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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인문학 @이해림

2018년 11월 26일 — 0

맛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이유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음식은 인문학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text 이해림

‘왜 더 맛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더 맛있는 맛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맛의 이유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내겐 음식의 인문학이다. 알수록 더 맛있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왜 이 사과는 저 사과보다 더 맛있어?’, ‘왜 식당 스테이크는 더 맛있어?’, ‘왜 사천 음식이 유행이야?’ 이제까지 쓴 칼럼을 매만져 <탐식생활>이라는 책을 내게 되었다. 마침 10월 말 출간이라 목차를 정리하던 참이다. 마흔 몇 꼭지를 되돌아보니 죄다 먹보의 발성으로 “왜”라고 묻고 있다. 내가 봐도 집요하고 기가 막히다. 식재료도 다루고, 조리 기술도 다루고, 음식 트렌드도 다뤘지만 분야와 관계없이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왜 맛있어?”라니 나의 궁금증이라는 것도 지성적이고 고차원적인 줄 알았더니 꽤나 단순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여간 “왜 맛있을까?” 이 하나를 하도 묻고 다녔더니 집요한 인간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식당 주인, 요리사들이 붙인 딱지다. 푸드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인이기 이전에 타고나기부터가 먹보인 나의 식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언제나 ‘왜’로부터 출발한다.

‘왜 인간은 밤 11시에 라면을 꼭 먹고 싶은 거야?’라는 인문학적 질문 하나에 붙는 다양한 학문적 답변들이 요즘은 모두 인문학으로 통한다. 학문 분야로서의 인문학과 별개로 요즘 인문학으로 뭉뚱그려지는 지식, 교양 카테고리의 다양한 학문 분야들이 모두 ‘왜’를 묻는다. 엄격한 의미의 인문학은 철학, 언어, 언어학, 문학, 역사, 법률, 철학, 고고학, 예술사 등까지가 포함되지만 통용되는 의미의 인문학은 심리학, 정치학 등 관계된 학문에 자연과학, 사회과학까지 다 넘나든다. 모든 위대한 학문은 ‘왜’로부터 출발했고 인문학은 특히나 ‘왜’를 형이상학적으로 묻는 학문이다 보니 그저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면 다 인문학이라고 하나 보다 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왜 맛있어?’ 나의 단순한 질문 역시 감히 인문학이라 치고, 이제부터 음식에 있어 ‘왜’가 얼마나 유익하고 유효한 질문인지를 증명해보려 한다. ‘왜’ 이전에 ‘어떻게’가 있었다. 처음엔 ‘저걸 어떻게 잡을까?’와 ‘딸까’ 혹은 ‘뜯을까’, ‘캘까’였을 것이고 그 첫 ‘어떻게’를 해결한 직후 ‘이걸 어떻게 먹을까?’가 따라왔을 것이다. 수렵, 채취다. ‘어떻게 더 많이 먹을까?’로부터 농경이 시작됐을 테고 ‘어떻게 더 맛있게 먹을까?’라는 질문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육종 등 기술이 생겨났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먹거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20세기 말까지 이 질문이 먹는다는 문제에 언제나 붙어 다녔다. 특히 근대 이후 한국에선 식량 증산이 크나큰 과제였기에 ‘왜 맛있을까?’ 같은 문제가 나올 여유가 없었다. 이를테면 박정희는 쌀 생산량을 불리기 위해 맛도 없는 통일벼를 전국에 확산시켜버렸다. 바로 얼마 전까지 식량이란 맛보다는 절대량이 우선한 가치였고, 짧은 과도기라 할 수 있는 것이 ‘질’에 대한 질문이었다. 한동안 우리는 어떤 식재료의 ‘효능’에 집중하는 우스운 시기도 거쳐왔다. 여전히 구세대들은 어떤 식재료나 음식이 암을 고치고 정력을 좋게 해주리라 믿고 산다. 음식을 먹으면서 ‘어떻게 좋아질까?’까지 덤으로 묻던 시절은 짧게 지나갔다.

이제 왜의 시대다. 왜라는 질문을 동물이나 식물이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인간은 이 ‘왜’라는 질문으로 인해 널리 이로운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 특히 내 경우엔 ‘왜’를 묻기 시작하면서 맛에 대한 탐구가 시작됐다. 그리하여 가장 단순하고도 원초적인 질문, ‘왜 더 맛있을까?’다. 사과 같은 식재료는 재배 방법과 기후, 품종과 보존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왜 사과 맛이 다른가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맛있는 사과를 고를 수 있게 됐다. 스테이크같이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음식은 고기의 부위와 특성, 조리도구와 화력원과 조리 방식, 부재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내가 구운 스테이크는 왜 맛이 없는가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나는 이제 어떤 고기를 가져와도 맛있는 스테이크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마라샹궈가 유행한 것은 중국의 젊은 힙스터들이 그 맵고 얼얼한 사천 지방의 맛을 힙하게 여기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맛이 어떻게 작동하고, 또 어떤 맛과 잘 붙는지를 질문함으로써 한국에서 맛있는 마라샹궈를 찾아내고 중국 사천 지방의 맛을 더 잘 내는 곳도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질문과 답에는 조리과학과 유전학과 발생학과 사회학과 인류학과 지역학과 심리학이 모두 잠재돼 있는 모양인데, 아마도 이런 질문과 답변이 요즘 정의의 음식 인문학에 포함될 것이다.

물론 ‘왜’라는 것은 ‘어떻게’보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한계 안에서는 더 맛있는 것을 찾기가 힘들다. ‘사과를 어떻게 고르는가?’라고 물어서는 윤기 나고 새빨가며 묵직한 사과밖에 고르지 못한다. ‘왜, 왜, 왜’ 하며 한 꺼풀 더 꼬치꼬치 맛의 이유를 따져 들어간다는 것은 번거롭고, 때로 불필요하기까지 하다. 이해도 되지 않는 열역학을 들여다보거나 발음하기도 어려운 화학식을 읽어야 할 때도 있다. 분명한 과잉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집요하게 굴어가며 더 많은 이유를 모을수록 맛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는소리를 하기는 해도, 아는 만큼 더 맛있는 맛이 보상으로 돌아오는 일을 나는 몹시 보람되게 여긴다. 아는 것은 무척 유용하고 기쁜 것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감히 결론 내기를, ‘왜?’를 묻기 시작하면서 내게 음식은 인문학이 되었다. 맛의 이유를 파고들고, 탐구하고, 캐물어가는 집요한 것이 내게 음식의 인문학이다.

이해림은 푸드 칼럼니스트로 신문, 잡지 등 각종 매체에 글을 싣고 있다. 10월 말 출간되는 <탐식생활> 외에도 몇 권의 책을 준비 중이며, <수요미식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크고 작은 음식 관련 기획, 영상 콘텐츠 제작과 강연도 부지런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