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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닌, 뉴욕의 한식 @정재훈

2019년 6월 14일 — 0

뉴욕에서 한식은 자생했다. 거기에 한식 세계화의 영향은 없었다. 한식이 건강식이라는 것도 우리의 편견에 불과했다. 그보다는 뉴욕의 한식 요리사와 뉴요커의 개방성 덕분이었다.

text 정재훈 — edit 안상호 — cooperate Atoboy

익숙하면서 낯선 뉴욕의 한식

1980년 뉴욕의 우래옥과 2017년 뉴욕의 아토보이는 어떻게 다른가. 별점만으로는 알 수 없다. 두 곳 모두 매우 좋음을 의미하는 별 두 개를 받았다. 하지만 공통점은 거기까지다. 차이점이 더 많이 눈에 띈다. 저명한 푸드 라이터 미미 셰라턴의 1980년 5월 30일자 우래옥 리뷰에서 가장 호평을 받은 음식은 불고기였다. 구절판, 생선전, 닭구이, 혀밑구이, 비빔냉면, 만둣국, 잡채, 김치, 깍두기도 추천 메뉴에 올랐다. 2011년 11월부터 <뉴욕 타임스> 레스토랑 평론가로 활동 중인 피트 웰스의 아토보이 리뷰에는 불고기는 등장도 하지 않는다. 대신 중심에 선 것은 반찬이다. 추천 메뉴도 이전과는 결이 다르다. 연근, 농어, 돼지감자, 문어라고 적힌 것만 보고서는 어떤 음식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본문의 설명을 읽고 나서도 낯설다. 연근 하면 떠오르는 건 간장조림이지만 아토보이의 연근은 그게 아니다. 부드러운 두부 조각들 위에 연근을 올리고 고추기름과 참기름을 뿌려낸 요리다. 농어는 잘게 깍둑썰기한 키위에 민트와 발효 봄마늘을 섞고 그 아래 농어 타르타르를 깔아낸 요리를 의미한다.
지난 4월 아토보이를 직접 방문했다. 익숙하면서 낯설었다. 46달러에 반찬 세 가지를 고르면 밥과 김치와 함께 한 상이 차려진다. 그런데 막상 구성을 보면 샐러드, 따뜻한 전채 요리, 주요리에서 하나씩 고르는 미국식이다. 먹는 내내 한식과 미국식 사이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 처음에 김부각이 나왔을 때는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한식이었는데 바로 다음에 나온 라디치오와 부라타 치즈, 올리브를 섞어낸 샐러드는 모양을 보면 이탈리아식 같기도 하고 맛으로는 한식 같기도 했다. 엔다이브에 새우 살을 묶어 어묵처럼 튀겨낸 음식, 성게 알과 김, 퀴노아를 얹은 부드러운 달걀찜은 다양한 식감의 대비로 감각을 자극한다는 면에서는 한식이면서도 한식당에서는 맛본 적이 없는 식감의 조합이었다. 따로 먹으면 요리인데 밥과 함께 먹으면 반찬이다. 여행하다 보면 분명히 처음 만났는데 오랫동안 알고 지낸 걸로 착각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아토보이의 한식이 딱 그랬다.

한식은 건강식인가

염분 함량이 높다는 걸 제외하면 동물성 지방을 적게 먹고 채소와 밥, 국수, 당면과 같은 전분질 음식을 많이 먹는 한식은 현대인에게 딱 맞는 식단이다. 미미 셰라턴은 1980년 우래옥 리뷰 서두에서 그렇게 소개했다. 반면에 2017년 피트 웰스가 아토보이에 대해 쓴 글에는 특별히 한식이 건강식이라고 느껴질 만한 대목이 없다. 아토보이의 한식은 짠맛이 강하지 않다. 하지만 메뉴는 충분히 기름지다. 달걀찜, 갈비, 삼겹살, 프라이드치킨은 1980년대 건강식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꽃, 단지, 정식, 뉴요커에게 인기 있는 한식당 어느 곳의 메뉴를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현대 뉴욕의 한식 밥상은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으로 가득하다.
건강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 자체도 달라졌다. 전에는 동물성 지방이 건강에 무조건 해롭다고 몰아붙였지만 이제는 동물성 지방을 악마화해서는 곤란하다는 반론이 거세다. 2016년 <영국의학저널>에 동물성 지방을 식물성 지방으로 대체한다고 해서 심장병 사망률이 감소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가 실리면서 논란이 더 커졌다. 2018년에 발표된 또 다른 연구에는 탄수화물을 너무 많이 먹어도 사망률이 증가하고 너무 적게 먹어도 사망률이 증가하지만 탄수화물 섭취량이 전체 칼로리의 30% 이하로 낮을 때 기대수명이 제일 크게 단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볼 때마다 전에 직장 동료였던 그리스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리스 음식은 지중해 식단이니까 건강에 좋지 않냐고 물으니 자신은 평생 그것만 먹고 살쪄서 건강이 나빠졌다며 한탄했다. 어느 나라 음식이든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 골고루 먹되 과식을 피한다면 어느 나라 식단이든 건강식이 될 수 있다. 한식이 특별히 더 건강에 유익하거나 해가 된다고 보기 어렵다.
1926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미미 셰라턴은 93세인 지금도 푸드 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2018년 10월 방송된 팟캐스트에서 한 청취자가 직장 일로 바빠 집에서 자녀에게 요리를 해줄 수 없다고 슬퍼하면서 조언을 구하자 셰라턴은 이렇게 답했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게 제일 중요하다.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면 누가 그 음식을 요리했는가는 상관없다.” 당연히 그 음식이 어느 나라 음식인지도 중요치 않을 것이다. 1980년 우래옥 리뷰를 쓴 미미 셰라턴과 지금의 그녀는 다르다. 아직도 한식=건강식을 내세워 세계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한식진흥원 관계자들이 뉴욕에 가서 한식을 맛보고 미미 셰라턴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길 바란다.

누구를 위한 한식인가

지난 3월 맨해튼 서쪽 끝에 문을 연 거대 복합 쇼핑몰 허드슨 야드 5층에 박은조 셰프의 파인 캐주얼 한식당 가위가 있다. 데이비드 장이 운영하지만 박은조 셰프에게 전권을 위임한 130석 규모의 대형 레스토랑에는 이름처럼 가위가 식탁에 등장한다. 금색으로 번쩍이는 멋진 전용 가위로 한국에서 가져온 기계로 직접 뽑은 가래떡을 잘라준다. 돌돌 휘감은 모양이 특이하지만 고추장 잼을 바른 음식을 보면 떡꼬치가 바로 떠오른다. 서버가 처음 한 조각을 자르는 시연 뒤에 나머지는 손님이 직접 잘라 먹도록 한다. 점심 세트 메뉴로 회덮밥이나 쫄면과 비슷한 콜드 스파이시 누들을 시키면 야채튀김과 국이 함께 나온다. 서울의 가온, 뉴욕의 페르 세, 다니엘, 모모푸쿠 코에서 경력을 쌓은 박은조 셰프가 분식을 바탕으로 구현한 파인다이닝이다.
음식은 사회에서 만들어진다. 누가 만들고 누가 먹는 음식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정부에서 한식 세계화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뉴욕의 한식을 이끈 것은 한국 정부가 아니라 뉴욕의 요리사들이다. <뉴욕 타임스>의 음식 평론가 리가야 미샨이 2017년 칼럼에 쓴 것처럼 현재의 아시아-미국식 요리 트렌드는 한국계 미국인 데이비드 장이 2004년 뉴욕에 모모푸쿠 누들 바를 열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데이비드 장은 그의 요리가 한식에 일부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미국식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가 뒤이어 문을 연 쌈 바에서 동그란 상추 또는 밀전병에 오리고기를 싸서 먹다 보면 한식과 중식에 영감을 받은 미국 음식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뉴욕 사람들이 단지 아시아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데이비드 장의 식당에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까? 모모푸쿠 누들 바에서 매운 소고기 라멘을 먹고 나서 의문이 풀렸다. 일본의 전문점에서 먹는 라멘 맛보다는 미국의 마트에서 판매하는 인스턴트 라멘 누들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키조개에 파인애플과 바질 씨앗을 넣어 만든 모모푸쿠 코의 차가운 국물 요리는 맛은 전혀 달랐지만 미국 마트에서 파는 바질 씨앗 음료를 연상시켰고 2018년 차갑게 서빙하는 것으로 커다란 화제가 되었던 콜드 프라이드치킨은 닭강정을 생각나게 했다. 대중 음식을 파인다이닝으로 소환하는 데이비드 장의 음식을 통해 뉴욕에서 사랑받은 예술가 앤디 워홀의 작품 세계를 보는 듯한 상상에 빠졌다. 앤디 워홀이 캠벨 수프 캔 그림이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줬다면 데이비드 장은 라멘, 프라이드치킨과 같은 대중 음식을 파인다이닝으로 즐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엘 불리의 페란 아드리아가 큐비즘의 대가 피카소의 영향을 받아 음식의 요소를 해체하고 재결합하여 추상화한 음식을 만들어낸 곳이 카탈루냐였던 것처럼 팝아트의 중심지 미국 뉴욕이야말로 데이비드 장의 새로운 음식 세계가 축조되기에 최적의 공간이 아니었을까?
한식 세계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음식을 통해 세계에 한국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작 음식을 먹는 사람이 음식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세계관이다. 베트남과 타이, 스웨덴과 헝가리 음식을 즐긴다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깨닫게 된다. 뉴욕의 한식이 보여주는 한식은 서울의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와 별 관계가 없다. 뉴욕 시민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더 잘 보여준다. 한식을 통해 보면 뉴욕은 확실히 젊음과 창의성이 넘치는 도시다. 서울도 그런 모습이길 바란다.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