 6년과 수마린을 계속 운영했을 때의 6년은 큰 차이가 났다. “새로운 시도를 하면 제가 달라졌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는 6년이 지나도 똑같았죠. 어차피 저는 셰프잖아요. 자기 요리를 하는 사람이 셰프인데 그렇다면 10년 후에 다시 시작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죠.” 그리고 이형준 셰프라는 사람이 주방에 있는 레스토랑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그가 수마린이라는 여전히 성능 좋은 잠수함의 방향키를 놓은 이유였다. 그 자리에는 동명의 파리 호텔과 프랑스 황금기의 맥심 드 파리에 영감을 받은 그랑 아무르가 들어섰다.

두 번째 에피세리 꼴라주

그랑 아무르를 열고 신세계백화점의 그랑 꼴라주를 리뉴얼하면서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모든 공간을 한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하도록 의도했다. 공연이 있는 살롱인 그랑 아무르, 테라스 형태라 날씨가 좋으면 생각나는 에피세리 꼴라주, 밥과 함께 먹는 프렌치 경양식인 그랑 꼴라주. 콘텐츠가 있는 레스토랑과 외식 공간으로의 변신이었다. 그리고 에피세리 꼴라주의 초창기 콘셉트를 다시 꺼내들었다. “에피세리 꼴라주는 한 번 리뉴얼을 했어요. 처음에는 이름처럼 에피세리 콘셉트였죠. 그린 요거트와 퀴노아나 비트 등 슈퍼 푸드를 활용한 건강한 샐러드를 팔았어요. 인테리어도 지금의 슈퍼막셰처럼 하양, 빨강, 파랑, 초록을 메인 컬러로 썼어요. 대신 슈퍼막셰는 건강함을 뺐죠.” 당시에는 한남동이 유동 인구가 적은 한적한 동네라 찾는 이도 드물어 레스토랑 형태로 바꿨고, 그 미련이 슈퍼막셰로 이어진 것이다. 슈퍼막셰를 구상한 건 올해 1월부터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롤모델이자 호텔 코스테와 레스토랑 르 조르주, 카페 라베뉴 등 파리 외식업의 큰손인 코스테 형제처럼 감각적인 부티크 호텔을 구상했다. 1층에는 슈퍼마켓이, 2층에는 바와 다이닝 홀이, 3층에는 객실이 있는 공간이었다. 세탁소도 넣고 싶었다. 하지만 객실 수가 너무 적어 수익성이 현저히 떨어져 호텔의 꿈은 뒤로 미뤘다. 대신 각각의 델리나 메뉴가 개별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콘셉트에 더 치중했다. 인테리어도 입구에 들어섰을 때 한눈에 어떤 형태의 매장인지 알아볼 수 있도록 꾸몄고, 2층은 학창 시절의 학교식당처럼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공간에 특유의 디자인을 더했다. 로고뿐만 아니라 셔츠와 앞치마, 모자, 접시 등 음식이 아닌 다양한 상품도 함께 제작했다. “좋은 슈퍼마켓은 섹션이 잘 구분되어 있잖아요. 그것처럼 델리와 젤라토, 베이커리, 실온 및 냉장·냉동 제품, 미트, 굿즈로 분류했어요. 요리도 치킨, 파니니, 도너츠, 후무스, 스파게티처럼 군을 나눴죠. 파생과 확장 가능성을 염두에 뒀죠.” 이후 디자인 작업에 매달렸다. 사람들이 편하게 들렀다 가는 메트로 스타숑(Métro Station)과 슈퍼막셰 사이에서 고민하다 이해가 쉬운 슈퍼막셰로 이름을 정했다. 건물이 음지에 있어서 실내가 환해야 했고 낮에 와도 기분 좋은 느낌을 받도록 외벽과 내부를 하얀색으로 칠했다. 때마침 봉에보나 수마린 시절 함께한 이들이 프랑스나 호주에서 경험을 쌓고 돌아오는 시점이었다. 파티시에 김나운과, 라 카테고리와 수마린에 함께 있었던 홍한결, 주영기 등이 합류했고, 그랑 아무르는 김건우 셰프에게 셰프 직함을 넘겼다. 메뉴를 개발할 때도 자라보다 H&M에 가깝게 신경 썼다. 직원들과 함께 런던과 파리로 벤치마킹도 다녀왔다. 키친에서 바로 조리한 음식도 판매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매장에서 만든 밀키트 제품을 늘려가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학교식당이나 기내식, 마트에서 파는 음식처럼 빨리 조리하거나 데워서 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어요. 요즘 파리에도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의 셰프들이 이런 포장이나 직접 데워서 먹는 형태의 요리를 만드는 게 유행하고 있어요. 전자레인지로 바로 데워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있는데 저희는 전 단계죠.” 슈퍼막셰는 이게 끝이 아니다. 곧 테라스를 오픈할 예정이고, 반려견을 위한 간식이나 식품도 구상하고 있다. 매장에 반려견 출입이 가능해 강아지를 데려오는 손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뿐만 아니다. 파리의 중식 살롱 콘셉트를 접목한 델리도 생각하고 있다. 오전에는 그랑 아무르를, 오후에는 슈퍼막셰, 저녁에는 그랑 꼴라주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주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아이디어가 멈추지 않는다. “당분간 파인다이닝 셰프로 주방에 설 생각은 없어요. 제 나이에 맞는, 지금 해야 하는 감각적인 공간과 스타일의 요리에 몰두하려고요. 주변에서 이제 더 이상 뭘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니면 컨설팅을 하는 게 어떻겠냐며 말려요. 혼자서 하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많지만 파인다이닝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세련되게 소비할 수 있는 요리와 공간에 집중하려고 해요.” 그의 멈출 수 없는 시간이, 역동적임이 지속되고 더해질 공간이 바로 슈퍼막셰 바이 에피세리 꼴라주다.

Dining of Supermarché
1. 부채살 스테이크와 프라이, 새콤한 살사 베르데 소스.
2. 매장에서 직접 구운 잉글리시 머핀을 사용한 햄앤치즈 파니니.
3. 오스트리아 길거리 샌드위치로 브라트부르스트 소시지에 양파와 커리 파우더가 들어간 샌드위치.
4. 양파와 비프스톡, 브랜디, 치즈, 바게트 크루통을 사용한 어니언 수프.
5.  토마토소스와 양파, 올리브유, 오레가노를 이용한 포모도로 스파게티.
6. 자몽과 감귤의 상큼함이 묻어나는 골든 에일 ‘선데이 모닝’.

슈퍼막셰 Supermarché
· 프라이드치킨 1만9000원, 크랩로즈 스파게티 1만6000원, 부채살 스테이크 2만8000원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222-26
· 매일 오전 11시~오후 10시, 금·토요일 오전 11시~자정(바 타임 오후 9시 30분~자정)
· 02-790-5949

edit 안상호 — photograph 박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