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열기

main

DiningPeople

미카엘의 젤렌

2019년 4월 15일 — 0

방송에 나가 근사한 웃음을 짓는 미카엘 셰프는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주방보단 홀에 나가 있기 십상이고 쉬는 날엔 바이크를 타고 전국을 누빈다. 그러나 주변의 식당이 수십 번 허물어진 13년이란 시간에도 젤렌은 그 자리에 있었다.

불가리아 가정식을 선보이는 젤렌에서 미카엘 셰프의 모습.
불가리아 가정식을 선보이는 젤렌에서 미카엘 셰프의 모습.

한국에 온 불가리아 청년

타국에서 산다는 것은 땅에서 식물의 뿌리를 걷어내 화분에 이식하는 것만큼 간단하지만은 않다. 대를 물려 수혈받은 두터운 생활의 궤를 훌훌 벗고 맨몸으로 서야 한다. 고착화된 생활의 결을 뜯어내 새로운 환경에 맞게 한 땀 한 땀 매만져야 한다. 이를 모를 리 없기에 타국살이는 멀리서만 빈번히 동경의 대상이 된다. 불가리아 출신의 미카엘 셰프는 스무 살에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주머니엔 4달러가 전부였다. “불가리아에서 일했던 쉐라톤 호텔을 98년인가, 99년인가에 대우자동차가 샀어요. 그래서 갑자기 호텔에 근무하는 한국 사람이 많아졌죠. 그전까지는 한국에 대해 거의 몰랐어요.” 98년도도 아득한데 지금은 지엠코리아로 이름을 바꾼 대우자동차는 더 까마득했다. 이게 외국인의 입에서 나올 단어들인가 싶어 귀 대신 애꿎은 눈만 비벼댔다. “근데 곧 호텔이 문 닫게 됐어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열리기 전인데 한국인 매니저가 외국인들을 상대할 직원이 필요하다고 한국 호텔에 가서 일하면 어떻겠냐고 했죠.” 그럼 한국에 온 지 도대체 얼마나 된 거냐고 묻자, 그제야 반응을 알아챈 미카엘 셰프가 “으하하, 나 옛날 사람이에요”라며 천진하게 웃었다. 셰프가 한국에 온 당시는 방탄소년단이나 손흥민 같은 인물들이 세상 밖에 나오기도 훨씬 전이다. 한국 드라마가 융성한 시기도 아니었다. 저 먼 불가리아 땅의 청년이 단번에 한국살이를 결심할 뾰족한 이유는 없어 보였다. “아버지는 불가리아인이고 어머니는 폴란드 사람이에요. 아버지도 젊을 때 폴란드에 가서 예쁜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어요. 우리 집안은 다른 나라에 가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을 무조건 찬성해요.” 발칸반도에 속하는 불가리아는 그리스와 터키를 접하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두고 있다. 셰프의 말로 여러 나라의 ‘교차로’ 같은 위치라는 불가리아는 그만큼 다양한 문화들이 혼재되어 있다. 폴란드인 어머니는 어린 미카엘에게 음식 만드는 법부터 양말 꿰매는 법까지 일러주었고, 다양한 문화를 존중하고 새로운 경험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가르쳤다. “언어도 많이 배웠죠. 지금은 불가리아,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폴란드어 5개 국어를 할 수 있어요. 어릴 때는 전 세계가 내 집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미카엘 셰프의 한국행은 허다한 고민도, 지천의 만류도 없이 싱거우리만치 순조로웠다. 거창한 대의는 없었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 만큼 순진하지 않았고, 돈은 없었지만 당장 손에 쥐어질 일이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이태원 세계음식특화거리에 위치한 젤렌의 외관.
이태원 세계음식특화거리에 위치한 젤렌의 외관.
매장 오픈 전 젤렌의 요리사들과 함께 식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미카엘 셰프.
매장 오픈 전 젤렌의 요리사들과 함께 식재료를 손질하고 있는 미카엘 셰프.
들여온 파프리카의 신선함을 점검하고 있다.
들여온 파프리카의 신선함을 점검하고 있다.

한국 유일의 불가리아 레스토랑

한국에 온 미카엘 셰프는 호텔에서 3년간 일하다 그만둔 뒤 믹솔로지 같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러다 좋은 친구들을 만났고 2007년 이태원에 불가리아 가정식을 선보이는 ‘젤렌’을 열었다. “한국에서 택시를 타면 기사님이 어디서 왔냐고 물었어요. 불가리아라고 하면 ‘오 스포츠!’하고 알아봐줬어요. 불가리아 선수들이 88올림픽 때 메달을 많이 땄거든요.” 미카엘 셰프에게 한국이 먼 곳인 만큼 한국 사람들도 불가리아는 머나먼 이국이었다. 음식에 관한 정보는 더욱이 전무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테다. 불가리아 음식은 프렌치나 이탤리언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보다 근거리에 있는 지중해와 터키 스타일에 가깝다. 국민의 80%가 불가리아 정교라 종교적인 이유로 고기, 유제품 등의 동물성 식품을 배제하는 금식 기간을 가진다. 그래서 채소를 활용한 요리가 발달했다.

불가리아 전통 요리 샵스카 샐러드에 치즈를 올리고 있는 셰프의 손.
불가리아 전통 요리 샵스카 샐러드에 치즈를 올리고 있는 셰프의 손.

이태원이 지금처럼 엄연한 상권을 형성하기 전, 야트막한 다세대 주택이 뒤엉킨 어느 좁은 길에 젤렌이 있었다. 신선한 재료의 맛을 살린 젤렌의 음식은 한국에 사는 유럽 사람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반면 젤렌을 찾은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려면 현지화하는 것이 좋을 거라 충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햇수로 13년, 셰프는 타협하지 않았다. 젤렌의 셰프들은 미카엘 셰프가 모국에서 직접 데려온 정통 불가리아 요리사들이다. 소금이나 설탕으로 감미하기보다 치즈로 간과 풍미를 더하고 채소의 풍부한 단맛을 끌어낸 조리법도 현지식이다. 메뉴 중 브레타노는 돼지고기를 망치로 두들겨 얇게 편 뒤 버섯, 쪽파, 당근, 구운 파프리카, 치즈를 넣고 돌돌 말아 오븐에서 굽는 요리다. 비계를 선호하는 한국인의 입맛에 맞춰 지방질 있는 부위를 쓰기보다 깨끗하고 깔끔한 안심을 고수하는 것도 일례다. 이는 한국 유일의 불가리아 레스토랑이란 자긍심이자,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 설득해야만 하는 묵시적 책임감일 테다. “처음엔 정말 힘들었는데 2년이 지나면서 상황이 점차 나아졌어요. 옛날 불가리아가 공산국가의 휴양지로 유명해서 불가리아 음식이 그리웠던 독일 사람들이 찾아주었죠.” 한국에서 알 만한 브랜드의 임원인 독일 손님이 젤렌의 음식을 아꼈고, 다른 친구들을 데려왔다. 그들의 수준에 맞게 젤렌의 플레이팅은 조금씩 세련된 모습을 갖춰갔다.

그릴에 구운 브레타노를 단면이 잘 보이도록 잘라 플레이팅하는 미카엘 셰프.
그릴에 구운 브레타노를 단면이 잘 보이도록 잘라 플레이팅하는 미카엘 셰프.
틀로 모양을 잡은 카타크에 파슬리를 뿌리고 있다.
틀로 모양을 잡은 카타크에 파슬리를 뿌리고 있다.
입구를 기점으로 한 젤렌의 오른쪽 공간. 2007년 젤렌이 처음 시작했던 공간이다.
입구를 기점으로 한 젤렌의 오른쪽 공간. 2007년 젤렌이 처음 시작했던 공간이다.

가장 유명한 불가리아인

미카엘 셰프는 방송을 통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2007년 아리랑TV의 한 프로그램에서 불가리아 문화를 알렸고, MBC <찾아라! 맛있는TV>에서 2년간 게스트로 활동했다. “밴 타고 기차 타고 한국의 시골로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르는 텃밭 채소를 내 식으로 요리하는 거였어요.” 할머니가 기른 가지를 파프리카처럼 태워 껍질을 벗긴 채 요리했는데 할머니는 “아이고 다 태운다!”며 셰프를 혼쭐내기도 했다. “완성된 요리를 먹어보고 맛있으니까 할머니가 볼에 뽀뽀도 해줬어요.(웃음)” 그로부터 본격적인 방송 활동이 시작됐다. 2014년 JTBC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미카엘 셰프는 한국에서 ‘불가리아’보다 유명한 ‘불가리아인’이 됐다. 미카엘 셰프는 한국에서의 모든 것이 새롭고 ‘도전’이지만 이를 기꺼이 즐긴다고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 그의 요리 성향도 다분히 즉흥적이다. 그의 요리는 완벽한 짜임새에 매어 있지 않는다. 그는 변수를 즐기고, 변통에 능하되 잔꾀가 없다. 가령 애피타이저 카타크는 불가리아에서 공수한 종균을 24시간 숙성해 만든다. 만들어진 요거트를 면보에 놓고 다시 24시간 수분을 빼면 반 정도 숨이 꺼진 하얀 덩어리가 완성되는데 그때부터는 셰프 마음대로다. 보통은 알싸한 생마늘, 즙을 잔뜩 머금고 있는 구운 파프리카 살, 구운 주키니, 풍미와 간을 더할 페타 치즈를 썰은 뒤 틀에 요거트와 함께 켜켜이 쌓는다. 올리브유를 두르고 호두 크런치로 식감을 더한다. 딜로 향미를 더하거나 딜이 없는 날엔 파슬리를 넣는다. 셰프가 즉석에서 만든 카타크를 입에 넣으니, 채소의 육즙이 입 안 구석구석으로 야살스럽게 흘러 들었다. 단단한 유지방은 중심축을 잡았다. 헤비한 음식이란 말에도 선뜻 숟가락으로 퍼먹고 싶은 맛, 그래서 젤렌의 요리는 ‘가정식’이다.

직접 만든 요거트를 맛보고 있는 미카엘 셰프. 셰프는 요거트를 얼마든지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직접 만든 요거트를 맛보고 있는 미카엘 셰프. 셰프는 요거트를 얼마든지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미카엘 셰프는 젤렌에 오는 손님들을 직접 맞는다.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아래 요리사에게 건네주고 홀에 나가 직접 접시를 나른다. 그리고 종종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허술한 웃음을 짓는다. 온전한 휴일에는 바이크를 타고 국도를 달린다. 이따금씩 샛길로 새는 것을 즐기고 기대 이상의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면 그보다 기쁠 수 없다. 한국에 온 지 17년째, 그는 많은 것을 품 안에 가두기보다 가로로 벌린 양팔을 돛 삼아 바람을 맞는 쪽이다. 그러곤 바람이 부는 대로 주저 없이 몸을 옮긴다. 앞으로도 그는 이태원 지금의 자리에서 여러 번 먹고, 마시고, 떠다니고, 근사하게 웃을 테다.

-info-

젤렌

이태원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매김한 젤렌에서는 미카엘 셰프의 정통 불가리아 가정식을 맛볼 수 있다.

· 샵스카 샐러드 15,500원, 카타크 16,500원, 브레타노 25,000원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27가길 52 2층
· 월,화요일 오전 11:30~오후3시, 오후 6~11시 / 수~일요일 오전 11시~오후 11시
· 02-749-0600

edit 장은지 — photograph 박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