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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용의 영주

2019년 1월 30일 — 0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활동 중인 오영주와 두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을 지키고, 타인을 높이는 자존감과 담백한 맛이 지닌 포용의 미덕에 관해.

누가 알았겠는가, 구애하는 여성에게 방석을 끌고 나가 장미꽃을 전하던 세기말의 연애 프로그램이 남녀의 일상을 관찰하며 감정선을 추리하는 서스펜스 장르물로 진화하게 될지. 채널A의 <하트시그널>은 연애 예능에 대한 참신한 접근으로 시즌 1의 성공에 이어 시즌 2까지 가뿐히 성공시키며 일반인 출연자들을 연예인에 준하는 관심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았다. <하트시그널>은 아침 세수만 해도 반짝반짝 윤이 나는 청춘 남녀들을 한 달 동안 한 지붕 아래 몰아넣고 마음의 화살촉을 추리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제는 고전 청춘물이 되어버린 <남자 셋 여자 셋>의 ‘합숙 낭만’에 불안감을 고조하는 ‘썸 추리’란 장치가 도입된 형식은 로맨스와 서스펜스의 장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같은 이성에게 관심을 보이는 출연자와 친구가 되어야 하는 환경은 비정한 누아르를 볼 때만큼이나 서늘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하트시그널 시즌 2>의 성공, 그 속에는 ‘오영주’가 있었다. 평창동 고급 맨션이 주는 위화감, 제한된 시간의 작동, 때마침 겨울이란 계절의 세팅. 세 조합이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시그널 하우스’를 출연자 오영주는 참으로 작고도 단단한 몸으로 누볐다. “우연한 기회로 시즌 1에 먼저 제안을 받았었어요. 그땐 막연히 제 사생활이 노출된다는 사실이 두려워 거절했는데, 시즌 2에 다시 한 번 제안을 해주셔서 숙고 끝에 출연하게 되었어요. 제 인생에 다시 못할 경험일 것 같단 예감이 들어서요.” 다양한 직업과 개성을 지닌 출연자들 사이 오영주는 특히 시청자들의 큰 지지를 얻었다. 오래도록 시선이 머무는 매력적인 마스크 때문에도 그랬지만 자신의 마음을 용감하게 꺼내 보이고, 드라마틱한 연출에도 가련한 여주인공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스물아홉 여성의 ‘존엄’은 보는 이들을 고무시키기 충분했다.

한 켠에 진열된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하고 있는 오영주의 모습.
한 켠에 진열된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하고 있는 오영주의 모습.

<하트시그널 시즌 2>의 촬영이 막바지를 달리고 있을 때로부터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뽀얀 입김이 서리는 1월의 어느 날, 오영주를 만나기 위해 합정의 ‘잇텐고’를 향했다. 인터뷰에 앞서 맛집을 추천해달란 요청에 오영주는 열과 성을 다해 무려 10개의 맛집 리스트를 공유해주었다. 일본식 라멘 전문점 잇텐고는 그중 맨 위에 이름을 올린 곳이다. “맛집 감별에 조금 재능이 있다 자부하는 편인데, 어느 날 서치를 하다 이곳 바질라멘 사진을 보게 되었어요. 국물의 색깔도 인상적인데 와서 먹어보니 너무 담백한 거예요. 긴 줄을 감수해야 하지만 담백한 국물이 생각날 때면 찾곤 해요.” 돈코츠 육수 베이스에 바질이 듬뿍 들어간 국물, 적당히 물기를 머금은 고들고들한 면, 그 위로 아삭아삭한 파채와 한 뼘 길이만 한 차슈 두 덩이. 눈에서부터 흥미를 자아내는 바질라멘의 맛은 오픈 시간 전부터 길게 늘어선 줄이 이미 보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질라멘의 국물을 한 모금 호로록 삼키자, 짜고 묵직할 거란 예상과 달리 염도는 부표처럼 가볍고 바질 향은 물밑 해초처럼 입 안을 간질여댔다.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는데, 자극적이거나 짜지 않은 것이 저에게 중요한 것 같아요. 식재료 자체의 맛에 충실한 일식이나 가정식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아요.” 지나치게 더하거나 꾸민 데 없이 수수한 맛. 이러한 오영주의 입맛은 사람을 대할 때와도 닮았다. “식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여자든 남자든 따뜻한 사람에게 마음이 가요. 가식 없이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 그런 사람은 확실히 곁에 있을 때 온기를 느낄 수 있어요.”

오영주에게 메뉴를 설명하고 있는 잇텐고의 대표.
오영주에게 메뉴를 설명하고 있는 잇텐고의 대표.

오영주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일찍이 집밥의 소중함을 알았던 그는 한식이 그리울 때면 미역국을 한 솥 뭉근히 끓여놓고는 밖에 나가기 전 속을 따뜻하게 데웠다. 어린 나이 타국 생활이 ‘제 몸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했을까. 평소 건강을 중요시 여긴다는 그는 시간이 나는 날이면 조금 수고롭더라도 채소 볶음이나 현미밥처럼 몸에 좋은 집밥을 손수 차린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집에서 해먹는 일이 예전보다 늘었다. 부모님의 집에서 독립했고, 다니던 직장을 관뒀기 때문이다. <하트시그널 시즌 2> 방영 당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인 오영주’에게 동질감을 가졌음은 틀림없다. 시청자들은 화면 속 개성 강한 이력의 출연자들보다 오영주의 상황에 자신의 연애 경험을 비추어보았다. 그런 그가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라고 하자, 한 켠에서는 반발이 일기도 했다. 소위 ‘떴으니 방송인으로 전향하는 거냐’는 일견 상투적이고 날 선 반응이었다. 오영주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로서도 염려했던 반응이었어요. 제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방송 전부터 퇴사를 염두에 두고 있던 차에 촬영을 시작하게 된 거였어요. 그런데 직장인이란 것에 많은 분들이 지지를 보내주었고, 촬영을 마치고 보니 퇴사를 하기가 더 어렵더라고요. 고민이 많았지만 더 늦기 전에 새롭게 도전해보기로 했고,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어요.”

현재 오영주는 ‘직장인’이란 꼬리표를 떼고 ‘유튜브 크리에이터’란 이름으로 수줍은 날갯짓을 하는 중. 기획부터 촬영, 편집까지 직접 해서 일상을 담은 영상을 유튜브에 공유한다. “개인 방송을 하려고 퇴사를 한 것은 아니에요. 지금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제가 진정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시간이라 생각해요. TV 출연 덕분에 라디오나 강연 등 못 해본 경험들을 쌓을 기회가 생겨 놀라고 감사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는 연세대 원더우먼 페스티벌을 시작으로 ‘자존감’을 주제로 한 강연을 종종 진행해왔다. “주최 측에서 자존감이란 주제를 먼저 제시해주었어요. 저도 잘 몰랐는데 제게 ‘자존감 지킴이’란 별명이 있었더라고요.(웃음)” 상대의 고민을 들어줄 때 훈계하기보다 되도록 많이 듣고 공감하며 상대방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오영주의 모습에서 비롯된 별명이다. 그렇다면 자존감을 주제로 한 강연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한국 사회에 살다 보면 남을 의식하게 되는 일이 더러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들이 나에 대해 이래저래 판단하고 비난할 때, 우리 모두 그 말들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단단한 뿌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자존감의 모습이에요. 자만감도 아니고 자기애와는 다른,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요.” 자신의 자존감을 길러내는 것 못지않게 남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 말하는 오영주는 종종 강단에 서지만 아직 그 스스로도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이룬 게 없다며, 현재 자신의 상황에 대해 “인생의 전환점 앞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중인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음식에선 담백한 맛을 즐긴다는 오영주는 담백한 사람에게 마음이 간다고도 말했지만 담백한 맛은 정작 그와 닮은 구석이 있다. 담백함은 매운맛, 짠맛, 쓴맛들에서 한 발짝 물러나 다른 모든 맛들을 잇고 채우는 역할을 한다. 마치 그가 자신은 물론 타인의 자존감을 높이고 끌어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담백함같이 늘 꾸준하게 사랑받을 만큼, 견실한 것은 없다는 것을.

차슈를 올린 미도리카메(바질라멘)과 토마토 쓰케모노, 함께 곁들이기 좋은 맥주.
차슈를 올린 미도리카메(바질라멘)과 토마토 쓰케모노, 함께 곁들이기 좋은 맥주.

잇텐고
줄 서 먹는 오영주의 맛집 잇텐고에서는 향긋하고 고소한 바질라멘과 진한 사골 육수의 히카타 라멘 등을 즐길 수 있다. 이곳의 라멘을 주문할 때 두툼한 차슈 추가는 필수다.
· 미도리카메(바질라멘) 1만원, 키요마사(얼큰한 라멘) 8000원, 키츠네(히카타 라멘) 7000원, 차슈 추가 2000원
· 서울시 마포구 포은로 11
· 오전 11시 30분~오후 2시 30분, 오후 5~9시, 일요일 휴무
· 02-337-7715

edit 장은지 — photograph 양성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