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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 음식과 건강 @정재훈

2019년 2월 8일 — 0

매년 겨울이면 국물 음식이 건강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과연 국물 요리에 대한 논란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아보았다.

text 정재훈 — edit 양혜연 — photograph 박재현

10여 년 전 인천공항에서 맛본 육개장이 아직도 가끔 생각난다. 호텔에서 운영하는 한식당이었는데, 보통 육개장과는 모양이 달랐다. 사골국 비슷한 뽀얀 국물과 길게 찢어 빨갛게 양념에 무친 소고기가 따로 나왔다. 신기하게도 둘을 합하니 육개장 맛이 났다. 기대 이상이었다. 평소에 익숙한 육개장보다 덜 맵고 은은한 단맛에 뒷맛이 깔끔했다. 양념한 고기를 넣을 때 국물 온도가 조금 낮아져서 먹기에 딱 적당한 온도로 맞춰진 것도 국물 맛을 즐기는 데 한몫했다. 몇 년 뒤 다시 인천공항을 찾았을 때는 이미 메뉴가 사라진 뒤였다. 이후에도 한식당 메뉴에서 육개장을 보면 혹시 국물과 고기가 따로 나오는 형태가 아닌지 확인하곤 했지만 허사였다. 그렇게 단 한 번 맛본 육개장은 나의 인생 육개장이 되어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마 전 방송에서 이 얘길 꺼내며 비슷한 육개장에 대한 제보를 기다렸지만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생각해보면, 추억의 절반은 국물 음식이다. 콩나물국밥 맛에 반해, 지나가다 콩나물국밥집이 눈에 띄면 일단 한 번 들어가서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던 시절이 있었고, 설렁탕을 좋아하시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설렁탕 노포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지난 12월 초 부산에서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맛본 메르씨엘 윤화영 셰프의 채소수프도 잊을 수 없다. 엄격하게 온도를 제어하면서 여러 시간 끓여낸 국물에 채소의 깊은 단맛과 감칠맛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뤘다. 입에서 식도를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마치 온몸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국물 음식의 과학

우리가 사랑하는 국물 맛은 글루탐산의 맛이기도 하다. 국물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봐도 그렇다. 유리 글루탐산이 많이 들어 있는 것들이 주로 쓰인다.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에는 100g당 10~20mg의 유리 글루탐산이 들어 있다. 아주 많은 양은 아니다. 글루탐산은 고기 단백질의 주성분 중 하나로, 동물성 단백질의 약 20%에 해당할 만큼 많이 들어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단백질 사슬에 묶여 있어서 맛을 낼 수 없다. 하지만 재료를 물과 함께 가열하면 근육 세포 속에 붙잡혀 있던 감칠맛 성분이 따로 떨어져 국물 속으로 녹아 나온다. (유리 글루탐산의 ‘유리’는 따로 떨어져 나왔다는 걸 조금 어렵지만 짧게 쓴 말이다.) 2015년 12월 식품과학저널에 실린 핀란드 연구팀의 실험 결과에 따르면 온도와 가열 시간에 따라 감칠맛 성분이 달라진다. 돼지고기를 수비드로 80℃에서 조리할 때 60℃, 70℃일 때보다 흘러나온 육즙 속 유리 아미노산 농도가 증가했다. 특히 고기보다 육즙에서 유리 글루탐산 농도가 두 배로 높았다. 아마도 고온에서 단백질과 펩타이드의 가수분해가 더 격렬하게 일어났기 때문일 거다. 수비드 조리에 대한 실험이지만 국물 요리에 그대로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 국물에 고기를 넣고 고온으로 끓이는 과정에서 감칠맛 성분이 증가한다. 무작정 오래 끓인다고 단백질이 엄청나게 더 많이 분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온도와 시간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국물 맛이 달라지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채소와 과일로 국물을 낼 때도 글루탐산이 중요하다. 양파, 버섯, 토마토에는 유리 글루탐산이 고기보다 더 많이 들어 있다. 고기에 비해 단백질의 양은 적지만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유리 글루탐산 형태로 존재하는 비율이 높다. 물에 넣고 가열하면 단단한 식물 세포벽에 싸여 있던 당과 감칠맛 성분이 녹아 나온다. 온도와 시간을 어떻게 조절하고, 채소마다 다른 풍미의 강약을 어떻게 맞춰주느냐에 따라 국물 맛에 차이가 크다. 각각의 채소를 넣는 시점과 조리 방법에 따라서도 전체 풍미가 달라진다. 고기 육수와 채소 육수를 언제 합치느냐도 중요하다. 채소 육수를 너무 오래 끓이면 풍미를 내는 방향성 물질이 대부분 날아가버려 도리어 맛을 해칠 수도 있다. MSG로 대표되는 글루탐산은 대부분의 동식물성 식품에 존재한다. 그러나 국물 음식의 감칠맛을 내는 데는 글루탐산이 다가 아니다. 맛이 더 약하긴 하지만 아스파트산도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 중 하나다. 핵산계 조미료로 불리는 이노신산(IMP), 아데닐산(AMP), 구아닐산(GMP)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이 글루탐산과 힘을 합하면 원래보다 수십 배까지 감칠맛이 증가한다. 이노신산은 어류, 육류에 존재하며, 아데닐산은 갑각류, 연체동물류, 채소에 들어 있는 성분이다. 버섯에는 글루탐산도 많이 들어 있지만 감칠맛 증폭 효과가 강력한 구아닐산도 많이 들어 있다. 소고기와 버섯을 넣고 국을 끓이면 별다른 조미료를 넣지 않아도 감칠맛이 폭발하는 이유다. 뜨거운 국물 속에서 재료는 분해되고, 서로의 향미 물질을 주고받으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지할 수 없었던 새로운 맛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국물 요리의 맛은 개별 재료를 아무리 오랫동안 입에 넣고 씹어도 느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층위의 맛이다.

국물 음식과 건강 문제

매년 겨울이면 국물 음식으로 인한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어묵 국물을 티처럼 마시는 어묵 티가 판매될 정도로 뜨거운 국물에 대한 갈증이 높아지는 시즌이지만, 이때를 노렸다는 듯이 건강을 위해 국물 음식을 적게 먹으라는 이야기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한다. 먹으라는 건지 먹지 말라는 건지 머리 아프다. 하지만 따져봐야 한다. 다른 건강 뉴스가 그렇듯 국물에 대한 이야기도 사실인 경우도 있지만 틀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선 국물 음식을 너무 많이 먹으면 나트륨 섭취 과잉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식약처에서 2018년 1월 발표한 외식 영양성분 자료집 제5권을 보면 뼈다귀 해장국 1인분(1000g)에만 나트륨 3088mg이 들어 있어서 국물까지 싹싹 비우고 나면 1일 섭취 기준치 대비 나트륨 섭취가 154%에 이르게 된다. 설날 떡국의 나트륨도 만만치 않아서 하루 영양소 기준치의 96%가 한 그릇(800g)에 녹아 있다. 나트륨 섭취 과잉은 고혈압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국물을 적게 먹어서 나트륨 섭취를 줄이면 혈압이 떨어지는데, 특히 중장년층, 고혈압 환자와 당뇨, 신장병을 앓고 있는 경우에 혈압 강하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난다. 가끔 국밥을 즐기면서도 걱정하지 않으려면 평소 국그릇은 작은 사이즈를 사용하는 게 낫다. 상식에 반대되는 내용이지만, 국물 요리에 소금보다 MSG를 먼저 넣어주는 것도 나트륨 섭취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MSG가 짠맛을 높여주는 앰프 역할을 하여 맛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트륨 섭취를 30%까지 줄일 수 있다. 반면에 국물이 소화액을 희석하여 소화에 방해가 된다는 속설은 틀렸다. 인체가 하루에 소화액으로 분비하는 물의 양이 7L나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7L에 약간의 국물을 추가한다고 소화에 방해가 될 정도로 효소가 희석될 수 없다. 물 말아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거나 식사 중에 물을 마시면 소화가 안 된다는 것도 틀린 이야기다. 반면에 국물이 소화에 도움이 된다거나 국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 혈당이 빠르게 올라가서 살찐다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이지만 틀린 건 마찬가지다. 뻑뻑한 맨밥이 침만으로 잘 넘어가지 않을 때 국물이 더 잘 넘어가게 해주는 정도면 모를까 국물에 말아 먹는 것만으로 소화 흡수에 별다른 영향을 주기는 어렵다. 사실은 정반대로, 국물 음식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수프와 다이어트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영양학자 바버라 롤스의 2007년 실험 결과, 식사 15분 전에 미리 채소수프를 먹고 나서 점심 식사를 하도록 하자 실험 참가자의 전체 점심 섭취 칼로리가 20% 줄어들었다. 식전에 같은 양의 맹물을 마셨을 때는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롤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수프와 같은 부피가 큰 국물 음식이 위장을 늘리고 포만감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점도가 높아서 위장에 오래 머무르는 국물 음식일수록 이런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먹고 나서 든든한 포만감 때문이었을까. 국물 음식은 외식 메뉴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8세기 파리에서 레스토랑은 원기를 회복시키는 고기 국물을 뜻하는 말(레스토랑)로 시작하여 그런 요리를 파는 식당이란 뜻으로 변모했고, 우리의 외식 메뉴에서 가장 역사가 긴 것도 다름 아닌 국밥이다. 비록 양을 줄일지언정 미식가가 겨울철 따끈한 국물 음식을 안 먹고 못 배기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정재훈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한 후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년간 약사로 일했다. 음식만큼이나 사람들과 요리와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잡지, TV, 라디오 등 여러 매체를 통해 음식과 약에 대한 과학적 정보를 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정재훈의 식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