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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의 물성

2019년 3월 28일 — 0

라기환은 공예작가다. 그는 그릇을 만든다. 그의 단아한 그릇에는 조선 시대 백자의 원형이 담겨 있다.

모든 음식과 식재료는 물성을 가지고 있다. 봄철 식재료인 냉이에는 냉이의 물성이, 두릅에는 두릅의 물성이 있다. 그 물성으로 인해 생김새 외에도 해당 식재료만의 특성이 생긴다. 채소의 물성은 95%에 가까운 무색무취의 물과 탄수화물이 만들어내는 성질에 있다. 식재료 본연의 맛과 향은 각각 1%와 0.1%라는 극히 적은 성분의 조합 결과다. 이런 물성과 특성의 조합은 식재료와 음식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히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는 공예작가의 그릇과 가구는 공산품과 거의 동일한 성분으로 이뤄지지만 1%의 디자인과 0.1%의 손길이 만들어내는 데서 차이가 난다. 이 1.1%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공예작가가 라기환이다. 그의 그릇은 무심코 보면 일반적인 그릇 형태에 가깝지만 음식이 놓이는 순간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띤다. 몇 개의 식기가 무리를 지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만든 그릇의 아름다움은 선에 있다. 단정하고 고상하며 담백하다. 접시만 봐도 둥글고 반듯하지만 자로 잰 듯 일정치는 않다. 아주 조금씩 미묘하게 자신만의 곡선으로 뻗어나간다. 백자를 현대적으로 응용해서 보여주겠다는 그의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소리도 맑게 내는 이가 있고, 구성지게 내는 이가 있는데 저는 맑은 쪽에 가깝죠. 거기에 손맛을 더할 뿐이죠.” 하지만 그릇의 쓰임은 결국 무언가를 담아내는 것이다. 라기환 본인의 생각도 그렇다. 그의 작업은 음식을 가장 돋보이게 만들거나 사람들이 그의 그릇을 캔버스 삼아 스스로 가장 적당한 쓰임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백자를 모티브로 작업하는 공예작가 라기환.
백자를 모티브로 작업하는 공예작가 라기환.
이천도예마을에 위치한 라기환 공방 실내 전경.
이천도예마을에 위치한 라기환 공방 실내 전경.

라기환의 그릇을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가 서울신라호텔의 한식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라연이다. “제 작업이 한식에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해준 곳이죠.” 서울신라호텔은 라연이 2013년 문을 열기 전인 서라벌 시절부터 라기환의 밥과 국그릇을 사용했다. 라연을 준비하며 한식의 선을 지키면서 모던한 형태의 다양한 그릇이 필요했고, 라기환에게 다시 작업을 의뢰했다. 그의 한식기는 기본적으로 달항아리를 수평으로 잘라낸 밥과 국그릇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어울리는 5첩이나 7첩 찬기와 형태를 조금씩 변형한 애피타이저와 메인 요리, 디저트를 위한 그릇이 추가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식기의 기준이 되는 게 밥그릇이에요. 밥그릇이 낮고 넓어지면 국그릇, 거기서 더 평평해지면 접시가 돼요.” 비율의 변주다. 여기에 더 높아지거나 굽의 높낮이를 조절하면 더 특정한 용도의 그릇이 된다. 그렇게 하나의 식기 라인이 탄생한다. 최근에는 차와 떡, 다과 같은 한식 디저트의 수요가 높아지면서 굽 높은 그릇을 작업 중이다. 정성 들여 만든 요리에 어울리는 찬합을 찾는 이들도 늘었다. 그래서 자신의 작업에 어울리는, 단순하지만 완성도 높은 형태의 가구를 만드는 목공예작가와 협업해 3단 찬합을 4월부터 선보인다. 음식이 원목에 묻어나지 않도록 궤의 틀 안에 자기 그릇을 넣었다. 찬합의 뚜껑은 트레이나 플레이트를 겸하도록 위아래를 똑같은 형태로 매끄럽게 디자인했다. 가장 기본적인 찬합이지만 원목과 자기가 조화를 이뤄 그의 그릇처럼 질리지 않는다. 라기환의 작업은 그렇듯 단아하게 명료하다. 재료의 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국의 선이 손맛으로 가미된 또 다른 파인다이닝이다.

빚은 흙을 틀 위에 놓고 하나하나 재단한다.
빚은 흙을 틀 위에 놓고 하나하나 재단한다.
라기환의 공방 한쪽 벽면에 놓인 공구들.
라기환의 공방 한쪽 벽면에 놓인 공구들.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라기환의 다양한 접시들.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라기환의 다양한 접시들.
한식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밥그릇과 국그릇.
한식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밥그릇과 국그릇.

edit 안상호 — photograph 최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