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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라그램의 유별난 ‘애식’

2019년 6월 5일 — 0

진정한 ‘애식가’로 알려진 래퍼 킬라그램이 브라더후드키친의 문을 열고 등장했다. 모난 구석 없는 동그란 몸으로 동그란 웃음을 지으며.

킬라그램은 누구라도 끌어안을 수 있는 커다란 품을 가졌다. 봉긋하게 솟는 천진한 미소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엔 의심의 여지 없이 날카롭게 꽂히는 송곳 같은 목소리가 있다. 너무 정확해서 차라리 오토튠이나 기계음이라 할 만한 목소리로 그가 ‘꺄르르르’ 웃을 때면 배를 내놓고 덩달아 자지러지고 싶어지지만, 그 목소리로 미간에 힘주어 마이크를 잡는다면 웃을 만한 상황은 결코 아닐 테다. 그가 랩으로 박자를 탈 때면 그 탄성과 통제력이 아주 정확한 찰나에 홀짝 솟아올라 허들을 넘는 우아한 종마 같기도 하다. 여하튼 킬라그램은 신에서 ‘기술자’로 통하는 래퍼다. 그런데 야무지고 정확하게 움직이는 그의 입매는 비단 웃거나 랩을 내뱉을 때만 쓰이지 않는다. 오목한 그릇처럼 벌려 맛있는 음식을 받아들이고 저작 운동을 하기 위해 오물오물 댄다. 그리고 미간을 잔뜩 구기며 이따금씩 괴로워도 한다. 그때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비음 섞인 “너무 맛있어요”다.

노포와 음식학

얼마 전 Olive 채널 <노포래퍼>의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새로운 싱글 <Let it Rain>을 발표한 킬라그램을 역삼동에 위치한 ‘브라더후드키친’에서 만났다. 미국 남부 가정식 요리를 선보이는 브라더후드키친은 래퍼 킬라그램의 ‘진짜’ 단골집이다. 들어오자마자 그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주문했다. “여기 오면 치킨&와플은 꼭 먹어야 하고요. 때에 따라 치즈 마운틴 파스타랑 다이너마이트 버거도 자주 먹는 메뉴예요.” 슬라이스 체더치즈를 ‘마운틴’처럼 쌓고, ‘다이너마이트’급 위장 파괴력을 가진 버거라니, 과연 미국 음식답다. 앞서 말했듯 킬라그램은 얼마 전 종영한 <노포래퍼>에 출연했다. <노포래퍼>는 세상 힙한 래퍼들이 노포를 방문해 음식에 담긴 철학과 세대 간의 존중을 깨닫게 하는 취지로 마련된 프로그램이다. 한국 나이로 스물여덟, 여느 한국 래퍼들과 달리 인생의 반 이상은 미국에서 자란 그가 한국의 ‘노포’를 알았을 리 만무하다. “<노포래퍼> 프로그램 덕에 한국의 노포를 알게 됐고 그 매력에 빠지게 됐어요. 출연자 중에서도 제일 막내였는데, 노포 누비Noobie(초보자)로 통했죠.(웃음)” 방송에서 킬라그램은 미국에서라면 절대 먹지 못했을 ‘닭내장탕’이나 ‘도다리쑥국’같이, 한국인조차 그 맛을 이해하기 쉽지 않을 법한 음식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음식을 대상화할 만한 기준이 없었으니 호기롭게 평을 늘어놓는 대신, 순수하게 리액션하는 것이 가능했다. 땀샘을 확장시켜 뜨거운 국물을 연신 들이켰고, 단전에서 ‘아~’ 하는 깊은 소리도 낼 줄 알았다. 미간은 그보다 더 자주 찌푸려졌다.

브라더후드키친의 인기 메뉴 다이너마이트 버거의 모습. 반을 가르니 맥앤치즈가 쭉 늘어났다.
브라더후드키친의 인기 메뉴 다이너마이트 버거의 모습. 반을 가르니 맥앤치즈가 쭉 늘어났다.

그렇다면 킬라그램이 가본 곳 중 가장 좋았던 노포는 어디였을까? 그는 “명돼지갈비”라며 단번에 대답했지만 “아, 거긴 정말이지…” 하고 감상에 젖은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원래 돼지갈비 하면 고기보다 양념에 신경 쓰는 곳이 대부분이잖아요. 그런데 거긴 진짜 좋은 고기를 써요. 사장님이 오랜 시간 노포를 운영하면서 쌓은 정과 인맥으로 제일 좋은 고기를 떼어다 돼지갈비를 만들죠. 먹는 순간 바로 차이가 나거든요.” 평소 그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 또한 한국식 바비큐다. “해외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하면 셰프가 고기를 굽고 플레이팅하고 서빙하는 과정을 거치잖아요. 한국식 바비큐는 식탁 앞 화로에서 고기를 구워 입으로 바로 직행할 수 있으니까 얼마나 효율적인지 몰라요. 익힘 정도도 자신이 조절할 수 있죠. 고기를 잘 익히면 내 덕, 못 익혀도 내 탓!” 한때는 한창 고기에 꽂혀 아침에 갔던 고깃집을 저녁에 다시 간 적도 있다. “‘사람사는 고깃집 김일도’라는 곳인데, 두꺼운 고기를 알로에로 숙성시켜 정말이지 속이 촉촉해요.” 음악을 들을 때 음정 하나, 숨소리 하나하나에서 아티스트의 의도를 헤아리고 감흥을 얻듯, 음식을 먹을 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얼마나 주인이 이 음식점을 아꼈고, 메뉴를 고심했고, 한 음식에 얼마나 많은 노고가 들어갔는지는 먹는 순간 단번에 알게 되는 거라 생각해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메뉴판을 보고 있는 킬라그램. 단골손님으로 이미 눈도장을 찍어뒀다.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메뉴판을 보고 있는 킬라그램. 단골손님으로 이미 눈도장을 찍어뒀다.

푸드 친화적 래퍼

그가 그만의 ‘음식학’을 펼치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고기에 대한 열정을 잠시 내려두고 치즈 마운틴 파스타를 먼저 입에 넣은 그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긴 한숨을 쉬었다. “아, 너무 맛있어요” 하는 탄성도 함께. 언뜻 보아도 두 뭉치는 족히 잡힐 만한 슬라이스 체더치즈의 짭조름함이 미트 칠리 스파게티와 만나 단짠의 앙상블을 이뤘다. 와플 위에 두툼한 프라이드치킨이 올라간 치킨&와플은 치킨과 와플을 숭덩숭덩 조각 내 마요네즈 소스와 블루베리 소스, 시럽 등을 곁들여 먹는 미국 남부식 요리다. 여기서 감탄은 아직 이르다. 뒤이은 메뉴 다이너마이트 버거는 거의 프로파간다 수준으로 거센 자극을 주었다. 고기 패티와 체더치즈, 베이컨 등이 일반 번 대신 맥앤치즈를 납작하게 뭉친 다음 빵가루를 묻혀 튀긴 맥앤치즈 번 사이에 놓여 있었다. 칼로 반을 가르니 치즈가 실처럼 늘어났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사상에 충직하게 부역하는 이 향락적인 음식들에 감동과 탄식이 동시에 찾아들었다. “스스로 길티 플레저를 허용하는 날이나 미국 음식이 그리울 때면 이곳을 찾아요. 미국에 가까운 맛도 맛이지만 이곳 인테리어가 미국에서는 노포에 가깝거든요. 세계 2차대전 전부터 있던 미국 가정식 음식점들이 대개 이런 분위기예요. 미국에서 자주 갔던 곳과 닮았어요.” 먹는 것을 즐기는 만큼 그는 요리에도 꽤 소질이 있다. 집에서 가장 자주 해먹는 음식은 할라페뇨 새우 오일 파스타다. 레시피를 공개하길 잠시 고민하던 그가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뗐다. “사실 이건 제가 예전에 일하던 미국 음식점의 레시피예요. 약간 자취 요리 느낌인데, 먼저 피클링한 할라페뇨랑 마늘이랑 볶은 기름에 새우를 넣고 볶아요. 시큼한 맛을 좋아하면 피클물을 좀 더 넣어도 되고요. 그다음엔 알덴테로 삶은 면을 투하하고 볶다가 마지막에 혼다시(가쓰오부시 조미료)를 약간 넣는 것이 비법이에요.(웃음) 할라페뇨의 시큼함과 새우와 오일의 고소함이 정말 기가 막히죠!” 요리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냐면 생닭을 직접 손질해 닭볶음탕을 해먹을 정도다. 인터넷 레시피만 있으면 뚝딱뚝딱 뭐든 한다. 인터넷에서 본 것 중 그가 가장 추천하는 레시피는 백종원 대표의 고기 양념장이다. “고기 먹을 때 쌈장이나 기름장이 질린다면 간 마늘 듬뿍에 참기름만 5:5 비율로 섞어서 고기를 찍어 먹어보세요. 정말 신세계가 열려요. 갈빗살 같은 도톰한 고기보다는 살치살이나 치마살처럼 얇은 고기에 제격이죠.”

브라더후드키친의 대표 메뉴들. 치킨&와플과 치즈 마운틴 파스타.
브라더후드키친의 대표 메뉴 치즈 마운틴 파스타.
치킨&와플에 고소한 아몬드를 올려 완성시키는 모습.
치킨&와플에 고소한 아몬드를 올려 완성시키는 모습.
음식이 나오기 전 2층 공간에서 카트 소품을 이용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킬라그램.
음식이 나오기 전 2층 공간에서 카트 소품을 이용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킬라그램.

애식가의 취향

한자리에서 가능한 한 많이 먹을 줄 아는 ‘대식가’, 훌륭한 음식을 찾아 먹는 ‘미식가’가 있다면, 킬라그램은 음식을 열렬히 즐기고, 취향에 맞게 적극적으로 맛을 구성할 줄 아는 ‘애식가’다. 무엇이든 본토가 제일 맛있다고, 한국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한식에 빠졌다. “B형이라서 그런가,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파는 편이에요. 음식에서도 그렇죠.” 한번은 부대찌개에 꽂혀 1일 1부대찌개를 즐겼고, 닭갈비에 꽂힌 달에는 한 달에 15번 이상 같은 닭갈비집엘 갔다. 스테디하게는 역시 한국식 고깃집을 가고 술을 자주 마시진 않지만 해장은 미나리랑 마늘 ‘팍팍’ 들어간 한국식 샤부샤부로 한다. 그런 그가 가장 선호하는 맛은 의외로(?) ‘고소한 맛’이다. 치즈의 고소한 맛, 갈비의 고소한 맛, 한식의 고소한 맛 말이다. “외국인에게 고소한 맛을 한번 설명해보실래요?” 그의 예상치 못한 기습 질문에 잠시 아연해졌다. ‘고소한 맛’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 정의를 설명하는 것이란 정녕 불가능해 보였다. “이것 봐요, 어렵죠?(웃음) ‘깊은 맛’은 ‘리치하다’는 말로 꽉 찬 맛이란 설명이 어느 정도 가능해요. 그런데 고소한 맛은 수년의 ‘단련’과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맛이거든요.” 킬라그램은 한국에 와서 ‘고소한 맛’이란 말을 알고 나서부터 음식의 ‘고소함’에 흠뻑 심취하게 됐다고 말했다. 만약 행복이란 단어를 모른다면 ‘기쁘다’ 정도의 감정에 머무르겠지만 행복이란 개념을 깨쳤을 땐 비로소 행복의 감정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 많은 단어와 경험이 쌓일수록 보다 풍부한 감정과 감각을 향유할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결국 피상적인 현상에 머무르지 않고 본질에 가닿을 수 있게 된다. 고소한 맛의 묘미를 깨치게 된 것처럼, 그는 어떤 변화와 시도를 감수하고서라도 경험을 통해 세상의 진의를 낱낱이 알고 싶은 쪽이다. 래퍼를 넘어 먹방계의 샛별이 된 것도, 현재 TBS 영어 라디오 ‘All Things K-POP’의 DJ를 맡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폭넓은 경험과 언어를 사유함으로써 비로소 말하고, 누리게 되는 것. 그가 남들보다 ‘캐치한’ 가사를 쓰는 래퍼이자, 같은 음식도 더 ‘맛있게’ 즐길 줄 아는 애식가가 된 것은 그래서일 테다.


브라더후드키친

미국식 노포 분위기의 공간에서 미국 남부 가정식을 즐길 수 있는 곳. 래퍼 킬라그램의 단골 레스토랑으로 ‘길티 플레저’가 필요할 때 제격인 곳이다.

· 치킨&와플 1만8000원, 치즈 마운틴 파스타 1만6000원, 다이너마이트 버거 1만4900원
· 서울시 강남구 봉은사로4길 22
· 정오~오후 10시, 토·일요일 정오~오후 3시, 오후 5~10시
· 02-539-1230

edit 장은지 — photograph 양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