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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고의 다른 무언가

2018년 12월 12일 — 0

뜨거운 입김도 입술 밖으로 새어 나오는 순간 얼어버린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이 함께 있는 계절, 겨울. 그 안에는 가수 정기고의 새로운 출발과 끝맺음도 자리했다.

바람 속에 냉기가 묻어나는 초겨울 날씨, 연남동에 위치한 이탤리언 레스토랑 르미엘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가수 정기고의 얼굴에는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화덕 앞에서 피자 반죽을 하고 있던 르미엘 이준호 대표에게 반가운 안부 인사를 건넸다. “르미엘이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던 시절부터 맛있어서 알게 된 레스토랑이에요. 연남동으로 옮기고 나서도 종종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저와 한 다리 건너 가까워진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었더라고요.” 이곳에서 먹어보지 않은 메뉴가 없을 정도로 모든 음식들을 두루 섭렵했다. 마르게리타, 고르곤졸라, 치뽈라, 디아볼라 등 화덕 피자와 오일 파스타, 알프레도 풍기, 봉골레 등 다양한 파스타까지. 그중에서 가장 즐겨 먹는 건 뭐니 뭐니 해도 피자다. 24시간 숙성된 도우를 매장 안에 있는 화덕에 구운 로마식 신 피자는 그의 입맛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했다. 오늘은 베이컨과 버섯 위에 신선한 루꼴라를 토핑한 담백한 루꼴라피자를 준비했다. 이준호 대표는 전날 미리 숙성시킨 반죽을 꺼내 얇은 원형의 도우가 되도록 한 손에 들고 능숙하게 돌려 넓게 폈다. “알고 지낸 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일하는 친구의 모습은 처음 봐요. 정말 다르게 보이네요.” 연예계 대표 미식가라는 칭호를 가진 그의 미식 취향은 어떨까. 예능 방송에서 유럽 여행 중에 친구와 햄버거 19개를 먹었다는 푸드파이터에 비견할 만한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던 그다. “저는 미식가라기보다 대식가에 가까워요. 먹는 것을 가리지 않고 정말 좋아할 뿐이에요.” 최근에는 전라도의 대표 음식인 폭 삭힌 홍어에 도전해보았다. 드라마에 출연 중인 걸스데이 소진이 홍어 먹는 장면을 준비하기 위해 같이 먹어달라는 SOS 요청을 보내왔기 때문. “초심자가 먹을 만한 홍어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어요. 쌈을 싸서 삼합으로 먹으니깐 괜찮던데요. 코끝까지 뻥 뚫어주는 알싸한 맛이 매력 있더라고요.” 문제는 배불리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자고 난 다음 날이었다. 코를 찌르는 홍어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옷에 푹 배어 집 안 전체에 쿰쿰한 냄새가 진동한 것이다. 결국 문제의 옷은 물론 그 옆에 놓였던 옷가지들까지 모두 세탁을 맡겨야 했다. 자극적인 홍어의 맛만큼이나 강렬한 체험기였다.

친한 친구 사이기도 한 이준호 대표와 가수 정기고가 서로 안부를 건네며 환하게 웃고 있다.
친한 친구 사이기도 한 이준호 대표와 가수 정기고가 서로 안부를 건네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처럼 즐기는 음식의 범위가 넓기도 하지만, 그 양도 만만찮다. “주는 대로 먹는 스타일이에요. 상대방이 제지하지 않으면 붕어처럼 배가 터질 때까지 먹죠.” 어릴 때부터 복스럽게 잘 먹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할머니가 카레를 한 솥 가득 끓여주시면 부엌에서 밥그릇을 든 채로 서서 일주일 내내 남은 카레를 군말 없이 맛있게 먹기도 했다. “선택권이 다양하게 주어지면 저도 골라서 먹기야 하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잘 먹어요. 결론은 그냥 다 잘 먹습니다.(웃음)” 머쓱하게 웃어 보이는 그가 진짜로 좋아하는 음식은 바로 면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 라멘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돈코츠, 쇼유, 미소 라멘 등 종류 불문이다. 홍대 길라멘, 마시타야, 부탄츄는 그가 손에 꼽는 라멘 맛집이다. “보통 라멘집에 가면 면의 삶는 정도를 선택할 수 있거든요. 살짝 덜 익힌 정도의 바리카타 면을 가장 선호해요.” 현지 라멘을 먹기 위해 일본 원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후쿠오카 지역을 가장 자주 오간다. “돈코츠 라멘의 시초가 후쿠오카현의 하카타거든요. 홋카이도현 삿포로의 미소 라멘도 좋아하고요.” 후쿠오카에 가면 라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대창, 곱창류의 고기 부속물 요리인 호르몬도 꼭 맛보고 온다. 후쿠오카에 아는 DJ 친구들에게 현지 주민들이 즐겨 찾는 숨겨진 맛집을 물어물어 수소문해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렇게 먹는 것을 좋아하니 다이어트를 해야 할 때는 초인적인 절제력이 필요하다. “우선 사람들을 최대한 만나지 않고요. 아예 굶을 수는 없으니 탄수화물을 줄이고 샐러드나 고기 위주로 섭취해요.” 한창 방송 활동을 할 때는 한 달 사이에 10kg 이상 감량하기도 했다. “사실 술이 제일 문제죠.” 술 마신 다음 날이면 국물이 당긴다.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면 라멘을, 시원한 국물이 필요하면 평양냉면을 찾는다. “평양냉면의 슴슴하고 시원한 국물을 삼키는 순간 식도부터 차갑게 내려가는 느낌에 속이 확 풀리죠.”

능숙한 손놀림으로 도우를 얇고 넓게 펴고 있는 르미엘 이준호 대표.
능숙한 손놀림으로 도우를 얇고 넓게 펴고 있는 르미엘 이준호 대표.
화덕에서 갓 구워 나온 따끈한 루꼴라피자의 모습.
화덕에서 갓 구워 나온 따끈한 루꼴라피자의 모습.
르미엘 이준호 대표가 풍성한 루꼴라 토핑 위에 파르메산 치즈를 뿌려 마무리하고 있다.
르미엘 이준호 대표가 풍성한 루꼴라 토핑 위에 파르메산 치즈를 뿌려 마무리하고 있다.

집에서는 보통 어떤 요리를 해먹을까. “달걀, 베이컨, 소시지, 스테이크처럼 간단한 요리 위주로만 해요. 스테이크는 좋아해서 자주 굽고요.” 최상의 스테이크 맛을 연구하기 위해 관련 다큐멘터리도 찾아 공부했을 정도다. 불의 세기, 숙성 유무, 굽는 시간과 정도 등 여러 조건들이 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고기의 질이 맛을 좌우하는 것 같아요.” 좋은 고기는 어떻게 구워도 기본은 한다는 것. 몇 가지 팁이 더 있다면 냉동실에서 고기를 꺼내 30~40분 정도 상온에 두어야 굽기에 좋은 온도가 된다. 그리고 올리브유를 바르고 후춧가루를 뿌려 밑간을 해둔다. “누구는 굽고 나서 후춧가루를 뿌리라고 하지만, 제 취향은 구울 때 후춧가루가 살짝 타면서 나는 풍미가 더 마음에 들더라고요.” 외식을 한다면 건대에 위치한 원테이블 이탤리언 레스토랑 롱테이블에서 채끝 스테이크를 주문한다. 그만의 또다른 숨겨진 스테이크 맛집이다.

인터뷰 막바지에 이르러 그가 최근 발매한 앨범 에 대한 소개를 부탁했다. 소속사를 나와 자신만의 비전으로 차린 회사에서 처음 발표하는 앨범이다. 이 말인즉슨 그가 지향하는 바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음악일 것이란 뜻이다. 그의 선택은 의외로 힙합도, 케이팝도, R&B도 아닌 재즈였다. ‘정기고 퀸텟’이라는 보컬, 색소폰, 피아노, 베이스, 드럼 총 5중주의 퀸텟 구성으로 발표한 재즈 앨범이다. 앨범 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재즈계의 명사이자 영화 <본 투 비 블루>로 더 유명해진 쳇 베이커를 위한 일종의 헌사다. ‘썸’으로 기억하는 대중들에게 그의 행보는 뜻밖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재즈 음악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가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었다. 8년 전 싱글 앨범을 발표했을 당시에도, ‘썸’으로 히트를 친 4년 전에도 쳇 베이커의 노래로 재즈 공연을 열기도 했다. “쳇 베이커를 정말 예전부터 좋아했어요. 언젠가는 그의 노래들을 불러보고 싶단 생각을 항상 간직하고 있던 차에 승민이(색소폰을 맡은 한승민)가 현재 재즈 신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친구들을 모아주며 이번 프로젝트가 성사되었죠.” 주변에서는 재즈가 ‘돈이 되는’ 음악이 아니기에 걱정하는 목소리로 만류하기도 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저 밴드 친구들과 어디에 내놓아도 창피하지 않은 디스코그라피를 만들고 싶었죠. 그런 소기의 목적은 달성해서 뿌듯해요.”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넘어 그의 앨범은 이미 재즈 애호가는 물론 대중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11월 30일 홍대에서 ‘재즈 올스타’라는 클럽 공연을 비롯하여 12월부터는 본격적인 재즈 공연과 또 다른 싱글 앨범 발매도 앞두고 있다. 데뷔 16년 만에 다시 출발선 앞에 선 그는 음식이란 불처럼 잘 다스려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좀처럼 절제하기 힘든 매혹적인 대상이니깐. 우리에게는 정기고의 음악이야말로 꼭 그렇다. 건조할수록 불은 더 뜨겁게 타오르는 법. 어떤 이유로든 정서가 메말라버렸다면 단숨에 그의 목소리가 마음에 불을 지를 것이다. 맹렬하게, 활활.

루꼴라피자 한 조각을 포크에 쥐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 정기고.
루꼴라피자 한 조각을 포크에 쥐고 흐뭇한 표정을 짓는 정기고.
신선한 루꼴라가 토핑된 이탈리아 로마식 화덕피자와 고소한 풍미의 크림 파스타는 르미엘의 대표 메뉴이자 가수 정기고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다.
신선한 루꼴라가 토핑된 이탈리아 로마식 화덕피자와 고소한 풍미의 크림 파스타는 르미엘의 대표 메뉴이자 가수 정기고가 가장 사랑하는 음식이다.

르미엘
화덕에서 구운 로마식 신 피자와 파스타를 맛볼 수 있는 이탤리언 비스트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칵테일과 맥주, 와인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캐주얼한 비스트로 펍이다.
· 루꼴라피자 2만1000원, 오일파스타 1만4000원, 크림리조또 1만6500원
·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38길 12, 2층
· 정오~오후 3시, 오후 5시~새벽 1시 / 금·토요일 정오~새벽 2시, 일요일 정오~새벽 1시, 월요일 휴무
· 02-6338-3700

edit 이승민 — photograph 박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