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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침 @정동현

2018년 8월 20일 — 0

비좁은 골목으로 향하지 않아도 된다. 태국에 갈 필요도 없다. 향신료를 볶고 빻아 만든 뜨거운 남국의 향과 맛이 홍대에 있다. 맞다. 데이비드 톰슨의 롱침이 드디어 한국에 왔다.

text 정동현 — illustration 왕조현

태국 음식은 전 세계적으로 복제된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런던 파리 뉴욕에서도 팟타이와 똠얌꿍을 먹을 수 있다. 태국에 가도 사정은 비슷하다. 식당마다 메뉴가 크게 다르지 않고 맛도 비슷하다. 이유는 태국 정부가 몇몇 음식을 태국 대표 음식으로 밀었기 때문이다. ‘태국을 볶다’라는 뜻의 팟타이는 태국 정부가 관광객을 타깃으로 1970년대에 만든 새로운 음식이다. 태국 음식 세계화는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음식의 관광화 프로그램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통한다. 결국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한국의 ‘한식 세계화’도 실은 태국을 벤치마킹한 정책이었다. 레시피의 정량화, 표준화를 통해 어디를 가든 비슷한 맛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네슬레’를 비롯한 다국적 식료품 회사의 소스 배합 실력은 평범한 수준을 벗어났다. 태국 거리 노점상들 중 상당수가 네슬레산 소스를 대놓고 쓴다. 덕분에 동남아 음식 수준이 한 단계 올라갔지만 개성도 사라졌다. 한국의 태국 음식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 온 외국인이 불고기와 된장찌개를 먹듯 한국의 태국 음식도 팟타이와 똠얌꿍 두 가지 메뉴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외국 음식을 처음 접하는 소비자가 몇 가지 대표적인 음식으로 그 나라 음식을 이해하는 것은 맞다. 한번에 세 가지 이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의 인지 능력이 가진 한계다. 이탈리아는 피자, 미국은 햄버거, 일본은 스시란 식이다. 하지만 태국에 이 두 가지 음식만 있을 리는 없다. 우리도 불고기와 된장찌개만 먹지 않는다. 제육볶음, 애호박찌개, 가지나물도 먹는다. 그리고 언제나 길거리 음식 운운하며 투박한 음식만 즐길 리도 없다. 지난 2018년 4월 홍대 라이즈 호텔에 문을 연 롱침LongChim은 여러모로 태국 음식의 정형에서 벗어난다. 우선 알 수 없는 태국 말로 주문을 주고받는 태국 요리사가 없다. 대신 영어로 이야기하는 백인 남자 요리사와 그 뒤로 병사처럼 움직이는 한국인 요리사들이 있다. 그들이 내놓는 음식도 관광 음식 수준을 넘어선다. 이 모든 것 뒤에는 한 남자가 있다. 세계 제일의 태국 음식 덕후 데이비드 톰슨David Thompson이다. 호주 출신의 이 남자는 <타이 푸드Thai Food>라는 태국 요리책도 냈다. 태국 현지 밑바닥부터 훑어내어 태국의 거의 모든 요리가 담긴 책이다. 베개로 써도 될 만큼 두꺼운 이 책은 영어로 쓰인 최고의 태국 요리책이란 평가를 받았다. 최근 그가 쓴 책은 <타이 스트리트 푸드>로 태국 길거리 음식을 집대성했다. 그리고 그는 태국 메트로폴리탄 호텔에 있는 남Nahm이라는 전범과도 같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냈다. 한국으로 치면 종로 한복판에 서양인이 한정식집을 낸 셈이다. 그의 최근 작품은 조금 더 가볍게 태국 음식을 푼 ‘롱침’이다. 시드니, 멜버른에 이어 세계 네 번째 지점이 바로 홍대에 문을 열었다. 한국의 태국 음식 지형을 완전히 새롭게 바꿀, 국제적 브랜드의 한국 진출이다.

롱침으로 가기 위해선 주차도 되지 않는 후미진 골목을 물어 가지 않아도 된다. 높은 층고가 쾌적한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그 층고만큼 시원한 미소를 한 종업원이 다가와 안내를 했다. 여느 한국 호텔에서 느낄 수 있는 지나치게 무거운 정중함이나 엇나간 무뚝뚝함이 아닌 가벼우면서도 쾌적한 응대였다. 호텔 4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길고 넓은 바였다. 근래 외국의 태국 레스토랑에 가면 대부분 바를 따로 두고 있다. 이유는 동남아 향신료, 즉 라임이나 고수, 바질 등으로 칵테일을 만들고 이 칵테일은 같은 재료로 조리한 음식과 당연히 잘 어울리며, 그 조합을 손님들 또한 좋아하기 때문이다. 바를 지나 조금만 안으로 들어서면 넓은 오픈 키친이 들어서 있었다. 주방 기물과 재료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오히려 공해가 되는 키친이 아닌, 손님이 보고 즐길 수 있는 무대와 같은 오픈 키친이었다. 몇몇 조명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만들었고 그 속에 요리사들이 서 있었다. 마치 스트라빈스키의 ‘불의 제전’을 듣고 보는 것만 같았다. 눈과 코를 때리는 향신료의 향기가 공중으로 뿜어져 나왔고 요리사들은 그 틈에서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들이 제일 잘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메뉴를 살폈다. 주류 메뉴는 작은 판형에 여러 장이었다. 시작은 열대 허브와 향신료를 배합한 칵테일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이었다. 진 칵테일 말고는 다른 술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이에 카피르Kaffir 라임 잎을 곁들인 ‘큐컴버 사우스사이드Cucumber Southside’라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품 한 곡 길이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칵테일이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여름밤 향기를 닮은 칵테일을 조금씩 목구멍으로 흘러 넘겼다. 여름이, 뜨거운 밤이 조금씩 식혀졌고 대신 기대감이 고양됐다. 음식 메뉴는 한 장이었다. 하지만 전채(Starter), 수프, 볶음(Stir Fries), 튀김(Deep Fries), 구이(Grill and Oven), 밥, 국수, 디저트로 구성된 짜임새는 집 한 채를 보는 것처럼 탄탄했다.

시작은 차이브 케이크와 크런치 새우였다. 자주색 꽃이 그려진 접시 위에 올라온 차이브 케이크는 밀가루 반죽에 쪽파와 비슷한 차이브를 넣어 기름에 부치고 위에 튀긴 마늘, 고수 그리고 피시 소스와 설탕수수당을 섞고 졸여 만든 소스를 뿌린 요리였다. 부추전을 먹는 것처럼 그 형식은 친숙했지만 그 맛은 훨씬 더 강렬했다. 민물새우를 튀기고 타이바질 고수 등을 섞고 라임즙을 뿌린 크런치 새우도 주저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입 속에 번지는 짠맛은 적도 인근 열대의 끈끈한 기운에 묻어 다른 종류의 음색을 냈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고함, 오토바이 경적, 수많은 외국어들, 그 뒤로 잔잔한 풀벌레의 움직임, 이 모두가 얽히고설킨 남국의 밤이 시작되는 신호였다. 똠얌꿍이 아닌 핫앤사우어수프Hot and Sour Soup란 이름을 쓴 수프는 열대의 소리가 증폭된 콘서트장 같았다. 날카롭게 조련된 신맛은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음역대를 가리키는 듯 혀뿌리를 쳤다. 신맛에 비하면 매운맛은 오히려 담담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짬뽕 국물처럼 얼큰한 맛을 강조한, 평범한 종류와는 다른 섬세하면서도 과감한 개성은 가려지지 않았다. 껍질을 벗겨 국물에 넣은 토마토의 디테일과 한 입에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큰 새우, 국물 위에 뜬 쿨란트로Culantro와 같은 보기 드문 허브들은 이 수프를 더욱 비범하게 만들었다. 차이니스 브로콜리와 볶음 쌀국수는 날카로운 수프와는 달리 무겁고 둔탁했다. 달걀을 풀어 그 맛을 희석시키기는 했지만 피시 소스의 무게감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아예 푹 익힌 쌀국수는 그 소스를 남김없이 흡수해 씹을 때마다 사탕수수를 씹은 것처럼 액체가 흘러나왔다. 쌀국수의 식감보다는 맛에 초점을 맞춘 조리법이었다. 이 두 요리의 중간쯤에 위치한 것은 치킨 그린 커리였다. 한국에서 절대 흔히 볼 수 없었던 스네이크 빈Sneak Bean, 짧은 초록 가지(Thai Eggplant)가 들어간 그린 커리는 절대 시판 페이스트에서 볼 수 없는, 마치 절대 다시 재현될 수 없으리라고 경고하듯 비현실적으로 풍요로운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때그때 향신료를 볶고 빻아 끓여 만든 노동의 맛이었고 마땅히 그랬어야 할 맛이었다. 먹을 때마다 초록을 품은 향과 맵고 짜고 단 맛이 위장 구석구석으로 옮겨갔다. 이 각각의 맛을 하나로 묶은 것은 하얀 자스민 라이스였다. 일정 금액(5000원)에 떨어지지 않게 계속 보충되는 자스민 라이스는 방콕 남Nahm에서도 보았던 메뉴 구성법이었다. 이 메뉴를 만든 이가 자스민 라이스가 태국 음식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단품으로 맛보면 목소리와 개성이 강했던 음식이 하얀 쌀알을 만나 고함이 아닌 노래를 만들었다. 꽃을 닮은 향기와 코코넛과 비슷한 단맛을 품은 자스민 라이스는 음식과 음식 사이의 공백을 번지듯 메웠다. 한 접시 한 접시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사이 미소를 잃지 않은 종업원들은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를 넘나들며 멈춰 있지 않았다. 주방 요리사들 이마에서는 땀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젊고 음식은 힘찼다. 답습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는 창조하는 이가 이끌어낸 맛이 그곳에 있었다. 이 나라에 필요한 맛이었다. 이 나라가 오래도록 그리워한 맛이었다.

정동현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유통 회사를 다니다가 훌쩍 영국의 요리 학교 탕트 마리Tante Marie로 유학을 떠났다. 호주의 레스토랑에서 늦깎이 셰프로 요리 열정을 불사르며 일했다.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으며, 지금은 신세계그룹 F&B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 일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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